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34
433화. 하루 동안
“역시 맞군요.”
백수룡은 산산조각이 난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녹림수사 정도의 고수가 고작 질문 하나에 평정심을 잃었다.
그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오?”
녹의수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매서운 기파가 몰아치며, 녹의장포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녹의수사는 이곳에서 백수룡과 생사결을 벌일 각오까지 했다.
‘설령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녹림을 구파일방 못지않은 대방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맞냐는 청룡신협의 말.
방금 전 그 말이 밖으로 흘러나간다면, 염라채는 구파일방의 토벌 대상이 될 것이다.
이미 채주가 십대악인으로 악명을 떨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빌미를 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 목숨을 걸고 청룡신협을 공격하는 것이 나았다.
‘만전의 상태라면 이기지 못하겠지만, 이 사내도 분명 지쳤을 것이다. 내게 천운(天運)이 따라 준다면…….’
녹의수사의 몸에 조금씩 힘이 들어갈 때였다.
쿵.
백수룡은 절묘한 순간에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녹의수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다시 묻겠소.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오?”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질문에, 백수룡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역시 그분의 숙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
-언젠가 녹림을 구파일방 못지않은 명문대파로 만들 것이다.
맹사부가 뇌옥에서 종종 하던 이야기.
그의 숙원은 도적들의 무리라 천대받는 녹림을, 천하가 인정하는 대방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네 헛소리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군.
-하! 광마야. 넌 지금부터 내게 잘 보여야 할 거다. 나중에 헌원세가가 녹림을 지날 때 통행세를 두 배로 물기 싫으면 말이다!
-……대방파라면서 그게 산적과 뭐가 다르지? 제대로 된 계획은 없나?
광마 사부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맹사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려운 건 밑에 있는 똑똑한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여튼 여기서 나가면 기필코 녹림을 대방파로 만들 거다!
-……애초에 너와 말을 섞은 것이 실수였군.
-크하하하! 그 실수를 매일 반복하고 있잖으냐!
맹사부에게는 적이 많았다.
혈교에 갇히기 전에도, 그는 자신의 숙원을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으니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사파에서조차 그를 비웃었다.
절세의 무공이 아니었다면, 맹사부는 진작 협객이라 자칭하는 정파의 고수에게 죽었을 것이다.
실제로 정파의 이름난 고수들이 수없이 맹사부에게 도전했었다. 모두 사지 중 몇 군데가 부러져 돌아갔지만.
“기억한다는 건, 설마…….”
녹의수사는 부릅뜬 눈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녹림투왕이 갑자기 실종되고 수십 년이 지나면서, 그의 숙원도 점점 잊혀져 갔다.
하나였던 녹림은 몇 개의 큰 세력으로 분열되었으며, 녹림투왕이 만든 ‘녹림맹’이라는 이름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
녹림투왕의 숙원을 기억하는 사내와, 그것을 계승하려는 사내가 만났다.
“맞습니다.”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저는 녹림투왕의 직전제자(直傳弟子)입니다. 녹림십팔식을 전부 전수받았고, 맹호투를 계승했습니다.”
“……!!”
직전제자(直傳弟子).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그 말이 녹림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지, 녹의수사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녹림투왕의 직전제자라고 주장하는 자를 덥석 믿을 만큼, 녹의수사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상대가 녹림투왕의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 하더라도 말이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유를 물어보셨으니 대답해 드렸을 뿐이니까요.”
“대체…….”
녹의수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녹림투왕의 직전제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녹림왕이 될 자격을 갖춘 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설마?
“……나를 찾아온 이유가, 녹림왕의 자리를 노리기 위함입니까?”
염라채는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력한 산채.
이곳을 굴복시키면, 그 휘하에 있는 다른 산채들까지 한 번에 거둘 수 있었다. 단숨에 녹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자격이 없습니다.”
백수룡은 맹사부의 숙원을 대신 이룰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녹림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맹사부도 그걸 원할 것 같진 않고.’
하지만 스승의 숙원을 계승하려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도움을 줄 마음은 있었다.
그때, 녹의수사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
“그럼, 녹림투왕께선 지금 어디에…….”
“돌아가셨습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제가 그분의 직전제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녹림투왕의 무공을 계승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녹의수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청룡신협이 녹림투왕의 무공을 펼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
녹림투왕의 숙원과 무공의 일부나마 계승한 자로서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때, 백수룡이 녹의수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은 저로서도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 명성에 흠이 되면 되었지,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렇겠지요.”
정파의 떠오르는 신성, 아니 신성을 넘어 청룡신협의 명성은 이제 온 강호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파의 전대 절세고수인 녹림투왕의 무공을 계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결코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오히려 온갖 추문이 붙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진실을 밝힌 것은, 그만큼 동맹 제안이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음…….”
녹의수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틀만 더 생각할 말미를 주십시오.”
“……이틀이라면?”
“사파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 그날 답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지만, 백수룡도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했다.
‘경계심이 많아서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동맹을 맺을 가치가 큰 법이지.’
한 번에 설득하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동맹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아니어도 할 이야기는 많았으니까.
“그나저나,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군요. 수혁이가 제 제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들 녀석이 방학이 되어 돌아온 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두 사람은 큭큭 웃었다.
