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32
632화. 승부사 기질
“아미타불. 붉은 운무라고 하셨습니까?”
불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용두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의 정보단체라 불리는 개방을 이끄는 노인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곁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림맹주의 얼굴도 무섭게 굳어 있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용두방주가 말했다.
“며칠 전부터 천하 각지에서 괴이(怪異)한 현상들이 보고되고 있소이다. 붉은 운무와 마공을 익힌 광인들, 사람을 해치는 영물 따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소.”
“혹, 그 붉은 운무라는 것이…….”
“역천신공. 가증스러운 혈마의 무공과 관련된 것입니까?”
무림맹주가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리 기막을 펼치고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절세고수가 내비친 살기에 일대의 군중들 중 많은 수가 호흡 곤란을 일으켰을 터였다.
“맹주. 진정하시지요.”
무림맹주를 타이른 불존이 다시 용두방주에게 물었다.
“개방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본 방에서는 혈교의 움직임일 가능성을 구 할 이상으로 판단하고 있소이다.”
“…….”
사실상 혈교의 발호를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순간 불존과 무림맹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천무제를 진행하면서 예상했던 범위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오히려 무림맹주는 사납게 웃으며 혈교에 대한 깊은 증오를 드러냈다.
천무제는 일종의 미끼이기도 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흑도맹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무림 세력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장소.
전력이 크게 약해진 혈교라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에,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이 총동원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혈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용두방주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말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혈교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산발적이란 것이오. 붉은 안개가 발생하는 장소들에서 어떤 규칙도 찾을 수 없었소이다. 마치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처럼 말이지…….”
각지에서 발생한 붉은 운무에는 지독한 마기가 스며 있어서 고수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가 늦어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성동격서일지도 모르겠군요. 적들이 노리는 것이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존이 염려스러운 음성으로 말했으나, 무림맹주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최후의 발악일 뿐입니다. 전력이 크게 약해졌으니, 흩어져 천하 각지에서 혼란을 일으키려는 게지요.”
“나도 그리 생각하오.”
용두방주 또한 맹주의 생각에 동의했다.
혈교의 전력이 청룡신협에 의해 크게 약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아직까지 대규모 병력의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다.
“강호무림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흑도맹의 도움을 얻은 것이 크네. 녹림에서 길을 열어 준 데다 하오문의 협조까지 받았으니, 이번에야말로 가능할 게야.”
무림맹주와 용두방주가 혈교의 본거지를 찾아낸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불존은 혼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혹여 최후의 발악이 아니라면…….’
천하 각지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 개방과 하오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면?
‘그 틈에 정예 병력으로 구파의 본산 중 하나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 혹은 이곳에 모인 무림의 정예를 단숨에 쓸어 버리기 위해…….’
불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정을 지웠다. 전자는 가능할지 몰라도 후자는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친 비약이구나.’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걱정이 지나친 듯했다.
혈교의 전력이 과거처럼 강성하다고 해도 무림의 최고수들이 군집해 있는 이곳을 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들이 천하무림과 공멸할 각오라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일은 없으리라.
“아미타불.”
불존은 불호를 외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대화 중인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일은 장문인들과 가주들, 오대학관의 관주들에게 우선적으로 알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향했다.
이제 막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두 소년을 지나쳐, 팔짱을 낀 채 제자를 지켜보는 백수룡에게 닿았다.
“청룡신협에게도 알리도록 하지요.”
다른 두 사람도 이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 무림에서 혈교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바로 청룡신협이었으니까.
* * *
소림신룡 일각.
검재 위지천.
천무학관과 청룡학관을 대표하는 두 천재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용봉비무가 시작되기 전이었다면 모두가 소림신룡의 승리를 예상했을 것이다. 아니, 용봉비무가 시작된 이후에도 일각은 줄곧 부동의 우승 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묘했다.
연소하와의 팔강 비무에서 검강을 피워 낸 이후, 위지천은 새로운 우승 후보로 급부상했다.
“검재 위지천! 반드시 이겨 주게! 자네에게 내 전낭을 통째로 걸었어!”
