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97
396화. 예. 선생님.
죽여라.
천살의 명령이 머릿속에 전달된 순간, 대기 중이던 살막의 살수들은 각자가 맡은 살행 대상에게 접근했다.
스르륵.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 무공인 암혼류(暗混流)가 그들의 존재감을 지웠다. 황궁의 첩보 조직인 천영의 암영류가 암혼류를 흉내 낸 무공이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살막의 살수들도 결코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암혼류는 혈교의 마공을 기반으로 만든 무공이며, 자신들의 적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마공에 반응하는 술법을 청룡패에 건 것만으로도, 가까이 접근하는 살수의 기척을 대부분 사전에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수십 년간 무림의 사냥꾼으로 군림해온 살수 집단이, 오늘 밤 역으로 사냥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살막의 사살(四殺)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단전을 꿰뚫은 검, 그리고 그 검을 쥐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변장술에 한해서라면, 그는 천살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설령 상대가 청룡신협이라 해도 감쪽같이 속이고 접근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살의 자랑인 변장술은 매극렴에게 단숨에 간파되었고, 준비한 기습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단전이 꿰뚫렸다.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낸다 한들, 인두겁을 쓴 짐승을 못 알아볼 성싶더냐?”
매극렴은 검을 비틀어 빼냈다.
털썩 무너진 살수를 바라보는 노검객의 눈빛은, 망자가 살아온 생애의 죄를 추궁하는 지옥의 판관처럼 준엄했다.
“너는 살막의 몇 번째 백정이더냐?”
“…….”
사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 매극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살수의 목을 베었다.
촤악!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실력을 보아하니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니겠지.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
억울함으로 부릅뜬 얼굴을 일별한 매극렴은 다른 살수를 찾아 나섰다.
“안내에 따라 대피하십시오!”
“병장기를 든 자들은 모두 호패를 제출하시오!”
“지시에 불응하는 자는 모두 포박하라!”
축제는 끝났다.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던 개방, 하오문, 관아가 동시에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무림맹도 행동을 개시했다. 강서 지부의 지부장과 정예 맹원들이 직접 살수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무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처음에는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도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매극렴은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거리를 홀로 수색하며, 손자의 말을 떠올렸다.
-이번 기회에 살막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청룡학관, 나아가 도시 전체에 덫을 놓고 살막을 끌어들이자는 계획에 매극렴이 처음부터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진 백수룡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앞으로 살수들에게서 안전해집니다. 전면전이 아닌 한, 혈교도 청룡학관을 건드릴 엄두를 못 낼 테니까요.
과감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정은 약빙을 닮은 것이 분명했다.
손자에게서 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매극렴은 기쁨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스윽.
자리에서 멈춰선 매극렴이 주변을 향해 말했다. 손가락으로 검파를 툭툭 건드리면서였다.
“나오거라.”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살수들이 솟구쳐 매극렴을 덮쳤다.
숫자는 다섯.
천라지망이 좁혀지며 자신들을 색출하는 와중에도, 살수들은 당황하지 않고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우웅-!
매극렴은 제 품 안의 청룡패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청룡학관에서 가장 오래된 청룡패였다.
손자가 여기에 술법을 걸어서 돌려주었을 때, 매극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내가 천살을 유인하마.
매극렴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청룡신협의 가족.
살수들 입장에서는, 백수룡의 제자들 이상으로 가치가 높은 목표일 것이다.
때문에 자청해서 미끼가 되겠다고 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이 늙은이가 맡는 것이 옳다.
-할아버님…….
매극렴은 걱정할 것 없다며 손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룡아. 내 검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단다.
그리고 지금,
매극렴은 그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한평생 쌓아 올린 검술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흐릿한 궤적들이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살수들의 잘린 팔다리나 목이 떨어졌다.
투둑. 투둑.
노검객이 평생을 쌓아 온 검도(劍道)에 비하면, 단순히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수들의 검술은 조잡한 칼질에 불과할 따름.
다섯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살수가 멈칫하며 물러서자, 매극렴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 목이 아직 붙어 있거늘 어찌 물러나는 것이냐. 얼마든지 와서 베어 보거라.”
검치(劍痴) 매극렴.
검을 다루는 기예에 있어서만큼은, 백수룡도 존경하는 검의 달인.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마.”
발이 사뿐히 땅을 지르밟은 순간, 매극렴은 한줄기 질풍이 되어 살수에게 쇄도했다. 강하게 진각을 밟지 않고도 쾌속한 움직임에서 고아한 품격이 묻어났다.
촤악!
마지막 살수를 베어낸 순간, 또다시 어둠 속에서 살수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암기와 화살, 쇠 그물 따위가 사방에서 날아왔다.
“잡스럽구나.”
가볍게 혀를 찬 매극렴은 검기를 일으켜 날아오는 암기들을 모조리 베고, 살수의 목을 쳤다.
그렇게 베고, 또 베었다.
‘많군.’
살막의 정확한 인원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대략 서른 내외의 정예 조직으로 짐작할 뿐.
그러나 그 숫자는 살막에서 ‘번호’를 받은 자들만을 의미할 뿐, 살막이 부리는 하부 조직이나 실혼인 따위를 합치면 그 숫자는 기백이 넘을 것이다.
“……아까부터 잡것들만 보이는구나. 천살이라는 놈은 어디 있느냐?”
홀로 살수를 스물, 아니 서른은 족히 베었을까.
매극렴은 조금씩 도망치는 살수들을 쫓아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극렴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안전해진다면 그걸로 되었다.’
자신에게 살수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학생들은 안전해질 것이고, 백수룡이 천살을 찾아내는 것도 수월해질 테니까.