녹림투왕의 무공을 익힌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도 놀라운데, 그 계기가 청룡학관에 정체를 숨기고 입관한 어린 산적 때문이라니.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인연이고 운명이 아닌가?
“선생님. 밖에 나가서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정강산에서 운치가 가장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녹의수사의 제안에 백수룡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고, 그들은 술병만 하나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휘익! 휘이익!
오늘따라 휘영청 뜬 달이 밝았다. 두 개의 신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암절벽을 올랐다.
툭.
바닥에 가볍게 내려선 녹의수사는 어딘가로 향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났던, 녹림투왕의 별호가 새겨진 바위였다. 녹의수사는 그곳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저는 생각이 많아지면 항상 이곳에 옵니다.”
“……밤에 보는 풍경은 또 색다르군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정강산의 풍경은 명공이 그린 수묵화처럼 고즈넉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셨다.
안주도 없이, 술잔에 달을 담아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친께서 녹림투왕과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녹의수사가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백수룡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어떤 인연입니까?”
“제 부친께선 고향에서 탐관오리를 때려죽이고, 모친과 함께 도망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갈 곳이 없어 이곳 정강산까지 숨어들었는데,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그 사연을 알게 된 녹림투왕께서 거두어 주셨다 하더군요.”
“부친께서도 대단한 분이셨군요?”
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녹의수사는 민망한지 술을 한잔 마셨다.
“하여간 부친께서 염라채의 일원이 되셨고, 몇 달 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태어날 때부터 녹림의 일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까?”
“흔한 일입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치다, 받아 주는 곳이 없어서 산으로 숨는 자들. 그중 일부는 저희의 식구가 되지요.”
‘식구’라고 말하는 녹의수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저는 어려서부터 제법 머리가 좋았습니다. 주변에서도 공부를 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러다가 향시를 봤는데 덜컥 합격했지 뭡니까? 꿈에 부풀었습니다. 관직에 나가면……. 이 부조리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녹의수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불가능하더군요. 관직에 나가려면 출신 성분이 깨끗해야 합니다. 향시까지는 가짜 신분으로 어떻게든 되었는데, 회시를 보려다가 들켜서 죽을 뻔했습니다.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지요.”
“…….”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죽으려고 생각했습니다. 술에 취해 정신없이 기암절벽을 기어올랐습니다. 손톱이 다 뽑혔지만, 운이 좋았는지 죽지 않고 이곳에 도착했지요.”
녹의수사는 손을 뻗어 녹림투왕의 바위를 쓰다듬었다.
“이곳에서 녹림투왕께서 남기신 무공과 영약을 발견했습니다. 술에 취하셨는지, 글씨가 몹시 삐뚤빼뚤하더군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백수룡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녹의수사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날 저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이곳을 찾은 것은 비밀로 하고, 부친께 달려가 녹림투왕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덕분에 그분의 무모한 꿈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무모한 꿈.
녹림을 구파일방 못지않은 대방파로 만들겠다는, 모두에게 비웃음을 샀던 꿈.
“물론 녹림에는 악인들도 있습니다. 지나는 행인을 기습해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놈들, 살인 자체를 즐기는 미친놈들이 있지요.”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꿈에 취한 것인지,
녹의수사는 두서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염라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나름의 도의(道義)가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신협이라 불리는 분께 이런 이야기가 우습게 들리실 줄은 알지만…….”
“우습지 않습니다.”
녹의수사는 흔들리는 눈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저마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겁니다. 그걸 비웃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
“그리고 수혁이가 그러더군요. 자신은 녹의수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요.”
“그 녀석이 그런 말도 했습니까…….”
녹의수사는 흐뭇하게 웃더니, 다시 잔을 비웠다.
백수룡은 그의 빈 술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십대악인이라고 불리는 겁니까?”
녹의수사가 멈칫하더니,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전혀 모르십니까?”
백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알지만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본 것이지.
“압니다. 십 년 전쯤에 구파일방의 후기지수 셋을 잔인하게 죽였다고요. 복수를 위해 찾아온 청성과 점창의 무인들과 싸움을 벌였고, 끈질긴 유격전으로 큰 피해를 입혀 그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십대악인이라 불린 것으로 압니다만.”
“전부 맞습니다.”
녹의수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순간 그의 눈이 살기로 희번덕였다.
“그 후기지수란 것들이, 실전 경험을 쌓겠다는 이유로 녹림의 형제들을 먼저 공격해 죽였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
“그래서 갈가리 찢어 죽였습니다. 다시는 이 산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녹의수사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후회했다.
아무리 정당한 복수였다고 한들, 청룡신협에게 그 이야기가 정당하게 들릴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잘하셨습니다.”
“예?”
“기어오르면 확실하게 밟아 줘야죠.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십대악인이라 불리는 겁니까?”
“……예?”
백수룡은 오히려 그게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여간 정파 놈들.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떠는 건 알아 줘야 한다니까.”
“하하하하……!”
녹의수사는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잠시 후, 겨우 웃음을 멈춘 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백수룡에게 말했다.
“아까 이틀을 말씀드렸지요.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면, 결정을 조금 더 빨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이요? 뭡니까?”
녹의수사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백수룡이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내일 하루, 저희와 함께 일해 보시겠습니까?”
“……예?”
“하루 동안 녹림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