“천년소림의 무공이 우습게 보이시오? 저 소년이 강한 건 인정하지만, 소림신룡에겐 통하지 않을 거요!”
“거참, 소림 무공에는 검강도 막아 낼 비기가 있는 모양이우?”
“지금 빈정거리는 건가? 검강도 닿아야 의미가 있지. 형장이야말로 소림신룡의 금강부동신법은 보지 못했나 본데?”
“이 작자가……!”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건가!”
어느새 두 패로 나뉜 관중들이 응원전을 펼쳤다. 그러다 서로 비꼬기도 하고 종종 멱살잡이까지도 하는 가운데.
비무대에 올라온 두 소년이 똑바로 마주 섰다.
일각이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이거 참, 긴장을 했는지 손에 땀이 나는군요.”
“……스님도 긴장을 하시나요?”
“하하. 저 또한 사람입니다. 부동심을 연마하고 있지만, 여러모로 많이 미숙합니다.”
일각의 소탈한 모습에 위지천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미숙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 스님의 비무를 전부 유심히 봤거든요.”
위지천이 보기에도 일각은 빈틈을 찾기가 힘든 무인이었다.
심지어 독고준에게 대머리라고 몇 번이나 놀림을 받았을 때도, 일각의 표정은 동요한 듯 보였을지언정 무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당소소 선배한테 비무 도중에 스님을 놀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진심이 어린 합장이었다. 마치 상대에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일각의 눈에 고마운 감정이 깃들었다.
관중들의 예상, 그리고 기대와는 달리 비무를 앞둔 두 후기지수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일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시주. 감사의 의미에서, 그리고 노파심에 한 가지만 조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스윽.
일각은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은 허리춤에 붙이고 왼 주먹은 앞으로 뻗었다. 소림권법의 기본 기수식이었다.
십팔반병기를 제 몸처럼 다룰 줄 아는 소림신룡은 이번 비무에 그 어떤 병기도 들고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소림신룡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병기가 저 자신의 육신이기 때문이었다.
“저와의 비무에서 어설프게 검강을 피우려고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네. 참고할게요.”
위지천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이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실로…… 기대가 크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천무학관주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바닥에 내려서며 가볍게 바닥을 찍었다.
쿵.
비무대에 가벼운 진동이 번지며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그 순간 시끄럽게 떠들던 관중들이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일각이 먼저 움직였다. 자애롭게 맺힌 입가의 미소가 짙어지더니,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허리춤의 주먹을 그대로 앞으로 뻗었다.
화아아악!
기파가 폭풍 같았다. 황금빛 주먹의 형상이 어느새 위지천의 전면을 가득 채웠다. 독고준을 혼절시킨 수법이었다.
“백보신권이다!”
관중들의 경악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위지천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섬전과도 같은 궤적에 백보신권의 권기가 갈라졌다.
그 순간, 위지천의 시야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지는 것이 보였다. 승복이 바람에 세차게 펄럭이는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왼쪽!’
흐릿해진 일각의 신형이 위지천의 좌측에서 나타났다. 금강부동신법. 눈에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차원이 달랐다.
‘생각보다 더 빨라.’
위지천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몸을 틀면서 검로를 그렸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검로는 어딘가 연소하의 태극혜검과 닮아 있었다.
매 순간이 배움이고 성장이다. 천재의 습득력은 그토록 가공했다. 하지만 그 위로 떨어지는 일각의 발길질 또한 무시무시했다.
쩌저저정!
일각의 신형이 세차게 휘돌며 양발을 연달아 찼다. 그 모습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용권풍을 연상시켰다.
위지천이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자 일각이 지풍을 쏘며 따라붙었다. 그 역시 천하에 유명한 신공이었다.
“항마연환퇴! 탄지신통! 조금 전 금강부동신법에 백보신권까지……. 한자리에서 소림의 신공절학들이 도대체 몇이나 펼쳐지는 겐가?”
“안법을 배우길 잘했군! 오늘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하는구나!”
관중들이 여기저기서 흥겨움에 경탄성을 터트렸다.
