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20
419화. 여기서 나가면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백수룡은 빠르게 흘러가는 과거의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이 저지른 전생의 죄악들이 눈앞에 계속 펼쳐졌다.
“교관님.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고통으로 잘게 떨리는 몸.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얼굴들.
교관 이십칠호의 훈련 방식은 가혹했다.
피멍이 든 피부와 베인 상처들로 인해, 그들의 숙소에는 단 하루도 피 냄새가 가시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일말의 연민조차 느끼지 않았다.
“일어나라. 처음부터 다시.”
고통 끝에 절망한 제자들은, 결국 비틀거리며 일어나 눈에 살기를 담고 스승을 노려봤다. 어리다 해도 그들 역시 혈교의 무인이었다.
“좋아. 그 눈빛이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군.”
“…….”
이십칠호는, 혈교에서 가장 뛰어난 교관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보통의 무인들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인연을 맺었다면,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첫 만남부터 어긋난 운명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으아아아!”
처음 일 년 동안은, 제자들은 몇 번이나 진심으로 스승을 죽이려고 들었다.
이십칠호는 그때마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짓밟았다.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몸에 하나씩 새기며 가르침을 내렸다.
“억울한가? 그럼 더 강해져라. 무력하게 당하고 싶지 않다면, 벌레처럼 죽고 싶지 않다면,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강해져라. 그것만이 너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다.”
사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디며 나날이 강해지는 제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십칠호는 목에 칼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희가 무공을 완성하는 날, 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테니까.’
훗날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제자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만 했다.
마뇌가 수시로 숙소를 드나들며 수련을 직접 지켜봤기에.
이십칠호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혹독할 수밖에 없었다.
“……교관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한 지 삼 년이 되었을 때.
검존의 무극검을 계승한 일호가 지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저희가 포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간절한 표정과 다시 마주한 순간, 백수룡은 소년이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쉬어도 괜찮다.’
그저 조금의 위로를 원했을 텐데.
이십칠호의 입술은 싸늘한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희 말고도 교에 대체할 인력은 넘친다. 폐기된 후에 버려지겠지. 쓰레기처럼.”
“……그렇습니까.”
간절했던 소년의 눈빛이 흐릿해지고, 상처투성이인 몸을 일으켜서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풍경이 바뀐다.
“클클. 저 녀석들. 갈수록 스승을 닮아 가는군.”
“……아직 멀었습니다.”
마뇌는 주기적으로 숙소에 들러 제자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이십칠호가 제자들의 육체와 무공 수련을 담당했다면, 마뇌는 그들의 사상교육과 세뇌를 맡았다.
“오늘은 본교의 역사와 교주님의 위대함에 대하여 배울 것이다.”
혈교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간병기들을 만드는 것은 마뇌의 특기였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술법과 약물이 사용되었다. 절세신공을 익혔기에 더욱 지독한 세뇌를 당했다.
“위험한 사냥개일수록 단단히 목줄을 죄어야지. 안 그런가?”
“……예.”
이십칠호는 혼몽한 눈으로 멍하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경이 쉼 없이 변했다.
어떤 장면은 흐리게, 어떤 장면은 스치듯 빠르게 흘러갔다.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변했다. 새것이었던 검이 이가 빠졌다. 오래된 무복은 해지고, 세월이 흐르며 숙소와 연무장의 물건들도 낡아 갔다.
제자들은 훌쩍 키가 크고, 목소리가 굵어졌다. 성장하면서 팔다리가 길어지고, 신체가 변화를 겪었다.
미숙했던 소년 소녀는 어느새 냉철한 표정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이십칠호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너희를…….’
외면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모든 순간을 지켜봤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괴물로 만들었구나.’
결국 제자들의 눈에서 인간다운 감정이 말살되고, 오로지 명령만을 수행하는 혈교의 병기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나 역시.’
문득 내려다본 손이 피처럼 붉었다.
처음부터 붉은 것이었는지, 제자들의 피로 물들어 붉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괴물이었구나.’
조금씩, 그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잊었다.
* * *
“으하하하! 오늘은 고기반찬이 참으로 실하구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하 뇌옥을 가득 채웠다. 맹사부의 힘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던 광마사부가 한숨을 내쉬며 옆방을 노려봤다.
“조용히 좀 해라! 네 경박한 목소리가 뇌옥 바깥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냐?”
“광마야. 이 빌어먹을 뇌옥이 얼마나 깊은데 소리가 새어 나간다는 거냐. 하여간 계집애처럼 간이 작아서는…….”
“혈교에서 탈출하면 네놈의 주둥이를 묶어 버리고 말 테다.”
“흐흐. 이 어르신이랑 정말 해 보려고? 오냐. 여기서 나가면 나무에 묶어 놓고 볼기짝을 실컷 때려 주마.”
“천박한 놈 같으니……!”
오늘도 맹사부와 광마사부는 개와 원숭이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다른 사부들은 그런 광경이 익숙한 듯 얌전히 도시락을 먹었다.
“검존도 저 무뢰배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시오!”
언변으로는 아무래도 맹사부에게 밀리는 광마사부가 검존에게 도움을 청하자, 검존이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 천하에 누가 있어 저 입을 막는단 말인가?”
“대형이 뭘 좀 아시는군. 소싯적에도 이 몸의 주둥이신공을 이길 자는 무림에 없었지.”
“허허. 어련하시겠나…….”
