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77
19. 중원으로 번지는 불.
1.
태현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의 경련을 억누르며 일어섰다. 오른다리가 잘려나가 중심을 잡기 힘든 몸으로 겅중겅중 뛰면서 현각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대기도 참혹한, 바라보기도 어려운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현각은 목이 잘리고 허리가 잘렸다.
적의 칼질이 번쩍하는 순간 이 결과가 만들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각의 금강진천도세를 피해 연신 물러나던 적이, 한순간 칼로 불티를 뿌리더니 반격을 했다.
그건 태현자 자신이 흙모래에 당했을 때와 똑같았다. 그 파탄의 순간에 결론이 났다.
알면서도 당했다.
현각은 태현자 자신이 그렇게 당했다는 것을 보고 겪었다.
이 협곡 안에서 사제들이 함정과 유인에 걸려 죽어가는 것도 봤다.
그러한데도 적과 마주쳐서 결국 그렇게 죽었다.
피할 수가 없었던 거다.
‘대동보의 맹호!’
이제 흉수가 누군지 안다. 복면을 했지만 그자다.
정체와 실력을 숨기고 있던 그자가 뒤따라와서 모두를 죽였다.
이유는 모른다. 그는 갔다. 현각을 죽이고 돌아섰다.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그렇게 사라졌는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불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비록 다리 하나가 없지만 죽을힘을 다하면 못 빠져 나갈 곳이 아니다.
이젠 막는 자도 없다.
협곡 안의 수풀들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지만 군데군데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다.
저 앞에 폭포가 있다.
폭포라고 부르기도 뭐한 작은 것이지만 저곳에 몸을 적시면 된다.
마음을 정한 태현자는 즉시 폭포를 향해 달려갔다.
한 다리로 껑충거리면서 사력을 다해 달렸다.
폭포 앞의 작은 연못 같은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품안의 비급은 걱정하지 않았다. 유지로 완벽하게 밀봉한 상태다.
상처에 물이 닿아 더욱 고통스러웠지만 몸을 최대한 적시고 일어섰다.
‘왜 비급을 놔두고 갔나?’
능선길을 향해 한 다리로 달리며 태현자는 그것을 생각했다.
대동보의 맹호, 목계백이란 그자가 따라와 모두를 죽인 이유가 그것 밖에는 생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비급을 놔두고 돌아섰다. 정체를 알게 된 태현자 자신도 놔뒀다.
여기에 무슨 이유와 배경이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살아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불붙은 나무와 잡목들을 검으로 후려치며 태현자는 죽을힘을 다해 능선길로 나아갔다.
한 다리로 능선길을 달려가는 태현자의 뒷모습을 보며 목계백은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내려다 본 협곡 안의 불길은 이제 사그라지고 있었다. 항아리와 같은 형세인 안쪽에서 태울 만한 것은 다 태운상황이고, 한참 초록물이 오르는 절벽 쪽의 넝쿨들엔 불이 옮겨 붙지 않은 까닭이다.
‘이산을 넘어가면 매촌(梅村), 황산(黃山)의 대력황호채(大力黃虎寨) 산적들의 정탐전초기지가 있는 곳.’
머릿속에 그려놓은 마지막 그림을 위해 목계백은 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저기 하늘이 벌건 게 이상하지 않냐?”
무달은 서천목산이 있는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조구는 미간을 가득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마치 불이 난 것 같은 모양인데?”
“불이 났다고? 서천목산에 산불이 났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그런 거 같은데? 뭐, 큰 불은 아닌 모양이다. 불빛이 어른거리기만 하잖아?”
“야, 산불이 나면 다 끝장이지 뭐 그런 소릴 하냐? 어른거리다가 저절로 꺼진다는 거냐?”
“그럴 수도 있지. 저걸 봐라. 큰 산불이라면 서천목산 전체가 벌겋게 숯처럼 변해야 맞잖아. 그런데 그게 아닌데 뭐. 어디 한구탱이에 불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잦아드는 중인거야. 보라고, 불빛이 점점 작아지고 있잖아?”
“뭐,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던 무달은 갑자기 신경질을 부렸다.
“에이, 쓰버럴! 이 밤중에 잠도 못자고 왜 이런 고생을 시키는 거야? 항주에서 일이 터졌으면 터졌지, 그게 여기 장사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있다고 사람을 볶냔 말이야? 산채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조구가 객잔 밖 우물을 향해 돌멩이 하나를 던지며 말을 받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산적 놈이 뭔 잡생각이 그리 많냐? 우리가 있는 매촌관이 별 볼일 없는 정탐소에 불과하다고, 이런 곳에 사람을 처박아 놓고 고생시킨다고 불만 늘어놓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 안 나냐?”
“야, 그건 그거고.”
