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35
434화. 경력 있는 신입 (1)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산적질이라니…….”
백수룡은 한숨을 내쉬며 염라채에서 준비한 옷을 입었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소매가 없는 조끼로, 탄탄한 팔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 하루 동안 입어야 할 작업복이었다.
“가을인데 춥지도 않나.”
녹림십팔식을 단련해 한서불침의 경지에 이른 백수룡이야 상관이 없지만, 염라채의 산적들은 맨몸에 달랑 조끼 하나만 걸치고 잘도 돌아다녔다. 산속의 가을은 특히 더 추워서 아침이면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올 지경인데도 말이다.
[투덜거리는 것치곤 잘 어울리는구나. 제 옷을 찾아 입은 것처럼.]허리춤의 창룡신검이 우웅- 진동했다. 백수룡은 손가락으로 검신을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게 내 신조거든. 그리고 동맹이 걸렸는데 잘해야지.”
백수룡은 마지막으로 면경을 들여다보며 역골공을 사용해 인상을 바꿨다. 눈꼬리를 날카롭게 바꾸고, 입꼬리는 일자로 내리고, 턱은 조금 더 각지게 만들었다.
“이 얼굴은 오랜만이지?”
[……머리색도 백발로 바꾸려고?]백수룡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상이 차갑게 바뀌어서인지 가벼운 미소인데도 싸늘한 조소처럼 보였다.
“여기가 북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튈 필요는 없지.”
준비를 다 끝낸 백수룡은 방을 나서며, 어젯밤 녹의수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내일 하루 저희와 함께 일해 주신다면, 동맹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정말이죠?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어차피 사파 회합에 녹의수사와 함께 갈 생각이었기에, 하루 종일 염라채에서 빈둥거리느니 일일 산적체험을 받아들인 것이다.
‘염라채가 어떻게 영업하는지도 한번 보고 싶고.’
전생에 맹사부에게 녹림 이야기를 지겹도록 듣긴 했지만, 현생에서는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오늘 제대로 밥값을 해서, 거절을 못 하게 만들어야지.”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백수룡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산적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지난밤 백수룡과 몸을 부닥쳐 본 산적들은 그를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역골공을 사용하고 영업에 나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터였다.
백수룡은 시커먼 산적들 사이에서 혼자 하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그래. 다들 잘 잤냐?”
““예!””
“새끼들. 새벽부터 기운도 좋네. 그런데 녹림이 원래 이렇게 부지런해?”
술을 퍼마신 다음 날은 오후까지 퍼질러 잘 거라는 편견과 달리, 염라채의 산적들은 새벽같이 기상해 있었다.
물론 모두가 깬 것은 아니고, 오전 근무조만 일어난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백수룡에게 다가왔다.
“형님. 오늘 하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백수룡의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어젯밤 처음으로 백수룡에게 덤볐다가 날아갔던 덩치.
“이름이 장걸이었나?”
“예!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오늘 하루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백수룡은 힘이 잔뜩 들어간 장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괜히 내 눈치 보지 말고 평소에 하던 대로 해. 나도 웬만하면 협조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저, 그래서 말인데……. 무기는 그 검을 차고 가실 겁니까?”
“그럼?”
백수룡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염라채에 십존급의 고수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한, 아예 검을 뽑을 일조차 없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무기를 묻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설마 내가 부족해 보인다는 말은 아니겠지?]창룡신검의 목소리도 다소 날카로워졌다.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검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에 백수룡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지만 장걸이 곤란한 표정을 지은 것은 다른 이유였다.
“형님께서 무지하게 강한 건 알지만, 저희가 하는 일이 기선 제압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첫인상이 강렬해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내 생각이 짧았군.”
한마디로 최대한 살벌하게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일개 산적이 창룡신검 같은 보검을 들고 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
일견 무난해 보이는 검푸른빛의 검집조차, 독각마룡의 뿔로 만든 물건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상인이라면 보물을 알아볼 수도 있을 터.
결국 백수룡은 창룡신검을 천으로 둘둘 말아 등에 사선으로 맨 후, 장걸에게 말했다.
“무기는 네가 알아서 적당히 크고 흉악한 놈으로 가져와.”
“맡겨만 주십시오!”
잠시 후, 장걸은 칼날이 톱처럼 삐죽삐죽한 큼직한 거치도를 가져왔다.