소림신룡 일각은 그동안의 정적이고 진중했던 비무에서의 모습을 버리고 공격일변도로 위지천을 몰아붙였다.
쿵! 화아악! 쩌저정!
진각을 밟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바닥이 흔들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전력을 다한 소림제일후기지수의 기세는 가장 시끄러운 호사가조차 잠시 말문을 닫게 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비무대 주변은 어느새 황금빛 파동으로 가득 찼다.
반면, 위지천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워 보였다.
“예상과 달리 소림신룡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군.”
“도무지 상대가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검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섣불리 검강을 꺼내려다간 필패일세. 강기를 사용하는 데 집중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지 않을 터. 소림신룡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게야.”
천하에 이름난 고수들조차 쉴 새 없이 떠들며 의견을 나눴다. 후기지수들의 비무를 보는 태도가 아니었다. 자신들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인 고수들의 비무를 지켜보는 듯 집중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관중들의 눈에도 비무의 흐름이 점점 기우는 것이 보였다. 처음과 다름없는 얼굴로 무공을 펼치는 일각과 달리, 위지천의 표정은 굳어 가고 있었다.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전년도에 이미 용봉비무를 제패한 후기지수제일의 고수.
그 무공은 동년배들을 진작에 초월했으며, 천하에 이름난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위지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강해.’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활로를 찾아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상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머리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소년은 천하를 오시할 만한 재능을 지녔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이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사람에게 검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너보다 강한 고수를 이기는 법? 천이 네가 물어볼 정도면…… 꽤나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가정해야겠군.
어느 날 그런 질문을 하자, 백수룡은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실 대단한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고, 그걸 승부수로 삼아서 모든 걸 던져야겠지.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그럴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수련을 계속해야 하는 거고.
지금이 바로 그 변수, 그리고 승부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위지천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반격은 거의 포기하고 일각의 파상공세를 막는 것에 집중했다.
체력을 아껴 비무를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라도 변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청룡학관의 강사들과 학생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형님. 천이한테 뭔가 역전할 방법이 있겠죠? 그렇죠?”
신연호의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에, 백수룡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당장 뾰족한 수는 없어.”
“예?”
“소림신룡은 용봉비무에 출전한 후기지수들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녀석이야. 외공과 내공, 병기술뿐만 아니라 절제력도 강하고 경험도 내 생각보다 많아. 웬만한 방법으로는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일각이 방심해서 위지천에게 검강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백수룡은 미간을 가늘게 좁힌 채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위지천의 실력으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야.”
백수룡은 위지천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이 자리의 누구보다 냉정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강사들과 학생들의 안색이 변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저 위지천이 누구한테 진다고요?”
“말도 안 돼. 쟤는 검강까지 쓸 줄 아는 괴물이라고요!”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혹은 믿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힘들다고만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는 천이한테 걸겠어.”
백수룡이 제자를 평가하는 데 있어 이토록 냉정한 이유는 승패에 초연해서가 아니었다.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지천에겐 일각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으며,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리라는 것을.
“이길 수 있는 상대하고만 싸우도록 물렁하게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법을 더 많이 가르쳤다.
감당하기 힘든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 온 경험들. 적어도 그것은 위지천이 소림신룡보다 몇 수는 위였다.
“그리고 천이 저 녀석. 보기보다 승부사 기질이 있거든.”
백수룡이 입을 꾹 다문 위지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순간이었다.
까아아앙-!
위지천이 검을 놓쳤다.
그 순간 일각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위지천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탄식을 터트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당황한 위지천이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일각의 신형은 다시 한번 흐릿해지며 거리를 좁혔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그 순간, 백수룡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저 녀석이 검을 놓칠 리가 없잖아. 팔이 잘린 것도, 검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설령 검이 부러진다고 해도, 위지천이라면 부러진 검으로라도 싸울 녀석이었다.
그런 위지천이 검을 놓쳤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일부러 놓았다면 모를까.”
두 후기지수의 신형이 겹쳐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진 찰나, 위지천의 허리춤에서 검집이 벼락처럼 뽑혀 나왔다.
위지천의 승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