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73
473화. 그래도 된다
“……깨어났느냐?”
무겁게 잠긴 목소리.
백수룡은 눈을 뜨기도 전에 상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비슷한 장면들이 무수히 많았으니까.
“혼나기 싫어서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건, 열 살 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
짙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 백수룡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예상대로 몹시 화가 나 보이는, 그리고 수심으로 그늘진 백무흔의 얼굴이 보였다.
뭐라고 변명을 할까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백수룡은 결국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자신이 쓰러진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저 얼굴을 보고도 평소처럼 뻔뻔하게 농담을 건넬 수는 없었다.
“이 녀석아.”
백무흔은 손을 뻗어 누워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아들이 자리를 비운 백룡장에 자주 들러 청룡오망의 새벽 수련을 봐 주곤 했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 드나들다시피 했는데, 마침 오늘 새벽에 백수룡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서던 참이었다.
-수룡아! 돌아왔구나!
그러나 반가운 순간도 잠시였다. 자신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백수룡이 휘청거릴 땐 심장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달려와 쓰러지는 아들을 겨우 받쳐 들었다.
그 기척에 놀란 청룡오망이 전부 잠에서 깼고, 백무흔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은 백수룡을 발견했다.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때문에 새벽에 동네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아느냐?”
“……어땠는데요?”
헌원강은 꼭두새벽에 의원을 데려오겠다며 뛰쳐나갔고, 여민은 그런 헌원강이 사고라도 칠까 봐 곧바로 쫓아갔다.
거상웅과 야수혁은 백룡장 안에 있는 약을 모두 쓸어 담아 가져왔고, 위지천은 근처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쥐새끼 한 마리라도 보이면 난도질할 것처럼 살기를 풀풀 풍기며.
“네가 그걸 직접 봐야 했는데. 하여간 제자 복은 타고난 모양이구나.”
“하하…….”
다른 이들이 소란을 피운 탓에, 오히려 백무흔은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백수룡이 탈진한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아들을 방으로 데려와 옷을 갈아입히고 침상에 눕혔다.
도중에 헌원강이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의원을 돌려보내는 소동이 있었으나, 그 잠깐을 제외하곤 백수룡이 깨어날 때까지 계속 곁을 지켰다.
“그 난리 중에 새근새근 잘도 자더구나.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로.”
백무흔은 그새 더 야윈 아들이 안쓰러운지 연신 머리를 쓸어 주었다. 백수룡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다들 야단법석은……. 흠흠.”
백수룡은 멋쩍은지 괜히 툴툴대다가, 백무흔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게, 별것이 아니라고?”
편히 자라고 느슨하게 풀어둔 앞섶 사이로 수많은 상처가 보였다. 그중에서도 오른쪽 가슴에 난 상처가 유독 선명했다.
아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분명 흉이 크게 남을 상처였다.
그 시선을 느낀 백수룡은 괜히 말을 돌렸다.
“애들은요?”
“……네 곁에 붙어 있겠다는 걸 억지로 떼서 학관에 보냈다. 네가 돌아왔다는 건 일단 비밀로 하라고 했고.”
“잘하셨어요. 걔들 더 이상 수업 빼먹으면 위험하거든요. 하루 이틀 정도야 괜찮겠지만…….”
“말 돌리지 말고.”
백무흔이 엄중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청룡오망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백무흔은 직접 아들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보았다. 등 뒤에도 가슴과 같은 위치에 같은 크기의 상처가 있음을.
검에 의한 관통상.
조금만 비껴갔으면 심장이 꿰뚫렸을 수도 있었을 섬뜩한 상처였다.
자식의 몸에 이러한 상처가 났는데, 어느 부모가 억장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온 거냐?”
백무흔은 순간 목이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표정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기세였다.
“혈교하고 싸웠어요.”
백수룡은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아들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아는 백무흔이었다. 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녹의수사를 찾아간 거였어요. 사파 세력들을 모아 나중에 혈교를 견제할 생각으로…….”
핏기없는 얼굴로 침상에 누워, 백수룡은 덤덤한 목소리로 지난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정강산에서 녹의수사를 만난 일.
그에게서 맹사부가 남긴 무공의 흔적을 보았고, 그 꿈을 이어 달라며 녹림십팔식과 맹호투를 전수한 일. 그러다 뜻밖에 사형제의 인연을 맺은 것.
이후 사파 회합장에 도착해 사파의 종주들을 만났으며, 그중 흑사련주라는 호인과 남다른 인연을 맺은 일까지.
뒤늦게 적월을 떠올린 백수룡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깨어난 순간부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룡신검과 달리, 적월은 새로운 주인에게 낯을 가렸다.
“뭘 찾느냐?”
“흑사련주한테 칼을 하나 받았는데…….”
“잘 보관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원강이가 보더니 깜짝 놀라더구나.”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
피식 웃은 백수룡의 표정이 점점 씁쓸하게 변했다. 백무흔은 아들의 그런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더냐?”
“……회합장에 혈교의 사도가 나타났어요.”
“사도?”
“혈마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지위인데…….”
백수룡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그는 혈교의 사도들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백무흔이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까 봐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혹시 네 전생과 관련된 인물이더냐?”
“……예.”
백무흔은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한동안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백수룡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있잖아요.”
“그래.”
“제 잘못으로 망가진 사람이 있어요. 육체와 정신에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상처가 새겨진……. 분명 저를 원망했을 거예요.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텐데. 그런데 왜…….”
