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36
435화. 경력 있는 신입 (2)
우득, 우두득.
백수룡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장걸에게 묻는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마저 묻어났다.
“문제가 생겼나 보지?”
“그게…….”
이대로는 정말 견학만 하다가 하루가 끝날 판이었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염라채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백수룡은 뭐라도 산적다운 일을 돕고 싶었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면, 녹의수사도 동맹 제안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겠지.’
장걸의 난감한 표정을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백수룡은 전생에 맹사부에게 배운 효과적인 공갈과 협박의 예시들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뭐가 문젠데? 돈을 못 주겠다는 상단? 강행돌파를 시도하는 표국? 아니면 다른 산채의 기습?”
그러자 장걸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돌아봤다. 잔뜩 기대한 정파의 고수에게는 실망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예?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왜 아니야?”
“왜 아니냐니요?”
“…….”
그러고 보니 길 아래에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적이 몰려온다면 무인들의 기척이 여럿 느껴져야 하는데.
백수룡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장걸을 갈궜다.
“새끼야. 아무 일도 아닌데 한숨은 왜 쉬어? 괜히 사람 기대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오는 할매 때문에…….”
“할매?”
백수룡의 시선이 장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길 아래, 커다란 짐이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커다란 짐을 머리에 이고 산길을 올라오는 노파였다.
“할매!”
빽 소리를 지른 장걸이 단숨에 비탈길을 내려가 노파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노파의 짐을 단숨에 빼앗아 들었다.
몹시 정통파 산적다운 모습이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이 길로 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길이 험해서 넘어지면 다친다니까! 그리고 짐승들도 나오니까 그냥 큰길로 가라고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이놈아.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주둥아리 좀 조용히 씨불여.”
노파도 만만찮은 성격으로 보였다.
완고한 입매에서는 온갖 풍파를 겪으며 생긴 억척스러움이 느껴졌다.
자기보다 세 배는 덩치가 큰 사내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하는데, 오히려 장걸이 주눅이 들 정도였다.
‘꼬장꼬장한 노인이라. 누군가가 떠오르네.’
잠시 매극렴을 떠올린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이 잔뜩 혼이 난 장걸이 주눅 든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노파와 함께 길을 올라왔다.
“또 산 너머 고을로 시집간 딸내미 만나러 가는 거요? 얼마 전에 아들 낳았다면서?”
“……솜옷 좀 미리 갖다줄라고. 날이 슬슬 추워지는데 어린 것이 으슬으슬 떨고 있을 것 아니냐.”
“그러게 왜 그런 가난한 놈팽이한테 시집을 보냈어? 차라리 나같은 듬직한 사내한테 보냈으면…….”
“주둥아리를 안 다물어?”
“…….”
쉼터까지 올라온 노파가 정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뒤늦게 백수룡을 발견한 그녀가 혀를 찼다.
“쯧쯧. 젊은 놈이 할 짓이 없어서 산적질이나 하고 앉았네. 허우대 멀쩡하고 팔다리 성하면 농사라도 지을 것이지. 부모님은 너 이러고 있는 것 아시냐? 늦기 전에 부모 가슴에 대못 박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눔아. 옘병. 얼굴은 희멀게 가지고, 여기 있어 봤자 저런 시커먼 사내놈들이랑…….”
“…….”
쏟아지는 잔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백수룡은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일방적으로 말로 얻어맞았다. 장걸이 도중에 가로막지 않았다면, 노파의 잔소리는 한 식경은 더 이어졌을 것이다.
“할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쇼. 다들 사정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어린놈이 산에 들어온 걸 보니까 답답해서 그러지. 뭔 놈의 기구한 팔자인지. 에잉…….”
그래도 말을 심하게 한 것이 조금 미안했는지, 노파는 머리에 이고 온 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배고프면 이거나 처먹든가.”
찬합에 담아 온 만두였다.
오는 길에 다 식어 버린 만두였지만, 산적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노파가 가져온 만두를 한 개씩 맛봤다. 다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맛있네.”
백수룡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음식 맛을 크게 따지지 않는 편이었지만, 노파가 만든 만두는 그런 백수룡도 살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남궁수가 만든 요리에 비견될 정도. 청룡학관 앞에서 판다면 금세 학생들로 바글바글해질 것 같았다.
“먹을 만허냐? 어이구. 얼마나 못 먹었으면 몸이 삐쩍 꼴았네.”
“그 정도는 아닌데…….”
“말대꾸하지 말고 이것도 처먹어 이눔아.”
