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55
555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매극렴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받은 곽철우는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술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보게, 철우.”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취한 것이라면 방금 전에 한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할 텐데.
저 표정은 이미 단념을 한 것 같지 않은가.
“나더러 관주가 되라니.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응당 자네가 맡아야 할 자리일세.”
“…….”
“혹여나 이 늙은이를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라면 그만하게. 처음부터 욕심 따위는 없었으니.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학생주임으로 족하네. 막중한 자리를 맡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
“…….”
“이보게! 어찌 대꾸조차 않는 겐가!”
매극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언성이 점점 높아질 때였다.
“선배님.”
술잔을 내려놓은 곽철우가 고개를 들어 하나뿐인 눈으로 매극렴을 바라봤다. 그가 입을 열자 독한 주향이 확 풍겼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청룡학관의 관주가 되고 싶습니다.”
격랑처럼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욕심과 미련, 들끓는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져 매극렴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노군상 관주님보다 잘 이끌 자신도 있었습니다. 무공은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학관을 이끄는 능력은 제가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실질적으로 청룡학관의 관주 역할을 해 온 사람은 부관주였다. 노군상이 깊은 실의에 빠져 허허롭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부관주는 자신의 책무를 다해 왔다.
화염도 곽철우.
강호에 그리 대단한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무인으로서 좋은 평판과 강사로서 뛰어난 수완을 지닌 사내.
청룡학관의 명성이 점점 빛바래 가던 시기에 강사로 부임한 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직하지 않고 청룡학관에 남아 부관주가 되었다.
매극렴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곽철우에게 부관주 이상의 야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네가 관주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네. 비로소 기회가 오지 않았나. 왜 움켜쥐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겐가?”
“저도 그리 생각했지요. 헌데…….”
“흰소리는 그만하고 내일 나와 함께 관주님을 만나러 가세. 자네라면 관주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게야.”
매극렴이 대화를 끝내려 했으나, 곽철우는 손가락으로 안대 주변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눈이 하나만 남으니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더군요.”
“자네……!”
정색을 한 매극렴이 꾸짖으려 했으나, 그 전에 곽철우가 먼저 말을 이어 갔다.
“선배님. 청룡학관은 더 이상 기울어 가는 배가 아닙니다. 이제는 승천을 준비 중인 용이지요. 응당 그에 걸맞은 사람이 관주가 되어야 합니다.”
곽철우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매극렴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를 냈다.
“대체 자네의 무엇이 부족하다는 겐가!”
“강호의 배분, 무공, 영향력. 모든 면에서 저는 지금의 청룡학관을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허튼소리를!”
“냉정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곽철우라고 어찌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회에 욕심이 없을까.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지금 청룡학관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오대학관의 관주들, 나아가 구파의 장문인들과 마주하고도 중심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선배님. 저도 청룡학관이 천하제일학관이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천무제에서 콧대 높은 천무학관을 꺾고, 학생들이 청룡학관 소속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걸세.”
“하하,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해 본 일이 아닙니까.”
곽철우는 생각만 해도 기쁘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 진심 어린 미소에 매극렴은 더 이상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청룡학관의 관주가 되십시오. 흔들리는 학생들을 다독이고,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곁에서 선배님을 돕겠습니다.”
할 말을 끝낸 곽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후련해 보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문밖까지 곽철우를 배웅한 매극렴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점점 작아진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곽철우가 하고 간 말들과 청룡학관에서 보낸 시간들. 지금도 무리하고 있을 노군상과 그를 걱정하고 있는 강사들과 학생들.
청룡학관을 졸업한 학생들의 얼굴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날이 추운데, 왜 그러고 계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매극렴이 고개를 돌렸다.
백무흔의 얼굴을 본 순간, 매극렴은 조금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긴 또 웬일이더냐?”
놀랄 일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자주 장인어른의 처소에 들르곤 하는 백무흔이었기에.
그러나 목이 멘 사실을 들키기가 민망해, 매극렴은 평소보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쓸데없이 여기 오지 말고 수룡이나 잘 돌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제 어미를 닮아 힘들고 아파도 좀처럼 티를 내지 않는 아이니 네가 곁에서…….”
그러자 백무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장인어른이 아니라 약빙을 보러 왔습니다만?”
“이, 고얀 놈이…….”
순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매극렴은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딸한테 귀찮게 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들어가 보거라.”
“장인어른은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나는 바람이나 좀 쐬어야겠다.”
고개를 끄덕인 백무흔은 혼자 처소로 들어갔다. 매극렴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실없는 놈.”
말은 그렇게 해도 알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자신의 처소에 들르는 이유가, 사별한 아내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건 백무흔이 두 손에 들고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장인어른. 겸사겸사 약재 좀 가지고 왔습니다. 달여 드십시오.”
잠시 후, 처소에서 나온 백무흔의 손에는 가져온 약재 대신 호리병이 들려 있었다. 매극렴이 곽철우와 나누어 마셨던 술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독한 술을 드셨습니까?”
“볼일 다 봤으면 썩 꺼지거라. 네놈까지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다.”