백수룡은 사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을 힐긋 돌아보던 그 눈빛에 담긴 복잡한 의미를 알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왜 그냥 떠났을까요?”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백무흔은 이런 문답이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나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황당할 정도로 단순했다.
“모르겠구나. 다시 만나서 물어보는 게 확실하겠지.”
“……절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는데요?”
백수룡이 ‘무슨 이런 아버지가 있어?’라는 얼굴로 바라보자, 백무흔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 다음에는 이 애비와 같이 가자꾸나. 자식이 저지른 잘못은 부모의 영향이 크니, 사과를 할 때도 내가 옆에 있어야겠다.”
“뭔 소리래…….”
백수룡은 그 황당한 논리에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전생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어떻게 백무흔의 잘못이란 말인가.
……하긴,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아들의 몸에서 열이 펄펄 끓는 상황에서도 애써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농담을 건네던 사람.
정작 그 얼굴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심각하게 걱정했음에도, 아들이 무서워할까 봐 늘 태연한 척하던 모습들.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백수룡은 문득 자신의 성격이 아버지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곤 힘없이 웃었다.
“나쁜 걸 물려주셨네…….”
“이놈이? 잘생긴 얼굴을 물려줬더니 써먹지도 못하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
“갑자기 얼굴 얘기가 왜 나와요?”
“몸 좀 건강해졌다고 매일 쌈박질만 하고 다니니 하는 말이다. 이 얼굴로 연애도 변변찮게 못 하는 놈이 내 아들이라니…….”
“……그게 한숨까지 쉴 일이야?”
부자는 잠시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둘러 감정을 표현하는 두 사람만의 방식이었다.
백무흔은 이불을 아들의 목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하여간 이렇게라도 돌아왔으니 됐다. 몹시 고되었을 텐데, 앞으로 며칠은 푹 쉴 생각만 하거라.”
“며칠씩이나 쉴 여유가 없어요.”
백수룡은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백무흔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런 면은 약빙을 꼭 빼닮은 아들 녀석은 기어이 고집을 부렸다.
“곧 혈교에서 제 정체를 눈치챌 거예요. 최악의 경우엔, 이곳으로 정예전력을 보낼 수도 있어요.”
백수룡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혈교로 돌아간 사사도가 자신의 정체를 전했다면, 다른 사도들이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옛 스승에 대한 분노 때문이든, 사부들의 절세신공을 회수하기 위해서든 반드시 움직일 터.
‘지금은 천무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옛 제자들의 정당한 분노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피해가 백룡장과 청룡학관까지 미치게 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해요. 당장 관주님을 만나 봬야…….”
“내가 모셔오마. 넌 여기서 쉬고 있어라.”
백무흔이 백수룡의 어깨를 짚었다. 상황의 심각함은 알고 있지만,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아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움직이는 것 정도는. 학관에서 이야기하는 게 저도 편하고요.”
하지만 백수룡은 고집을 부렸다. 부상 당한 몸으로 전력을 다해 복귀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혈교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분명 사도들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러니 당장에 혈교가 큰 움직임을 취할 가능성은 작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수룡의 마음이 조급한 이유였다.
“내가 다녀온다니까!”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부자가 옥신각신하며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백무흔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백수룡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청룡학관에 간 제자들을 원망하며 한숨을 쉬었다.
“비밀로 하랬더니, 이 자식들이…….”
쾅!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매극렴이 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백수룡은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많이 다치고 온 데다가 곧바로 소식도 전하지 않았으니, 크게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수룡아!”
침상으로 다가온 매극렴이 손자의 손을 꼭 붙잡았다. 노인의 눈빛이 몹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은 게냐? 다친 곳은?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면서?”
“그게…….”
매극렴은 한 손으로는 손자의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야윈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백수룡을 덥석 끌어안았다.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그새 이렇게 야위었단 말이냐.”
“……할아버지?”
예상치 못했던 매극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수룡도 백무흔도 당황해서 몸이 굳어 버렸다.
‘그 완고하던 양반이…….’
예전의 매극렴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업무 시간에 무단으로 청룡학관에서 뛰쳐나온 것도 모자라, 감정을 이토록 격정적으로 드러내다니.
수십 년간 학생주임으로서 공과 사를 구분해 온 무인에게, 손자의 안위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큰 의미라는 뜻이었다.
“많이 힘들었더냐?”
등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에, 백수룡은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낯선 감정이 간질간질하게 올라왔다. 그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녀석들이 호들갑을 떨어서 걱정시킨 것 같은데…….”
“이 녀석아.”
어느새 곁에 다가온 백무흔이 침상 옆에 걸터앉았다. 그가 아들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해라. 가족끼리는 그래도 된다.”
일순간 백수룡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일격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결국 백수룡은 눈을 감으며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예. 힘들었습니다. 정말로요…….”
처음으로 가족에게 응석을 부렸다.
영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이제 다 괜찮을 게다.”
“……녀석.”
매극렴이 손자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백무흔은 조용히 웃으며 아들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방 밖에서는 우물쭈물하는 청룡오망의 기척이 느껴졌다. 결국 학관에 얌전히 못 있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슬쩍 눈을 뜬 백수룡이 바깥을 향해 말했다.
“정신 사납게 그러고 있지 말고, 다들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당탕탕 방으로 들어오며 “선생님!”이라고 외치는 제자들을 본 순간, 백수룡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