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10
409화. 관심 없다
무거워진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노군상은 괜히 허전한 탁자 위를 둘러보곤 멋쩍게 웃었다.
“이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차 한잔 내주지 않았군. 잠시 기다리게나.”
“아닙니다.”
백수룡은 차를 끓이려고 준비하는 노군상을 만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려고?”
“관주님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해 주신 말씀은 잊지 않겠습니다.”
백수룡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 표정과 태도에서 노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묻어났다.
“허허. 조언은 무슨. 그저 늙은이의 잔소리일 뿐이지.”
노군상은 진실을 알면서도 백수룡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혈마의 무공을 익혔냐고 추궁하지도 않았고, 의심하거나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정 어린 조언을 해 주었을 뿐이다.
백수룡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믿어야만 가능한 일.
어째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는지, 백수룡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선의가 진심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백수룡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관주님이 떠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관두게. 자네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간, 자네 외조부가 날 죽이려고 들게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노군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벌써 떠난 사람처럼 취급하지는 말게나. 아직 후임자도 정하지 않았고, 올해 천무제까지는 내가 관주로 있을 것이니.”
“물론이죠. 관주님 퇴임 선물로 천무제 우승을 보여 드릴 겁니다.”
“그것참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로군.”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 후 노군상은 다시 밀린 업무를 시작했고, 백수룡은 몸을 돌려 관주실을 나섰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청룡학관주는 좋은 사람이구나.]창룡신검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그녀 또한 백수룡이 곤란을 겪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안심한 모양이었다.
‘관주님과 친분이 있었어?’
[오대학관주 회합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었지.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포자기한 듯한 분위기가 흐르던 무인이었는데…….]창룡신검에 깃들어 청룡학관에 도착한 그녀가 다시 만난 노군상은, 이전과 달리 허허 웃기만 하던 노인이 아니었다.
[너와 함께 청룡학관에 도착했을 때도 어딘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창룡신검은 노군상이 지난 며칠 동안 많은 고민을 하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했다.
[기도가 놀랍도록 맑고 안정되어 있었다. 마치 참오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관주님의 기도가 달라진 건 나도 느꼈어. 어쩌면…….’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관주실을 바라봤다.
문득 청룡학관주 노군상은 올해를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무인 노군상의 시대는 새롭게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 네가 역천의 운명을 가진 존재이긴 하구나.]‘갑자기 무슨 소리야?’
[주변 사람들의 운명을 전부 바꾸어 놓으니, 그것이 역천(逆天)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진지한 이야기인가 했더니, 창룡신검 나름의 농담이었다.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검파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역천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관주실을 나선 백수룡은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사무실로 향했다.
학생들이야 수업이 재개될 때까지 각자 개인 수련 정도만 하면 그만이지만, 강사들은 오히려 할 일이 전보다 더 많았다.
밀린 학사 일정에 맞춰 수업 일정을 다시 조율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살수들과의 싸움으로 부서진 시설이라든가 없어진 수업용 비품들도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백수룡의 경우는 천무제 진행위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자식 성격에 먼저 물어볼 것 같진 않지만…….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창룡신검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날 가장 가까이에서 역천신공의 기운을 느꼈으니, 당연히 의문을 느낄 게다.]백무흔은 아들이 역천신공을 익혔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노군상 또한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야기가 잘 풀렸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
혈교에 의해 많은 가족을 잃은 남궁세가의 공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나 보면 알겠지.”
잠시 후, 백수룡은 남궁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인 사무실에 들어가듯 당당한 걸음이었다.
“나 왔다.”
* * *
“…….”
남궁수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백수룡을 한번 쳐다봤을 뿐, 곧바로 다시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백수룡이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아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고 본격적으로 일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남궁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왜 하필 내 사무실이지?”
“여기가 가장 넓고 깨끗하잖아.”
“네 존재가 그 깨끗함을 더럽힌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안 해 봤는데?”
꾸깃…….
남궁수가 들고 있던 서류를 구기며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시선으로 백수룡을 노려봤다. 샛노란 금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른 강사였다면 오금이 저려서 그 즉시 백배사죄하고 물러났겠지만, 백수룡은 오히려 서류를 더 꺼내서 책상 위를 어지럽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라고 좋아서 여기 온 줄 알아?”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백수룡이라고 해도 남궁수 사무실에 쳐들어와 이렇게까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수룡에겐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게, 누가 남의 사무실을 부숴 먹으래?”
“…….”
“아주 뇌강을 떨어뜨려서 박살을 내놓으셨더만. 책상이고 의자고 다 부서져서 거기선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어쩌라고?”
“……그건.”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인 날 쫓아내려는 건 아니지?”