그러나 백무흔은 오히려 매극렴 옆으로 스윽 다가왔다. 다 늙은 반백의 사내놈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넉살 좋게 물었다.
“부관주가 뭐라고 했습니까?”
“……벌써 소문이 났더냐?”
“아까 오다가 만났습니다. 저한테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하던데요?”
대체 뭘 잘 부탁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백무흔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매극렴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더러 청룡학관주가 되라더구나.”
“음…….”
백무흔은 별다른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밤하늘을 올려봤다.
장인과 사위는 한동안 말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문득 백무흔의 생각이 궁금해진 매극렴이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장인어른이 청룡학관주라……. 저라면 별로 다니고 싶진 않습니다만.”
“이놈이?”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에 매극렴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갔다.
백무흔은 슬쩍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며 들고나온 술병을 홀짝였다.
“전에 수룡이가 저더러 청룡학관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제가 왜 거절했는지 아십니까?”
“흥. 누가 네놈 같은 망나니를 받아 준다더냐? 언감생심 꿈도 크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매극렴은 조금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사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 나 때문에 거절한 게냐?”
“맞습니다.”
“…….”
“장인어른과 함께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장인어른의 평판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까 봐 두려워서였습니다.”
백무흔의 솔직한 이야기에 매극렴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지 않으면 못난 꼴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내가 세간의 평판 따위를 신경 쓰는 것 같더냐?”
“저는 신경이 쓰입니다. 장인어른의 인생이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저와 약빙이 떠난 후에도 청룡학관을 지키셨지요. 학관의 명성이 드높을 때도, 기울어져 가는 배라며 강사들이 떠날 때도 변치 않고 이곳을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
차가워진 밤공기에 새하얀 숨결이 흘러나왔다. 은은한 주향을 풍기는 백무흔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다소 취기가 오른 듯, 백무흔은 조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은 그런 존재입니다. 청룡학관의 역사이자, 변치 않고 학생들을 반겨 주는 고향 같은 분.”
“……그만하거라.”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학생들이 싸울 때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장인어른은 이곳에 남은 학생들을 지키고 계셨던 겁니다.”
“그만하래도.”
“장인어른이 관주가 되면……. 다들 좋아할 겁니다.”
“이놈아. 아까랑 말이 다르지 않더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던 매극렴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나았으니까.
“이제 보니 부추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내 딸도 그 말솜씨로 꼬셨더냐?”
“그때는 언변보다는 얼굴이 조금 더 나았지요.”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두고.”
피식 웃은 매극렴이 말했다.
“그래. 관주가 되어야겠구나.”
지금까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불리는 호칭만 달라질 뿐, 여태껏 해 온 것처럼 청룡학관을 지키면 되는 것을.
“지금의 청룡학관에는 뛰어난 강사들이 많다.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정도라면, 이 늙은이도 할 수 있겠지.”
매극렴이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리자, 백무흔도 기분 좋게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후임 학생주임은 네가 맡거라.”
“……예?”
상상도 못 했던 제안에 백무흔이 눈을 부릅떴다. 어찌나 놀랐는지, 입에 대려던 술병을 떨어뜨렸다가 허리쯤에서 다시 잡았을 정도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관주가 되면 당연히 누군가는 학생주임이 되어야 할 것 아니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왜 하필 접니까?”
“네놈만큼 망나니짓을 잘 아는 녀석이 어디 있다고. 학생들의 일탈을 예방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인선은 없을 터.”
단호한 말은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무흔은 영 찜찜하다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매극렴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실컷 부추겨 놓고 네놈만 쏙 빠져나가려고 했더냐?”
“진심으로 제가 학생주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백무흔은 잠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툭하면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고, 일 학년 때부터 시비를 걸어 대던 선배들과 싸움을 벌였다.
술도 지금이야 취기가 오르는 정도에서 조절하는 수준이지만, 그때는 술병에 걸려 천무제에서 기권할 정도로 좋아했었다.
당시에도 학생주임이었던 매극렴과의 밤샘 추격전은 졸업한 동기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 있다고 들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졸업생 중에 저보다 사고를 많이 친 학생이 있었습니까?”
“어림없는 소리. 네놈 기록의 절반도 채운 녀석이 없었다.”
“약빙이 학관을 반년만 더 다녔어도 뛰어넘었을 텐데요.”
“……이놈이?”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린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큭큭 웃었다.
“장인어른. 정말로 장인어른이 삼십 년 넘게 해 오신 일을 제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매극렴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 너라면 괜찮을 것 같구나.”
학생주임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고, 실력이 뛰어난 무인이어야 했다. 학관 안팎으로 사고가 났을 때는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백무흔은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무인 중 한 명이었다.
“아마 약빙도 좋아할 게다.”
“웃다가 뒤집히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지만……. 예. 좋아는 하겠지요.”
머리를 긁적인 백무흔은 술병에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기분 좋게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시켜 주신다면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날, 매극렴은 노군상을 찾아갔다.
전날 술김에 한 약속을 벌써부터 후회하기 시작한 백무흔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