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92
191화. 일기장 (1)매극렴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백수룡은 역용술을 풀었다.
“들키면 어쩌나 했는데…… 후. 두 번은 못 할 짓이군.”
운이 좋았다.
평소처럼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둔 매극렴이었다면, 아무리 백수룡의 역용술이 뛰어나도 정체를 들켰을 확률이 낮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매극렴은 딸 생각에 마음이 어지럽고, 안 마시던 술까지 마신 탓에 취기가 꽤 오른 상황이었다.
덕분에 백수룡은 그의 무뎌진 감각을 속일 수 있었다.
‘속인 건 미안하지만, 내가 직접 물어봤으면 절대로 말 안 했을 테니까.’
매극렴처럼 자존심이 강한 무인은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에게는 절대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심마에 시달렸다는 사실도 수십 년이나 숨겨오지 않았던가.
‘지천이 할아버지한테는 나중에 잘 설명하면 될 테고.’
갑자기 술친구가 생긴 위지열은 당황하겠지만, 백수룡의 부탁이니 입을 맞춰 줄 것이다.
“참나. 팔자에도 없는 할아버지랑 아버지를 만나서 이게 웬 고생인지.”
헛웃음을 흘린 백수룡은 매극렴이 올려보던 밤하늘을 바라봤다. 새카만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다.
매극렴을 먼저 백무흔과 만나게 해, 못다 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려고.
지금 백수룡의 경지라면 몰래 쫓아가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들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슬슬 출발할까.”
중얼거린 백수룡의 신형이 순식간에 담장을 넘었다.
휘익!
시원한 밤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백수룡은 적당한 속도를 경공을 펼쳐 백무흔이 말한 호수로 향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은린호(銀鱗湖).
물에 달빛이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은빛 비늘이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미추(美醜)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백수룡도 작게 감탄할 만큼, 은린호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연인들이 함께 오기에 무척이나 좋을 곳처럼 보였다.
-이 아비는 호수 앞에서 네 어머니에게 청혼했단다. 은린호라고 불리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지.
-정말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불쑥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
따뜻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무흔과, 그를 올려보는 어린 자신.
“갑자기 또…….”
백수룡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있을 리 없는 기억과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다행히 두통은 금방 사라졌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에 백수룡은 혼란스러웠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일단 두 사람의 기척을 찾았다.
당장은 이 혼란스러운 기억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저기 있군.’
그리 큰 호수가 아니어서 금방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까이 접근한 백수룡은 주변에 있는 나무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툭.
기척을 내지 않고 나뭇가지 위에 내려선 백수룡은 호숫가에 서 있는 부친과 외조부에게 시선을 주었다.
삼 장 정도의 어색한 거리를 두고,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는데, 기막을 둘러쳤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해?’
사람 심리라는 게 이상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늦게 왔는데, 막상 저 모습을 보니 궁금증이 치밀었다.
백수룡은 잠시 고민했다.
‘기막을 뚫으려고 했다간 바로 들킬 테고……. 그래. 아무래도 엿듣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조금 자세히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백수룡은 역천신공을 끌어올려서 혈마안을 개안했다.
키이잉-!
그의 두 눈이 붉게 물들며 밤의 어둠을 꿰뚫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과 표정이 대낮처럼 세세하게 보였다.
“…….”
주로 말을 하는 쪽은 매극렴이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반면 듣고 있는 백무흔의 반응은 격정적이었다.
“!!”
이야기를 듣다가 한 번씩 매극렴을 돌아보며 큰 소리를 냈는데, 독순술을 익힌 백수룡은 그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찰이라도 보냈어야지요!’
‘저는 그렇다 쳐도! 약빙은 끝까지 그것도 모르고……!’
어느새 백무흔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악문 잇새로 피가 흘렀고, 꽉 쥔 주먹은 새하얗게 질렸다.
‘미안하구나.’
매극렴의 입 모양은 훨씬 읽기 쉬웠다. 그는 느리고 힘겨운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늙은 검객은 수십 년 만에 용서를 구했다.
정확한 이유도 모르고 지금껏 자신을 증오했을 사위에게, 끝까지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했을 거라 오해하고 눈을 감은 딸에게.
주름진 노인의 눈에서도 속죄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쯧…….’
백수룡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둘 사이의 오해는 수십 년간 쌓여 해묵은 감정이 되었다.
단숨에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래도…… 조금씩 사라지겠지.’
두 사람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멈추고, 서로를 향하던 적대적인 시선에 새로운 감정이 깃들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작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잠깐이지만 피식 웃음을 짓는 모습도 보였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네.’
화해하는 듯한 분위기에 백수룡의 입가에도 훈훈한 미소가 맺혀졌다.
백수룡은 혈마안을 거뒀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에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음?’
잠깐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는 것 같더니…… 기막이 걷히고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갈! 이런 개잡놈을 보았나!”
매극렴이 먼저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았다.
“장인어른이야말로 항상 이런 식입니까!”
백무흔도 얌전히 듣고만 있지 않았다. 그 역시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채채채챙!
순식간에 검이 십여 차례 부딪치며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다.
백수룡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왜 또 싸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화해하던 분위기였는데, 다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칼을 휘둘러 댄단 말인가.
