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77
477화.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끼익…….
백수룡은 고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렸다. 공간에 오랜 세월 스며든 종이 냄새가 났고, 호롱불이 켜진 흐릿한 내부가 보였다.
‘음?’
묘하게 익숙한 느낌에 백수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오는 고서점이었다. 그런데 분위기라든가 정돈된 물건 같은 것들이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기시감의 이유는 곧 밝혀졌다. 서늘한 인상의 미청년이 벽에 기대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 풍월화공의 그림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자태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과 마주한 백수룡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남궁수?”
남궁수가 고개를 돌려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 역시 이 만남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순간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래 봤자 눈썰미가 좋은 백수룡이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수준이었지만.
“……백수룡?”
이 시간에 다른 손님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남궁수였다. 항상 이 시간에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곤 했으니까.
헌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룡장에서 요양하고 있는 줄 알았던 백수룡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남궁수는 미간을 좁히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무슨 꿍꿍이지? 설마 내 뒤를 캤나?”
반가운 마음에 남궁수에게 다가가던 백수룡은 별 미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 헛소리야? 반가웠던 마음이 싹 가시려고 그러네.”
“목소리가 너무 크군.”
남궁수는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턱짓으로 고서점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고서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파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듯, 작은 탁자 위에는 서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수룡이 작게 혀를 차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미 문 닫았어야 할 시간인데, 너 때문에 주인 할머니가 저러고 있는 거 아니야?”
“터무니없는 음해로군. 나는 매월 적지 않은 야간이용료를 내고 이곳을 이용한다.”
실제로 이 고서점의 수입 대부분이 남궁수의 전낭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가 조용히 쉬면서 책을 읽고 싶을 때면 찾는 장소였다.
남궁수는 난데없이 조우한 불청객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이는군.”
“보내 준 보약이랑 음식은 잘 먹었어.”
“남궁세가의 비전으로 만들었으니 효험이 좋을 수밖에. 매 끼니 용법에 맞춰 제때 챙겨 먹도록.”
퉁명스러우면서도 세심한, 남궁수스러운 대답에 백수룡은 피식 웃곤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네 가문에는 그놈의 비전이 도대체 몇 개야?”
“역사가 깊은 만큼 비전도 다양한 법이지. 이제 마저 책을 읽고 싶은데.”
아무래도 남궁수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백수룡은 할 말이 남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시간 날 때 백룡장에 한번 들르지 그래? 이것저것 밀린 일 얘기도 많은데.”
그 순간 남궁수가 정색을 하더니, 빙공이라도 펼친 것처럼 주변이 싸늘해졌다.
“나는 환자와는 일하지 않는다.”
“보다시피 이제…….”
백수룡은 거의 다 나았다고 말하려다가, 차갑게 빛나는 금안을 보고는 말을 바꿨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출근할 테니까, 그럼 그때 이야기하자고.”
“…….”
남궁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애초에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꾸벅꾸벅 졸던 노파가 깨어나서 조용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마. 필요한 책만 찾고 금방 나갈 거야.”
“신경 쓴 적 없다.”
남궁수를 스쳐 지나간 백수룡은 고서점을 둘러보며 원하는 책을 찾기 시작했다.
“…….”
남궁수는 그런 백수룡에게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읽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고즈넉한 심야의 고서점에는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 * *
“……왜 따라오는 거지?”
“가는 방향이 같을 뿐인데?”
백수룡의 뻔뻔한 대답에 남궁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자신이 고서점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나왔으면서 아니라고? 그걸 믿으란 말인가.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책이나 좀 읽어야겠네.”
백수룡은 갑자기 고서점에서 들고나온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흐릿한 달빛이 전부인 시간이었지만, 절세고수의 눈은 야밤에 책을 읽는 데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남궁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면 네 갈 길 가라.”
“독서 중인 사람한테 신경 끄지?”
남궁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계속 뒤따라오는 백수룡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라.”
남궁수는 백수룡이 없는 셈 치고 걷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열 걸음 정도 뒤에서는 백수룡이 책을 읽으며 걸었다.
기묘한 동행이었다.
두 사람 간에 대화는 일절 없었다.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만약에 말이야.”
백수룡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남궁수가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백수룡은 여전히 서책을 읽고 있었다.
“천무제에 못 나간다면 어떨 것 같아?”
백수룡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공허했다. 남궁수에게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멀게 들리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남궁수는 성큼성큼 걸어와 백수룡의 책을 빼앗았다. 샛노란 금안에서 벼락이 튀는 듯했다.
“아니 뭐, 그냥 그럴 수도 있잖아?”
백수룡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남궁수는 방금 전 말이 결코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수룡. 제대로 말해라.”