생김새가 흉악하긴 한데, 관리를 아예 안 한 것인지 흙이 묻고 오래된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백수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기 관리 제대로 안 하냐? 이게 칼이야 몽둥이야.”
“일부러 묻혀 놓은 겁니다. 어깨에 툭 걸치고만 있으면 되지, 웬만하면 휘두를 일 없거든요. 작업할 때 삽이나 톱 대신 연장으로 쓰기도 좋고요.”
“……연장?”
아무래도 백수룡이 생각한 녹림의 영업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양이었다.
“한번 줘 봐.”
백수룡은 장걸에게 건네받은 두꺼운 거치도를 어깨에 툭 걸치고 짝다리를 짚었다. 산적들이 벌써부터 자세가 나온다며 박수를 쳐 댔다.
“뭐, 나쁘지 않네.”
백수룡도 새로운 무기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씩 웃으며 장걸에게 말했다.
“이제 일하러 가자고.”
“예!”
산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을 내려가는 백수룡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뿐했다.
[이대로 여기 눌러 앉지는 않겠지…….]창룡신검의 걱정 가득한 음성은 산적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금세 묻혀 사라졌다.
* * *
“저희 영업장은 총 세 곳입니다.”
백수룡이 기대한 것(?)과 달리, 염라채의 영업은 꽤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희는 큰길. 중간 길. 작은 길이라고 부릅니다. 우선은 중간 길로 갈 겁니다.”
큰길은 가장 안전하고 잘 닦인 길로, 주로 마차나 수레를 끄는 상단이나 표국이 이용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던 백수룡이 물었다.
“그런데 왜 큰길로 안 가고?”
“큰길은 손님이 별로 없습니다. 안전하고 편하긴 한데, 길이 그리 빠르지도 않고 통행료가 비싸서 대부분의 손님들은 중간 길로 다닙니다.”
마차를 끄는 상단이나 표국 규모가 산을 통과하는 일은 생각만큼 흔치 않다고 했다. 사흘에 한두 번 있으면 많을 정도라고.
“저희의 주 수입원은 중간 길입니다. 이쪽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가장 쏠쏠하지요.”
백수룡은 장걸, 그리고 몇몇 산적들과 함께 산비탈을 내려와 ‘중간 길’에 도착했다.
사람 서넛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 길 왼쪽은 가파르게 깎여 있었는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백수룡은 판판하게 다져진 바닥을 꾹꾹 밟으며 울타리를 바라봤다.
“이 울타리는 너희가 친 거냐?”
장걸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줄면 저희도 먹고 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울타리를 친 이후로 낙상 사고가 크게 줄었습니다. 손님도 늘었고요.”
“이건 누가 생각해 낸 거야?”
“그거야 당연히 저희 큰형님, 아니 채주님 생각입니다.”
“흐음…….”
길 옆으로 난 작은 공터에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한다고 했다. 초소 겸 쉼터인 셈이었다.
정자 구석에는 삽이며 괭이, 도끼 따위가 쌓여 있는 것도 보였다.
장걸은 묻지도 않은 것을 술술 말했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주기적으로 보수도 해 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손님들이 불만이 생기거든요.”
“……너희들 산적 맞냐?”
“예? 뭐가 잘못됐습니까?”
백수룡이 맥이 조금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십대악인이 지배하는 염라채의 산적들이 아니라, 장강산의 산림관리인들이 아닌가.
‘저 두꺼운 구릿빛 근육이 삽질과 곡괭이질로 만들어진 거였군.’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왔는데, 직접 와서 현장을 보니 허탈할 정도였다.
어제 녹의수사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빼앗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이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여길 지나는 손님은 대부분 봇짐장수들입니다. 노새 한두 마리 끌고 산을 넘는 형씨들인데…… 아마 금방 첫 손님이 올 겁니다.”
아직 동이 튼 지도 얼마 안 된 시간.
장걸의 말대로, 첫 손님이 멀리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늙은 노새의 고삐를 쥐고 나타난 중년 사내였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장걸을 발견한 사내가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장 형!”
“으하하! 오늘 개시 손님은 임 형이로군!”
장걸은 성큼성큼 내려가 사내의 봇짐을 나눠 들었다. 꽤나 친분이 있는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자연스럽게 근황을 물었다.
“오늘도 보따리가 한짐이네? 장사가 잘되나 봐?”