노파는 퉁명스레 말하면서 자신의 만두를 반으로 갈라서 백수룡에게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다 식어 버린 만두였지만, 거기에 담긴 정은 갓 쪄 낸 것처럼 따뜻했다.
백수룡은 노파가 건넨 만두 반쪽을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걸과 산적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백수룡이 화를 내기라도 했다면, 그들로서는 자연재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짧은 새참 시간이 끝난 후, 노파는 다시 머리에 짐을 이려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장걸이 짐을 뺏어 들더니, 노파의 앞을 가로막고는 뒤돌아서 허리를 숙였다.
“……뭐 하는 짓이여?”
“배도 찼겠다. 식후 운동 좀 해야겠으니까 업히쇼 할매.”
“지랄 말어. 내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통행세 줄 테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 이놈아.”
노파가 질색을 했으나, 장걸은 길을 가로막고 비켜서지 않았다. 결국 노파는 아주 지랄을 한다며 장걸의 등에 업혔다.
“형님. 짐은 제가 들겠습니다.”
백수룡은 옆에서 눈치껏 노파의 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호칭에 흠칫 놀랐던 장걸이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허, 으허허! 그래. 할매 짐은 우리 신입 동생이 들고 따라오라고! 후딱 다녀오자!”
세 사람은 초소의 산적들을 남겨 두고 떠났다. 장걸은 노파를 업고도 웬만한 장정이 뛰는 것보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산길을 탔다.
아예 달리거나 경공을 펼칠 수도 있었지만, 노파가 충격을 받을까 봐 최대한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할매. 산 너머 고을로 시집간 딸을 만나러 가는 건 좋은데, 꼭 매번 위험한 길로 가야겠수? 그러다 호랑이 밥이 되면 어쩌려고 그래?”
“다 늙어 빠진 노인네 고기가 뭐가 탐난다고.”
“으이구. 지난번에도 산에서 발목 삐어 놓고 말은 잘해. 우리 애들이 순찰 돌다가 발견 못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알던 얼굴 송장 치우면 얼마나 찝찝한지 알기나…….”
“차라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이눔아!”
노파가 장걸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장걸이 아프다며 죽는 소리를 냈다.
백수룡은 한걸음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모자지간처럼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녹의수사가 왜 나한테 장걸을 붙여 줬는지 알겠군.’
염라채의 모든 산적이 장걸 같지는 않을 것이다.
백수룡에게 한 수 보여 달라고 먼저 넉살을 떨 정도로 배포가 크고, 상인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붙임성이 좋으며, 노파를 업고 험한 산길을 건널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산적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녹의수사는 백수룡에게 자신이 그리는 녹림의 미래를 보여 주려 했고, 아마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장걸이었을 것이다.
백수룡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을 자신이라면 어떻게 보완할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녹의수사라면…….’
백수룡은 중간 길과 작은 길을 둘러보며 생각난 것들을 필첩(筆帖)을 꺼내 틈틈이 적어 두었다.
칼을 휘두를 일은 없었지만, 붓을 움직일 일은 많은 하루였다.
‘단순히 길을 관리해서 통행세만 받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으로 더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수룡의 머릿속에 꽤 괜찮은 사업 계획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할매. 돌아올 때는 여기 말고 꼭 큰길로 가슈. 통행료 안 받을 테니까. 알았지?”
“지랄 말고 얼른 가, 이눔아!”
노파를 산 아래에 데려다준 후, 두 사람은 염라채의 가장 큰 영업장인 큰길로 향했다. 백수룡이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이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한 두 시진만 지나면 금방 깜깜해질 터였다.
“큰길은 손님이 가장 뜸합니다. 하지만 경계 인원은 상시 가장 많이 둡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제법 친해졌다고 이제는 질문까지 하는 장걸이었다.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샛길이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큰길이 뚫리면 염라채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겠지. 그러니 필사적으로 지키는 것 아닌가?”
“응? 어떻게 아셨습니까? 누가 알려 줬습니까?”
장걸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백수룡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녹림투왕에게 들었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하여간 맞습니다. 큰길은 저희의 자존심입니다. 이 길목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어야 표국이나 상단들이 딴생각을 못 합니다.”
“……그럼 큰길에서는 종종 싸움이 벌어지나?”
아직 일말의 기대를 못 버린 백수룡에게, 장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가끔 있긴 한데, 반년 동안은 없었습니다. 그냥 통행세를 좀 내고 말지, 염라채와 싸우려는 정신 나간 상단이나 표국은 없습니다. 가끔 강호초출의 애송이들이나…….”