심지어 싸움은 점점 흉험해졌다. 서로의 칼날이 급소를 스치기를 몇 번.
“어휴, 진짜.”
보다 못한 백수룡은 끼어들어서 싸움을 말리기로 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까아앙!
두 사람이 한 차례 검을 크게 부딪친 후, 거리를 벌린 순간을 노렸다.
펄럭!
둘 사이에 푸른 장포를 펄럭이며 내려선 백수룡이 일갈했다.
“그만들 좀 하세요! 어머니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 으허억!”
백수룡이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뒤로 물러난 줄 알았던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자신을 노린 것이다.
간신히 공격을 피했지만, 자세가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무슨 짓…….”
그 순간, 백수룡은 보았다.
부친과 외조부가 자신을 향해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요 녀석. 역시 지켜보고 있었구나.”
“애비랑 할애비가 눈물 콧물을 짜는 모습을 구경하니 좋더냐?”
함정이었구나!
“자, 잠깐만! 그런 게 아니라…….”
안색이 변한 백수룡의 변명을 하려 했지만, 두 사람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답무용!””
두 절정의 검객은 마치 십 년은 합을 맞춰 온 것처럼 백수룡을 몰아붙였다.
속전속결. 아예 검을 뽑을 시간도 주지 않을 작정인 듯 엄청난 속도였다.
휙휙휙휙!
매극렴의 검초는 수십 마리의 뱀처럼 백수룡의 온갖 요혈을 노렸다.
‘이건 진심이잖아!’
당황한 백수룡이 어지럽게 보법을 밟으며 뒤로 물러난 순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백무흔이 그 뒤로 몸을 던져 아들을 끌어안았다.
덥석!
마치 동귀어진의 한 수와도 같은 그 수법에는 백수룡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지?”
“장인어른! 지금입니다!”
“오냐! 잘 잡았다.”
매극렴이 검을 검집에 넣은 채 몽둥이처럼 쥐고 다가왔다.
백수룡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게 뭔…….”
다치게 할 작정으로 백무흔을 떨쳐낸다면 할 수야 있었지만, 차마 친부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뒤에서 껴안은 것이다. 아버지가 이런 교활한 작자였다니!
결국 백무흔을 떨쳐내지 못한 상태에서, 백수룡은 다가오는 매극렴에게 희망을 걸어보았다.
“하, 할아버님. 설마 하나뿐인 손자를 그 검으로 개 패듯이 패시려는 건 아니죠?”
조금 전까지 딸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노인은 없었다.
학생주임 매극렴의 두 눈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네가 내 속을 썩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서 하고, 악인곡도 멋대로 쳐들어가서 다쳤지. 학생이었으면 요절을 내도 여러 번 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결과적으로 좋았지. 하지만 혈육 된 입장에서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느냐? 요놈아. 너 하는 짓이 얄미워서 언젠가 쥐어박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말이 본심이잖아요!”
백수룡의 반항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백무흔이 뒤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장인어른. 아들놈이 하루아침에 고수가 되더니, 아주 버릇이 없어졌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참교육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옳거니. 아비의 허락도 받았으니, 내 거절하지 않으마.”
매극렴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는 가운데, 백수룡이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두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쿵짝이 잘 맞았는데―!”
은린호의 반짝이는 수면 위로, 백수룡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 * *
“끄응. 하나뿐인 아들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드니 좋아요?”
백수룡은 계란으로 멍든 눈가를 문지르며 부친을 노려봤다.
그 맞은편에는 백무흔이 똑같이 계란으로 눈을 문지르고 있었다.
“너는 오십 먹은 애비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드니 좋으냐?”
“저야 어쩔 수 없이 저항하다가 이렇게 된 거고요. 아버지는 아들 폭행 현장에 가담하다가 장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실수로 맞은 거잖아요?”
“……실수 맞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일부러 때리신 것 같은데…….”
“일부러 때린 거 맞아요. 때리고 웃는 거 내가 봤어.”
“역시! 내 그 양반이 그럴 줄 알았다!”
한참을 마주 보며 투덜대던 부자는 문득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푸흐흡!”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마주 앉아서 계란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꼴이 너무나 우스웠던 것이다.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무관 애들은 많이 컸어요?”
“말도 마라. 장이 그 녀석은 네가 청룡학관 강사가 됐다는 얘길 듣더니…….”
매극렴은 돌아오자마자 먼저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둘만 남은 부자는 마주 앉아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백수룡은 깜빡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맞다. 저한테 줄 게 있다면서요?”
“아, 이거 말이냐.”
백무흔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두꺼운 서책이었다.
그 서책을 건네는 백무흔의 눈빛이 묘했다.
“꽁꽁 숨겨도 놨더구나. 쥐를 잡으려고 천장을 뜯었다가 찾았다.”
“이게 뭔데요?”
“……직접 읽어 보면 안다. 자리를 비켜 줄 테니 혼자 읽거라.”
백무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방에서 나갔다.
“뭔데 저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고개를 갸웃거린 백수룡은 건네받은 서책을 펼쳤다.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자주 꾼다.」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익숙한 필체였다. 예전에 백수룡이 쓴 글인 듯했다.
백수룡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한 사내가 나오는 꿈인데, 그 사내는 이제는 사라진 혈교의 무공 교관이었다.」
백수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는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