“잘되면 마차라도 한 대 사서 큰길로 다녔지. 힘들어 죽겠소. 이 짓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임 형이라고 불린 봇짐장수는 엄살을 떨었다.
그는 뒤따라오는 노새의 고삐를 슬슬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도 이제 늙어서 몇 년만 지나면 산을 못 탈 것 같소. 그래서 말인데, 통행료 좀 깎아 주면 안 되나?”
산적에게 은근슬쩍 에누리를 시도하는 상인이라니.
백수룡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장걸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역시 노련한 산적다웠다.
“에라 이 양심도 없는 양반아. 우리가 첫 개시 손님은 통행세를 절반만 받는데, 거기서 또 깎겠다고? 그렇게 돈이 아까우면 작은 길로 가쇼!”
“아니, 한번 해 본 말이지…….”
길 위까지 올라온 봇짐장수는 자연스럽게 염라채가 지은 정자에 걸터앉았다. 노새에 싣고 있던 짐도 잠시 내려놓았다.
장걸이 그에게 수통을 건네며 물었다.
“뭐 재미난 소문은 없수?”
“요즘은 혈교 이야기가 제일 많지. 청룡신협이라고 들어 보셨소? 갑자기 나타난 절세고수인데. 혈교를 다 때려잡고 다니는 모양이오. 장 형도 조심하시오. 그런 자들이 녹림이라고 가만히 둘 리 없잖수?”
“크흠! 오늘따라 날씨가 좋구나!”
“뭔 소리요? 흐리기만 한데 개뿔…….”
“크흠흠흠!”
이상하게 장걸이 헛기침을 심하게 했다. 봇짐장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제서야 장걸의 뒤쪽에 있는 백수룡을 발견했다.
“뒤에 있는 친구는 신입이우?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어……. 뭐, 그렇지.”
장걸이 백수룡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백수룡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봇짐장수는 말린 과일을 몇 개 꺼내 두 사람에게 나눠 주고, 본인도 먹었다.
“덩치는 그리 안 큰데 분위기 한번 살벌하군. 헌데 염라채 소속치고는 너무 마른 것 아니오?”
“……얼마 전에 들어와서.”
백수룡은 대충 둘러댔다. 혀를 찬 봇짐장수는 말린 과일 몇 개를 더 챙겨 주었다. 신입이라 제대로 못 챙겨 먹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리다. 오늘도 잘 쉬었다 가오.”
“조심히 가시오!”
“……조심히 가시오.”
봇짐장수는 노새에 다시 짐을 싣고는 길을 내려갔다. 통행료는 머물렀던 정자에 올려놓은 채.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수룡이 장걸에게 물었다.
“손님들하고 친하네?”
“친한 장사치들하고만 그렇습니다. 처음 오는 놈들은 얄짤없지요.”
장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뒤이어 길을 올라온 봇짐장수들도 대부분 장걸과 잘 알고 지내는 자들 같았다.
“이게 누구야! 복 형 아니오!”
“정 형!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아이고 만칠아. 아까 복 형에게 들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통행료? 됐다. 그냥 가 이놈아.”
서로의 근황을 묻고, 떠도는 소문을 이야기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는 사람들.
언성이 높아지거나 칼을 휘두를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뭐…….”
백수룡은 상상도 못했던 평화로운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점심 때까지 그는 ‘중간 길’에 머물렀다.
곧 교대조가 온다면서, 장걸이 슬슬 다른 곳도 가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형님. 작은 길도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원래 이렇게 자주 교대하냐?”
“그렇지는 않은데, 큰 형님이 전부 구경시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백수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산을 올라갔다.
‘작은 길’은 확실히 길이 험하고, 중간 길보다는 관리가 덜 돼 있었다.
초소의 규모도 작아서, 머무는 산적도 셋뿐이었다.
“여긴 주로 심마니들이나 사냥꾼들이 오가는 길입니다. 좀 위험하긴 해도 통행료가 제일 싸서 은근히 오가는 사람이…….”
길 아래를 내려다보던 장걸이 말을 늘리더니,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빌어먹을. 또…….”
나직한 한숨 소리를 들으며, 백수룡은 드디어 밥값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거치도를 어깨에서 내렸다.
푹!
묵직한 거치도의 칼날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산길 아래를 내려 보는 백수룡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