“…….”
남궁수도 아예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룡학관에 잠입한 살수들을 처단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기물 파손은 불가피했다.
하필이면 그중에 백수룡의 사무실이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백룡장에 가서 일하는 건?”
“집에서 일하면 효율이 떨어져. 알 만한 사람이 그래?”
백수룡은 이제 아예 남궁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했다.
결국 남궁수는 포기했다. 더 말해 봤자 백수룡을 사무실에서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두 사람은 책상의 맞은편에 앉아 각자 일을 했다.
조용해진 사무실에는 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 붓으로 슥슥 무언가를 적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한 번씩.
“남궁수. 작년 천무제 주작학관 기록 정리된 거 어디 있어?”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 서랍.”
“……없는데?”
“내 기준에서 오른쪽이다.”
그리고 다시 일에 열중해서 한동안 말이 없다가.
“백수룡. 네 모의전 수업 동안 정리한 자료는 어디 있지?”
“아 그거 누가 내 사무실에 벼락을 떨어뜨려서 전부 불타 버렸는데.”
“…….”
“농담이고 거기 목함 뒤져 봐. 중간쯤에 있을걸.”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청룡학관에서 네 농담이 제일 재미없거든?”
“나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각자 일에 집중하다가.
“네 제자들은 요즘 어떻지?”
“충격을 좀 받긴 한 모양이야. 일단은 쉬게 하고 있어.”
“정신적인 상담이 필요한 상황인가? 그쪽 방면에 실력 있는 의원을 알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리고 심리상담 치료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네 방식은…… 됐다.”
두 강사는 각자 일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를 반복했다.
둘 다 청룡학관에서 제일가는 일중독자들답게, 집중력이 무시무시했다.
낮부터 시작한 업무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얼굴 한번 마주 보지 않고 일을 했다. 종종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얼추 급한 일을 끝낸 백수룡이 기지개를 켰다.
남궁수는 여전히 똑같은 표정과 자세로 일하고 있었다.
“남궁수.”
“말해라.”
“안 궁금하냐?”
“용건을 정확히.”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수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보지 말라고 한 거 말이야. 그게 뭐였는지 안 궁금하냐고.”
순간 서류를 넘기던 남궁수의 손이 멈칫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역천신공의 기운은 천하에서 가장 패도적인 데다, 정파의 무공과는 상극이었다.
남궁수는 그 기운을 누구보다 가까이, 자신의 등 뒤에서 느꼈다.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글쎄…….’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일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점을 들키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배웠으니까.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고, 최소한 똑같이 약점을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백수룡은 그런 일들을 여전히 잘할 자신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천살에게 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공은 그저 무공일 뿐이란 걸세.
거짓말을 하러 간 백수룡에게, 노군상은 무공은 무공일 뿐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남궁수가 물어본다면……. 아마…….’
그때, 남궁수가 서류를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관심 없다.”
“……관심 없다고?”
작게 한숨을 내쉰 남궁수는 서류를 내려놓고 백수룡을 바라봤다.
일하기 시작한 지 몇 시진 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상관없다. 네가 무슨 비밀을 감추고 있든지 간에 나는 보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켰지.”
“…….”
“다 끝난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지 모르겠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는 표정은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민망해진 백수룡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물어봐도 안 알려 준다?”
“내가 그리 한가한 줄 아나.”
미간을 찌푸린 남궁수는 다시 서류를 검토했다. 그러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 탓에 집중이 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백수룡이 히죽 웃고 있었던 것이다.
“또 뭐지?”
“얼추 끝났으면 같이 퇴근하자고. 내가 한잔 살 테니까.”
그러나 그 순간, 남궁수는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일에는 원래 끝이 없다.”
“……진짜 지독한 놈이다, 너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서 마저 볼 서류만 몇 개 행낭에 챙겨 넣었다.
자리를 정리하던 중 백수룡은 서류 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백수룡 앞으로 온 서찰이었다. 며칠 전에 온 것인데, 청룡제다 뭐다 바빠서 한쪽에 밀어 두고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발신인이 안 적혀 있네?”
그전에도 발신인 불명의 연서 따위를 받는 일은 자주 있었기에, 백수룡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서찰의 봉인을 뜯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내용은 읽고 난 후에 버리는 편이었다.
“어?”
그런데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백수룡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건 집에 가서 읽어도 될 텐데?”
남궁수가 짜증이 담긴 표정으로 백수룡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백수룡은 그 자리에서 서찰을 읽어 내려갔는데, 읽는 내내 입가에 맺힌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하하…….”
서찰의 말미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백룡장 제1기 졸업생이자 청룡신협의 수제자, 공손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