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10
510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네 가주가 그랬냐?”
“…….”
대답 대신, 악연호는 가면을 벗은 자신의 민낯이 어색한 듯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입술이 터진 자리에 스치자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악연호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술 마시고 오다가 넘어졌어요.”
어린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악연호의 몸에서 주향이 풍기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도 취해 있지 않았다. 넘어졌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마셨다면 모를까.
백수룡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쯧. 술도 약한 자식이.”
혀를 찬 백수룡은 자신의 짐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악연호에게 던졌다.
백룡장에서 출발하기 전,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백무흔이 챙겨 준 고약이었다.
“입술이 터졌으면 약부터 발라야지. 그걸 내버려 뒀어?”
“별것 아니라서…….”
“뭐가 별거 아니야? 평소에는 얼굴에 제일 많이 신경 쓰고 다니는 자식이. 외모도 무기라면서 신입 강사 면접 전에 나한테 옷이랑 향낭 골라 줬던 거 기억 안 나?”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악연호가 큭큭 웃었다.
“맞네, 그랬었지. 생각해 보면 얼마 안 지났는데, 벌써 몇 년은 지난 일 같지 않아요?”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청룡학관에 입사하기 전부터 알게 된 인연이었다.
우연히 어느 객잔에서 만나 호형호제하기로 하고, 목적지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인연.
살수들로부터 공손수를 지킬 때도, 남궁세가에서 열린 신입 강사 연수에도, 청룡제에서도 그들은 함께였다.
“이거 봐요. 기마전 때 형님이 만든 땜빵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다니까요?”
“새로 하나 만들어 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당연하다는 듯 함께 기뻐했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말 없이 술잔을 나누며 위로했다.
그러나 속 깊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겉으로는 유쾌하고 능글맞으면서, 그 아래에 감춰진 속내는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둘은 성격이 비슷했다.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서로가 동류의 인간이라는 걸.
“왔으니까 술이나 마시자. 애들한테 압수한 거 아직 많이 남았거든.”
“진작 마시자고 하지. 방금 입술에 고약 발랐는데…….”
“원래 약 맛, 피 맛이랑 함께 삼키는 술이 끝내주게 맛있는 법이야.”
백수룡은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술을 꺼내며 씩 웃었다.
두 사람이 탁자에 마주 앉아 술잔을 몇 잔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에, 백수룡이 불쑥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네 가주가 그랬냐?”
“……넘어졌다니까요.”
처음과 같은 대답에 백수룡은 영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도 악가주 옆으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넘어져야겠다. 중심을 잡으려면 손발도 좀 휘적거려야 되고, 재수가 없으면 옆에 있는 인간 싸대기 정도는 올려붙여도 어쩔 수 없지 뭐.”
농담처럼 들리지만, 눈빛은 진심이었다.
여기서 악연호가 고개를 살짝만 끄덕여도, 백수룡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행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악연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악연호가 웃음기를 싹 지운 진지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저 진짜 괜찮아요.”
청룡신협과 창왕이 정면으로 충돌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무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작게는 청룡학관과 악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될 것이고, 만약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악연호는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실망시켜선 안 될 것이다.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가주의 시선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질 것 같았지만.
-연호야. 미안하구나.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탓하던 악진헌을 떠올리면,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악연호와 달리, 그의 양부인 악진헌은 태어날 때부터 악가의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히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건 맞지만, 많은 것을 받은 것도 사실이거든요. 무공에, 좋은 음식과 옷, 어디 가더라도 악가 출신이라고 말하면 홀대받을 일은 없었으니까요.”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견디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다.
“연호야.”
백수룡은 애써 웃는 악연호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악가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전생의 자신과 혈교, 옛 제자들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술맛이 썼다.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사호를 생각하면 술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때로는 간단한 방법이…….”
“백수룡. 적당히 해라.”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남궁수가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막 씻고 왔는지 간편한 옷차림이었는데,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는 조금 풀어진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놀랍도록 단정한 느낌으로 남궁수가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학생들을 계도해야 할 강사들이 늦은 밤까지 술판이라니.”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술상을 치워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백수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십존이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무림에 커다란 파문이 생길 사건이다. 만약 생사결이 벌어져 둘 중 하나가 죽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되겠지.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쳐들어가기라도 할 셈이었나? 당장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할 학생들은?”
악연호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물론 백수룡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동생이 맞고 왔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라고? 그리고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야.”
“주먹질로 전부 해결할 거라면 사파와 무엇이 다르지?”
“아주 협객 나셨네. 너 미아가 밖에 나가서 맞고 와도 자초지종 다 따지고 있을래?”
“지금 말 다 했나?”
백수룡과 남궁수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아니, 맞고 온 건 난데 왜 형님들끼리 싸우고 그래요?”
당사자인 악연호가 둘 사이에서 황당해하며 중재해야 할 정도였다.
“자자,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모처럼인데 남궁 형님도 저희랑 술 한잔해요. 네?”
남궁수는 잠시 망설였으나, 악연호의 간절한 표정과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보곤 결국 자리에 앉았다.
“짧게 끝내도록 하지.”