그때였다. 강렬한 존재감을 갖춘 흑의인이 매극렴 앞에 나타났다.
“말이 안 나오는군.”
“…….”
매극렴은 조금씩 가빠지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눈앞에 나타난 자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두 자릿수가 넘는 살수를 베었음에도, 노검객의 검 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놈이 천살이라 불리는 인간 백정들의 수괴더냐?”
“……그랬다면 이따위로 일을 처리하진 않았겠지.”
매극렴 앞에 나타난 자의 정체는 혈교의 구장로, 일살이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구장로는 매극렴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꼴이나 보자고 일을 맡긴 것이 아니건만…….”
“네놈은 천살이 아니라는 말이렷다?”
매극렴의 거듭된 추궁에, 구장로가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천살이 아니라고 한들, 늙은이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을 텐데.”
츠츠츠츳…….
구장로의 몸에서 가공할 마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두 팔을 휘감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매극렴의 품 안에 있는 청룡패가 그 어떤 때보다 맹렬하게 진동했다. 마치 다가올 위험을 경고하듯.
“공들여 키운 살수들을 이렇게나 많이 죽였으니, 이쪽도 늙은이의 목 정도는 가져가야 균형이 맞겠어.”
“짐승이 사람 말을 흉내 내는구나. 네 머리를 베어 천살이란 놈에게 던져 줘야겠다.”
설전은 길지 않았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한 두 고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콰아아앙!
진각 한 번에 구장로가 밟고 있던 땅이 내려앉았다. 벽력탄이 터진 듯한 충격파가 덮쳐 오는 가운데, 매극렴은 포탄처럼 쏘아오는 적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마기를 두툼하게 휘감은 구장로의 팔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매극렴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베지 못하고 물러났다.
“큭…….”
매극렴의 눈빛에 낭패감이 스쳤다. 입가에는 희미하게 핏물이 맺혔다. 반탄력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반면 구장로는 기세가 등등했다.
“잘난 척하던 늙은이는 어디 갔지?”
비록 혈교의 장로들 중에서는 말석이라고 해도, 그는 능히 괴물이라고 불릴 수 있는 초고수였다. 마기를 휘감은 양손으로 장법을 펼쳐 일방적으로 매극렴을 몰아붙였다.
콰콰콰쾅!
매극렴은 본인의 실력 이상을 발휘해 분투했다.
최대한 정면충돌을 피하고, 공격을 흘려보내며 빈틈을 노렸다.
그 날카로운 검기에 구장로도 몇 번이나 공격을 허용할 뻔했으나.
퍼버버벙!
구장로와 매극렴 사이에는 압도적인 내공의 격차가 있었다. 벽력탄을 폭발시키는 듯한 장법은 매극렴의 검을 밀어냈다. 궤도가 살짝 틀어진 것만으로도 위력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결국.
퍼어엉!
일장에 얻어맞은 매극렴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쿨럭!”
매극렴은 검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얀 수염이 핏물로 점점 젖어 들었다.
저벅, 저벅.
혈교의 구장로가 괴소를 흘리며 매극렴에게 걸어갔다. 지금 그에겐 화를 풀 대상이 필요했다. 청룡신협의 외조부 정도면 적당한 대상이었다.
“본인이 십존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고작해야 퇴물인 주제에.”
“……퇴물이라…….”
매극렴은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퇴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부단히 수련했다 한들, 젊은 시절에 비하면 체력이며 근육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신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며, 부족한 근육과 체력은 경험과 연륜으로 대체할 것이다.
“후우우…….”
노검객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검을 똑바로 들어 적을 겨눴다.
“내 비록 늙어 약해졌어도, 금수만도 못한 혈교의 마인에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분수를 모르고 설친 스스로를 탓하라.”
구장로는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매극렴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팔에 가공할 마기를 두르며 달려들었다.
‘한 번이 고작이겠군.’
매극렴은 눈을 부릅뜨고 적의 공격을 끝까지 바라봤다.
단 한 번.
방어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벨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은 있을 것이다. 설령 죽이진 못한다 해도 팔 하나는 가져올 작정이었다.
‘수룡아. 너는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
상대는 천살이 아니다.
즉, 청룡학관을 노리는 진짜 위협은 아직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 만약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 한들, 매극렴은 백수룡이 이곳에 오지 않고 기다리길 바랐다.
‘이자는 내가 벨 테니, 너는 천살을 잡거라.’
매극렴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너무 늦게 만난 손자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
“……오랜만에 딸을 만나겠군.”
“아직 오지 말라고 전해 달라던데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며 구장로를 공격했다.
쩌저저정!
갑작스러운 공격에 튕겨 나간 구장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막아 냈다. 돌풍 속에 숨어 있는 것은 하나하나가 무시하기 힘든 검격(劍擊)이었다.
“빌어먹을! 또 뭐냐?”
자신의 앞에 내려선 뒷모습을 보며, 매극렴은 삼십여 년 전의 여러 기억들을 떠올렸다.
저 뒷모습을 많이도 쫓아다녔었다.
놀라운 재능을 가졌고, 천무제 용봉비무에 출전해 용봉에 들었을 만큼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던 소년.
“……무흔이냐.”
과거의 그 소년이 자신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예. 선생님.
“예. 장인어른.”
감히 자신의 딸을 홀린 웃음이었다.
“이런 개잡놈…….”
“기껏 도우러 왔는데 왜 또 그러십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백무흔에게, 매극렴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발목이나 잡지 말거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매극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청룡학관 제일의 망나니였던 학생이, 이제는 등을 맡길 만한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