“내 책이나 돌려주지? 힘들게 찾은 건데.”
“제대로, 말해라.”
잠시 남궁수를 바라보던 백수룡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혈교의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잖아. 학생들이 휘말려서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형편 좋게 천무제나 준비하고 있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남궁수는 백수룡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게 아니라면, 저딴 말을 지껄이면서 자신의 눈을 피할 리가 없을 테니까.
백수룡은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괜히 하늘을 쳐다봤다.
“당당하게 청룡학관을 우승시키겠다고 선언해 놓고 이런 말 하는 거, 나도 솔직히 쪽팔리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잖아. 그러니까 좀 생각을 해 보자는 거야.”
백수룡은 남궁수를 설득하고 있었다.
일 년 가까이 준비해 온 천무제를 여기서 포기하자고.
“…….”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달리, 남궁수는 차분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백수룡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려운 상대였으니까.
청룡학관의 일타강사로서 남궁수가 지난 몇 년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고, 또 절망해 왔는지 이제는 자신도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그래. 조만간 휴관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피신시켜야 할 것 같아. 결과적으로 천무제 준비는 더 이상 못하게 되겠지만…… 누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
“뭐, 우리가 천무제를 포기하면 뭣도 모르는 호사가들이 신나서 씹어 대겠지. 천무제에서 우승할 거라고 그렇게 떠들고 다니다가 혈교 핑계로 포기하는 거 아니냐고. 신경 쓰지 마. 욕은 내가 다 먹을게. 어차피 내가 시작한 일이기도 하니까.”
“백수룡.”
“미안하다. 그동안 고생한 거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이게 최선의 방법…….”
그 순간 남궁수가 백수룡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뭘?”
백수룡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남궁수가 한심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겨우 그 말을 하려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뒤를 쫓아온 거였나.”
“누가 똥 마려운 강아지야?”
남궁수는 발끈하는 백수룡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다소 감정이 실렸는지, 불쑥 내민 책이 백수룡의 가슴을 퍽 하고 쳤다. 그게 하필이면 상처를 건드렸는데, 백수룡은 뭐라고 말은 못 하고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빠지고 싶으면 너 혼자 빠져라.”
“……뭐라고?”
백수룡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혼자 빠지라니. 이 자식은 내가 하는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천무제 우승이 너 혼자만의 목표라고 생각하나?”
“그건…….”
순간 백수룡의 말문이 막혔다. 남궁수가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혈교의 위협이 커질수록 학생들의 안전이 최우선인 건 당연하다. 그로 인해 천무제가 취소될 수도 있겠지. 혹은 다른 변수로 인해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내가 그 가능성을 생각 안 해 봤을 것 같나?”
벼락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백수룡을 노려봤다. 수년간 청룡학관을 지켜온 일타강사는 선배로서 후배를 꾸짖었다.
“건방 떨지 마라. 신입 강사.”
“…….”
“네가 천무제 우승을 선언하긴 했지만, 그건 너 혼자만의 목표가 아니다. 나를 비롯해 청룡학관의 강사들. 그리고 학생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너한테는 그걸 포기하도록 결정할 자격이 없다.”
백수룡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신랄하게 반박당했음에도 오히려 밝아진 표정이었다.
“……하. 그러게. 내가 너무 건방졌네.”
“주변에서 십존이라고 치켜세워 주니 본인의 위치를 잊은 모양이군. 이제부터라도 청룡학관의 신입 강사라는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도록.”
“예에, 알겠습니다. 남궁수 선생님.”
남궁수는 다시 평소의 뻔뻔함을 되찾은 백수룡을 잠시 노려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헛소리 다 했으면, 이만 집에 들어가라.”
그 말을 끝으로 남궁수는 휙 돌아섰다. 그리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백수룡은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 참…….”
백수룡은 머리를 긁적이며 남궁수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봤다.
“하여간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한다니까.”
결국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수와 나눈 대화로 복잡해졌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래.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지.”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여겼다.
미처 다른 이들의 입장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청룡학관의 학생들, 강사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조만간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
백수룡이 조금은 편해진 표정으로 백룡장으로 돌아갈 때였다.
스윽.
갑자기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흑립인을 본 순간, 백수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
아무리 부상을 당했어도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백수룡은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상대를 경계했다.
“누구냐?”
그 순간, 흑립인이 천천히 흑립을 벗었다.
건장한 체격에 비해 수더분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여지는 나이답지 않게 눈빛이 깊었고, 꾹 다문 입술에서는 과묵한 성격이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백수룡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너……!”
역골공으로 신체를 평범하게 보이도록 바꾸었지만, 백수룡은 한눈에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자는 옛 제자, 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