처음 이루어진 세 사람의 술자리였다.
악연호가 형님들의 잔에 연달아 술을 채워 주며 헤실헤실 웃었다.
“남궁 형님. 술 잘 드시네요? 표정이 하나도 안 변하네.”
“주도를 제대로 배우면 쉽게 취하지도, 흐트러지지도 않는다.”
남궁수는 반듯한 자세로 절도 있게 잔을 비웠다.
반면 백수룡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술잔을 홀짝였다. 그가 남궁수를 흘겨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술맛 떨어지게.”
“안쓰럽군. 주도를 제대로 배웠다면 이 향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술을 마시며 유치하게 싸우는 둘의 모습에, 악연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 진짜 형님들이랑 있으면 항상 재밌고 든든하다니까…….”
그건 그가 술이 약해서 빨리 취한 탓이기도 했다. 몇 잔이 돌기도 전에 악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했다.
“저희 앞으로도 자주 같이 마셔요……. 음냐…….”
“자냐?”
“자는군.”
술이 약한 악연호가 만취해서 잠이 든 후에도, 남은 두 사람은 서로 대결하듯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러다 백수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생각해 봤는데. 상대가 십존만 아니면 되는 거 아냐?”
앞뒤 다 자르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남궁수는 백수룡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예의를 충분히 갖춘다면 문제는 없겠지.”
“자신 있냐?”
남궁수는 대답 대신 잔에 남아 있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도록 하지.”
방을 나서기 직전, 남궁수는 곤히 잠든 악연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봤다.
그의 입술에 피딱지가 생긴 위치를 정확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였다.
* * *
가주의 처소에는 야심한 밤까지도 불이 켜져 있었다.
악비는 소가주이자 하나뿐인 딸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기억이 나는군.”
악연화는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에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어릴 적, 자주 어울려 놀던 사내아이가 있었지. 악씨 성을 받았다고 소가주와 남매라도 된 것처럼 주제넘게 굴던…… 그 녀석의 이름이 연호였던가.”
“…….”
가주를 응시하는 악연화의 표정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런 일도 있었지요.”
마치 완전히 잊고 있다가 지금 막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사는 세계가 서로 다름을 알게 되고 멀어져야 했던, 묻어 둔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감정.
“네 수신호위 후보 중 하나였지. 그래서 잠시 곁에 두었던 것이고.”
“제 나이대와 맞는 이들 중 무공이 뛰어난 후보를 뽑기로 했었습니다. 결국 탈락했지요.”
그 이유가 무공 탓은 아니었다.
당시 악연호는 양자들 중에서 군계일학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을 뿐.
악비는 불쾌한 기억이라도 떠올리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당시에 놈을 용서한 것은, 무공에 제법 재능이 뛰어났고, 그 반반한 얼굴이 언젠가 도움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셨습니까.”
악연화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은 초연했으며, 들고 있는 찻물의 표면에는 작은 물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혹, 아직도 놈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호롱불에 비친 악비의 얼굴에 의심이 피어난다.
어린 시절에는 저 얼굴을 귀신보다도 더 무서워했지만, 지금 산동악가의 소가주는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할 줄 알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악연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산동악가의 후계자입니다. 아무리 아버님께서 가주시더라도, 과거의 그런 하찮은 일로 저를 시험하시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악비는 소가주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껄껄 웃었다.
“내 농이 과했구나. 네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확인해 봐야겠다만.”
“…….”
끝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창왕이라 불리는 절세고수가 가문을 다스리는 방식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해 끝내 굴복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악연화는 소가주로서 그런 방식에 누구보다 익숙해져야 했다. 여기에 그녀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다. 만나고 올 자가 있다.”
“예.”
악연화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악비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혼자만 움켜쥐었다. 수족처럼 부리는 극소수의 무인들을 제외하면, 설령 소가주라고 해도 자세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어느 쪽이 친구가 되고 적이 될지는 지켜봐야겠지. 하지만 변치 않을 사실은…….”
비록 자신의 부친이지만, 악연화는 가주의 입가에 천천히 퍼지는 미소가 소름 끼쳤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악가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입니다.”
“내가 없는 동안 저들을 잘 살피도록 해라.”
“예.”
고개를 끄덕인 악비는 곧바로 처소를 나섰다. 그를 곁에서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무인들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악연화는 대문까지만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나 악비는 멀리 가지 못했다.
곧장 분가를 빠져나갈 작정으로 경공을 펼치는데, 기척 하나가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쫓아왔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금안.
악비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상대를 기다렸다.
“이 늦은 시간에 나를 찾아온 겐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희미한 주향이 풍겼다.
하지만 술을 마셨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때문일까.
저 사내가 풍기는 주향은 향낭의 향기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실례를 무릅쓰고 쫓아왔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부탁드릴 기회가 없을 듯하여.”
“무슨 일인가?”
남궁수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가주님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 야밤에?”
악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대련을 청하다니,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의 미간에 다소 짜증이 어렸다.
“술을 과하게 마셨나 보군. 돌아가게.”
그는 남궁수와 대련을 할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궁수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대련의 결과는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겸손한 말투와 달리, 그 눈빛은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