“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공이 담긴 일성이 들려왔다. 순간 얼굴을 마주 본 두 사람은 동시에 경공을 펼쳤다.
잠시 후, 방금 전 일성을 터트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단으로 산을 점거하고 돈을 받는 도적들에게 어찌 굴복한단 말이오! 정파의 협을 배운 무인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 당장 비켜서지 못하겠느냐!”
영웅건을 질끈 동여맨 청년이었다.
나이는 약관 안팎으로 보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이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청년은 앞으로 성큼 나서며 외쳤다.
“녹의수사는 당장 나와라! 내 검으로 네가 이 산의 주인임을 자처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할 것이다!”
감히 염라채의 산적들 앞에서 녹의수사를 도발한 청년의 언행.
그러나 그 말에 기겁한 것은 염라채의 산적들이 아니었다.
“소, 소협! 진정하십시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청년과 동행한 상단이 있었는데, 상단주로 보이는 중년인이 청년과 염라채의 산적들 사이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부채주!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소협께서 이쪽 관행을 잘 모르셔서 하신 말씀이오. 내가 잘 설득할 터이니…….”
“뭐, 뒤에 다른 손님도 없으니 천천히 하시구려.”
부채주는 귀를 후비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영웅건 청년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상단주는 비굴하게 굴지 마시오! 내 검이 여러분을 지켜 줄 것이니!”
그러면서 상단주를 밀치고 앞으로 나서는데, 그 기세가 생각 외로 예리했다. 부채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는 무당의 속가제자 금진명이다. 하수들에게 선수를 양보하여 줄 터이니, 누구든 용기가 있는 자는 덤벼 보아라!”
염라채의 산적들의 표정이 점점 짜증이 어리고 있었다. 백수룡은 멀리서부터 그 상황을 파악했다.
‘한눈에 봐도 강호초출이군.’
백수룡과 장걸이 뒤편에서 다가가자,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던 부채주 적만패가 그들을 맞이했다.
“부채주님. 이게 뭔 일입니까?”
“보면 모르겠냐. 웬 정파 애새끼가 와서 까부는데, 저걸 죽일지 살릴지 고민 중이다. 저기 있는 상단주랑 아는 사이 같은데…….”
“갈! 도적들답게 뒤에서 졸렬하게 수군거리는구나!”
“……죽이는 게 맞겠지?”
산적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백수룡과 눈이 마주친 부채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신입이 한번 해 보겠수?”
그 말에 산적들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다들 청룡신협이라면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를 어떻게 상대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멋진 한 수를 보여 준다든가, 절세고수의 위압감으로 무릎을 꿇려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장면들이 상상되었다.
“웬만하면 말로 설득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알겠소. 내가 한번 잘 설득해 보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누가 말리기도 전에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우락부락한 덩치들 사이에서 호리호리한 사내가 걸어 나오자, 금진명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상대에게서는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나를 기만하는 건가! 어째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자를…….”
“카악- 퉤!”
거치도의 넓은 면에 침을 뱉은 백수룡은 거침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금진명이 뒤늦게 “헉!” 소리를 내며 피하려고 물러섰지만 어림도 없었다. 분명 단순무식해 보이는 초식인데, 절정의 경신법으로도 떨쳐 낼 수 없는 신묘한 움직임을 품고 있었다.
“고, 고수……!”
걸쭉한 침이 묻은 거치도의 옆면이 금진명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한 방에 기절한 금진명이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청운의 꿈을 안고 나선 첫 강호행이 이름 모를 산적에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다시 어깨에 거치도를 척 걸친 백수룡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상단주에게 경고했다.
“죽이진 않았으니, 그거 마차에 싣고 얼른 지나가쇼. 그리고 깨어나면 이렇게 전하고. 다음에 또 오면 그땐 팔 한 짝, 다리 한 짝씩은 받고 보내 줄 거라고. 잘 알아들으셨소?”
“예, 예에! 알겠습니다!”
상단주는 고개를 연신 숙이더니, 일꾼들을 시켜 금진명을 마차에 대충 구겨 넣었다.
만약 이 일로 녹의수사가 뭐라고 한다면, 백수룡은 이렇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방금 그 꼴을 맹사부가 봤어도 똑같이 했을 거라고.
‘맹사부였으면 더하면 더했지.’
웅성웅성.
“……신입 맞아?”
“아무래도 경력직 같은데…….”
“설득한다더니…….”
뒤에서 백수룡을 지켜보고 있던 산적들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수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