“그게 그거여서 네 바람대로 됐잖아. 항주에서 급변이 터지고, 그 바람에 산채에서 부채주가 급히 나오고, 그 시중을 우리가 들어야 하고 말이다.”
“아 쓰벌 부채주.”
생각하면 화만 난다는 듯 무달은 넌더리를 냈다. 조구도 한숨을 쉬었다.
“채주가 분명히 특명을 내렸을 텐데, 여기 나와서 계집을 셋이나 끼고 허리만 돌려대고 있으니 참 가관이고 대단한 노릇이다. 그 수발을 들려고 십리나 떨어진 령국(寧國)까지 가서 기녀들을 구해다 바쳐야 하는 우리 신세는 가혹하고. 산채에서 나온 놈들은 처먹고 퍼마시고만 있고. 하아.”
무달은 원행상인들과 그 밖의 손님들이 묶은 매화관의 본관을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우리 돈 들고 튈래?”
조구는 눈을 화등잔 만하게 떴다.
“뭐? 너 미쳤냐? 잡히면 능치처참을 당할 걸 알면서 그런 소릴 해?”
“쓰벌, 세상사는 것 어차피 한바탕, 뭐 두려울 게 있어?”
“허, 이놈이 정말 미쳤구나?”
“그래 미쳤다. 여기서 이렇게 썩어나느니 차라리 그 짓이 낫지. 어차피 산적졸개 노릇이나 하다 죽을 바엔 해보자 이거지. 여기서 우리가 매일 보고 겪는 게 뭐야? 서천목산을 넘어오거나 돌아오는 자들, 다른 길로부터 오가는 자들의 대한 정보를 본채에 알리는 정탐꾼 노릇 밖에 더 해?”
“그래서? 그게 싫어서 죽을 자리를 파자 이거냐?”
“잡히지 않으면 돼지.”
“허어, 이 미친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미쳤다는 소릴 거듭해서 하던 조구의 시선이 그 순간 돌아갔다. 매화관 앞길로 누군가 허우적거리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복면을 벗어던진 목계백은 지치고 고된 몸짓으로 매화관을 향해 달려갔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우물을 향해 달려가 정신없이 우물물을 퍼 마셨다.
그러자 매화관 앞에 나와 있던 두 사내가 다가왔다.
지난날 항주를 벗어나던 길에 이곳에 들렸을 때도 있던 그자들, 산적들이다.
“거 무슨 일이오? 호랑이라도 만났소?”
“허, 몰골이 말이 아니구랴?”
무슨 일이든지 정탐을 하는 게 이들의 임무라, 말을 거는 두 남자에게 목계백은 대답했다.
“서, 서천목산에 불이 났습니다!”
다급하고 겁에 질린 목계백의 목소리에 무달과 조구는 서로를 돌아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역시 그렇구나, 하는 빛이 떠올랐고 다시 목계백을 봤다.
“불속을 헤쳐 온 거요?”
“허, 산불이면 큰일 아닌가?”
두레박의 우물물을 다시 벌컥 거리고 마신 목계백은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을 뱉었다.
“사, 사람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강호무림인들 같은데, 남궁세가의 비급이 어쩌고 하면서 살육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중들하고 도사들인 것 같았습니다! 하마터면 거기 휘말려 죽을 뻔했습니다!”
무달과 조구는 다시 서로를 돌아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 즉시 돌아서 달렸다.
우물물을 다시 한 번 마신 목계백은 두 사내가 매화촌의 별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시린 미소를 입가에 문채로 다시 돌아섰다.
* * *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모른다. 구르고 쓰러지며 내려왔다. 혈도를 점해 지혈을 한 오른다리에 더 이상 출혈은 없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불에 그슬린 도복은 구멍이 나고 재투성이였으며 손에 쥔 검은 지팡이에 불과했다.
‘민가를 찾아가야 해! 민가만 찾으면 돼!’
없는 힘을 다시 짜내어 태현자는 일어섰다. 검을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겼다.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전진했다. 무당에 전갈을 보내서 비급을 전하고 흉수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보, 목계백, 네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도를 닦던 수행자의 신분은 이 순간 모두 망각한 채, 태현자는 원한과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제자들이 죽던 광경에 눈앞에 다시 떠올랐다.
치가 떨렸다.
견원지간 같았던 광법대사의 최후도 떠올랐고, 현각과 십팔나한들이 죽던 순간도 기억났다.
모든 것이 꿈만 같고 원통했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던 태현자는 고개를 들었다.
‘응?’
앞쪽에서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십여 개다. 사람들이 분명하다. 빠르게 다가오는 걸로 봐서 말을 탄자들이다. 이 밤에 이런 외지에 저런 자들이 나타날 이유는 흔치 않다. 세상의 일이란 게 모두 그렇듯 이유가 있다.