그 와중에 홀로 조용히 식사 중이던 은사부는, 제자가 가져온 과일음료를 빙공으로 차갑게 얼려서 마셨다.
쩌저적-
멀리서 그 광경을 본 맹사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철창에 바짝 달라붙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철창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막내야! 이 오라비의 곡차도 차갑게 만들어다오!”
“……막내?”
“빙월신녀님! 부탁드리겠소!”
코웃음을 친 은사부가 손가락을 뻗자, 냉기가 뻗어 나가 맹사부의 술잔에도 살얼음이 맺혔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맹사부의 호랑이 같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으헝헝헝! 시원한 술이라니! 이게 몇 년만이더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호사를 다 누리는구나!”
“……우리가 탈출에 실패하면 전부 저놈 탓이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서로 한마디도 않던 뇌옥의 사부들은 이제 스스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서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꿀꺽꿀꺽.
순식간에 술병을 비운 맹사부가 입맛을 다시며 이십칠호를 바라봤다.
“애송아. 술 더 가져온 것 없냐?”
“그게 전부요. 그마저도 반입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오?”
혼자서 무공을 수련 중이던 이십칠호가 미간을 좁히며 노려보자, 맹사부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쩝. 마지막으로 마시는 술이 될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재수 없는 소리 말고, 몸이나 잘 관리하시오. 그곳에서 나올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흐흐. 걱정하지 마라. 내 몸상태는 지금 최상이니라.”
며칠 후, 그들은 혈교에서 탈출할 계획이었다.
사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었다.
무공으로는 절세지경에 이른 무인들이지만, 십 년이 넘게 기다려온 순간이 다가오자 다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애송아. 여기서 나가면 말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준비를 했어도, 탈출에 실패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리고 실패는 곧 죽음일 터.
아니, 두 번 사로잡히느니 죽음을 택할 사부들이었다.
하지만 다섯 명 중 일부만이라도,
단 한 명만이라도 살아서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면.
사부들은 그런 생각으로 서로에게 유언을 전한 뒤였다.
“또 무슨 얘길 하려는 거요?”
이십칠호는 사부들이 전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맹사부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사실은 네놈이 없을 때, 우리끼리 네 이름을 한번 지어 봤다.”
“……이름이라니? 갑자기 무슨?”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맹사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혈교에서 탈출하면 네놈도 번듯한 이름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밖에 나가서도 이십칠호라고 소개하고 다닐 테냐?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
늘 탈출만을 생각했지, 정작 그 이후의 삶은 구체적으로 그려 보지 않았다.
하지만 사부들은 제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면 좋을지 생각해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맹룡휘(孟龍輝) 어떠냐?”
“……왜 하필 맹씨요?”
“왜긴. 내 양아들로 삼을 거니까 그렇지.”
“…….”
순간 이십칠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맹사부의 양아들이라니.
상상도 못해 봤을 뿐더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검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맹씨가 별로면 모용정(慕容正)은 어떤가?”
“……검존 사부의 양아들이 되란 말이오?”
제자가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묻자, 검존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만 좋다면 그리하고 싶구나. 우리 단이도 너 같은 형이라면 좋아할 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흠흠. 헌원무극(軒轅無極)은 어떤가?”
광마사부가 헛기침을 하며,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일단 헌원세가로 돌아가 용서부터 받아야 한다. 그래서 장담은 못하지만…… 네가 좋다면 본가의 식구로 받아들이고 싶구나.”
“아니, 잠깐만…….”
다들 자기 성씨를 주려고 하는데, 은사부만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북해는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성씨를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이름을 짓는 것 정도라면 도와줄 수 있어.”
갑자기 너도나도 이름을 지어 준다니.
이십칠호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사부들을 바라봤다.
사부들은 웃고 있었다.
십 년 동안 그들의 무공을 모두 섭렵한 제자였다.
비록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어도, 무공에 대한 이해는 이미 자신들과 같은 수준에 있었다.
무공으로는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기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자 했다.
“……이름 같은 건 여길 나가서 정하겠소. 급한 것도 아닌데 재촉하지 마시오.”
어쩐지 피부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이십칠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부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검존사부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 아이들은 어찌할 것이냐?”
“누구 말이오?”
“네게 무공을 배운, 우리의 사손(師孫)들 말이다.”
“…….”
이십칠호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부는 그가 이 주제를 언급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엔, 혈교를 탈출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이십칠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뭘 어쩌라는 거요?”
“우리와 함께 떠나자고 설득할 수는 없겠느냐?”
“불가하오. 그 녀석들은 이미…… 마뇌의 세뇌로 꼭두각시가 되었으니까.”
“확실한 것이냐? 우리의 무공을 익혔으니, 사술 따위에 저항하지 못할 리가 없거늘.”
“사부들이 못 봐서 그렇소. 그 지독한 세뇌를……. 내가 배신자라는 걸 알면 고민도 않고 마뇌에게 보고할 거요.”
사부들이 번갈아 가면서 묻는 말에, 이십칠호는 방어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놈아! 밑져야 본전 아니냐!”
콰앙!
맹사부였다. 단순하고 우직한 성격답게, 그는 제자에게 가서 부딪치라고 말했다.
“꼭 같이 떠나자고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다!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면 전하란 말이다! 찝찝하게 못 했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말에 이십칠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자조적으로 웃었다.
“……할 말이라. 없지는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