‘날 노린, 아니 비급을 노린 자들이다!’
깨달음은 잡은 순간 태현자는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질주해 온 자들, 말 탄자들의 행렬은 이미 가까웠다. 그들은 태현자를 보고 소리쳤다. 선두에 있는 자는 커다란 창을 벼락처럼 던졌다.
한 다리로 숲을 향해 뛰던 태현자는 몸을 던졌다.
창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수풀 안으로 굴러 일어나 보니 창은 고목나무를 관통하고 박혔다. 창자루가 오리알 만하게 굵고 창날은 웬만한 대도 하나를 붙인 것 같았다.
“쥐새끼야 숨지 말고 나와라!”
커다란 종소리와 같은 외침을 터트린 자가 숲으로 뛰어 들어왔다. 검은 붕조처럼 커다란 몸은 창이 박힌 고목을 몸으로 받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무가 부러졌다. 관통해 박혔던 큰 창은 그자의 손에 다시 잡혔다.
태현자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켜 소리쳤다.
“무당의 태현자다! 어인 무리인지 모르나 무당의 지엄함을 안다면 물러서라!”
커다란 창을 든 자, 키가 칠 척은 될듯한 거한은 성큼 다가서며 코웃음 쳤다.
“카핫, 무당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 그걸로 밥이라도 사먹으라는 거냐? 그러면 그런 개소리 말고 돈을 내놔야지? 돈 되는 거 말야?”
태현자는 눈을 치뜨고 검을 세운 채 물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거한은 곰가죽 옷이 꽉 끼는 입은 우람한 어깨를 흔들며 대답했다.
“위대한 황산의 대력황호채 영웅들이시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채주의 자리에 있는 거력신창(巨力神槍) 모태경(毛太競) 어른이시지.”
태현자는 미간을 구겼다.
“감히, 대력황호채 따위의 산적 놈들이 무당의 이름을 능멸하려 하다니……!”
“능멸은 무슨 능멸! 힘 있는 놈이 가지고 죽이는 거고 힘없는 놈들이 뺏기고 죽임당하는 거지! 그게 세상이야! 너희 도사놈들이 지껄이는 건 전부 헛소리지! 게다가 네놈들도 뒷구멍으론 호박씨 까면서 살지 않나!”
“원시천존! 물러서라! 물러나지 않으면 네놈들은 무당의 진노를 피 할 수 없을 것이다!”
“개소리! 네놈이야말로 그 자리에 꿇어앉아 살려달라고 빌어라! 네놈이 서천목산으로부터 나온 유일한 놈인 것 같은데, 네놈이 남궁세가의 비급을 가졌다면 이 어른에게 고이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모가지를 자르리라!”
모태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산적들이 포위하며 다가섰다.
횃불을 밝히고 병장기를 든 그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일부는 태현자가 지나온 곳, 서천목산을 향해 달려갔다. 정확한 형세를 파악하려 함이다.
“지옥 불에 떨어질 놈들이……”
부러져라 이를 악무는 태현자에게 모태경이 커다란 창을 겨누고 최호통첩을 했다.
“꿇어라! 비급을 바치면 살려준다! 아니면 이 자리가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곰가죽을 입고 곰 같은 기세를 부리며 외치는 자, 거력신창 모태경과 포위한 산적들을 보며 태현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목계백, 네놈의 계획이 이거로구나.”
다시 눈을 뜬 태현자는 하나 밖에 없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 검을 세웠다. 그 눈동자에 더 이상 분노나 원한, 절망과 회한은 없었다. 무당의 검을 배운 자로서의 기개와 평온, 이제야 깨달은 검심만이 있었다.
“와라.”
태현자의 담담한 목소리와 더불어 거력신창과 산적들은 공격을 시작했다.
장엄하고 웅장하게 퍼져 나오는 태현자의 검세를 보고 목계백은 감탄했다. 진즉에 저러한 검을 펼쳤더라면 저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과 더불어, 결국은 자신의 손에 저리되고 말았을 것이란 생각, 그 뒤로 이어지는 사소한 안타까움과 놀람 등을 씹으며 격전을 바라봤다.
결과는 났다.
결국 태현자는 죽음을 당했다. 산적들을 십수 명이나 베어 넘겼지만 거력신창 모태경의 창을 피하지 못했다. 커다란 그의 창이 휘돌아 태현자의 목을 날렸다. 수하들의 죽음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한 태현자의 몸이 넘어갔고, 그 품에서 모태경은 비급을 꺼냈다.
시린 미소로 바라보던 목계백은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밤새소리와 같은 그 소리에 반응하며 숲속으로부터 흑풍이 나타났다.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의 흑풍을 달래고 쓰다듬어주며 항주로 달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