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74
73화. 고민 상담 시간“……그러니까 호위 일에서 잘려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잘리기는 누가 잘렸단 겁니까! 휴가입니다, 휴가!”
흑영은 옆에서 걷는 백수룡을 째려봤다.
그의 손에는 이런저런 짐 보따리가 잔뜩 들려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반으로 줄어든 숫자였다.
왜냐하면 흑영이 짐의 절반을 나눠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백수룡은 조금 전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여기서 뭘 하냐고 물었고, 그녀는 딱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기에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백수룡이 대뜸 들고 있던 짐을 내밀었다.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줘. 요즘 신입생 입관 시험 준비하느라 이것저것 할 일이 많거든.”
“예?”
“나중에 밥이라도 살게. 일단 이것 좀 같이 들자고.”
“갑자기 무슨…….”
“이거 다 청룡학관으로 가져갈 건데. 많이 바빠?”
“이리 주세요.”
……그렇게 되어, 흑영은 백수룡이 들고 있던 짐의 절반을 나눠 든 채 그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이러면 당당히 청룡학관으로 들어갈 수 있어.’
두 사람은 보부상처럼 봇짐과 등짐을 지고 도시 곳곳을 누볐다.
“입관 시험이 시작되면 필요한 비품이 엄청나게 많거든. 학생주임 선생님이 직접 보면서 사라고 해서 말이야.”
“그렇군요.”
“문제는 이걸 왜 내가 사러 다녀야 하느냐는 거야. 내가 무공 가르치러 왔지, 애들 뒤치다꺼리하러 왔어?”
“음…….”
“월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부려먹는 건 뭐 이렇게 많은지……. 어휴. 학기가 시작되면 좀 달라지려나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먹고 살기 힘들어. 그렇지?”
“…….”
백수룡은 쉼 없이 투덜거렸고, 흑영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대화라는 것이 계속 일방적으로만 흐르기는 어려운 법.
“그런데 넌 왜 거기 있었던 거야? 무슨 일 있어?”
“그게…….”
결국 그런 식으로, 흑영은 자신이 혼자 덩그러니 있던 이유를 말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튼 잘린 건 아닙니다.”
“잘린 것도 아니면서 왜 잘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거야? 휴가를 받았으면 제대로 즐겨야지.”
“휴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흑영은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내가 왜 이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인데.
한 달 동안 같은 공간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 봤기 때문에?
공손수 어르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준 은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유들유들하면서도 가끔은 깊이를 알 수 없을 특유의 저 눈빛 때문일까?
그 순간 백수룡이 고개를 돌려 흑영을 빤히 바라봤다.
속내가 들킨 것 같아 흑영은 잠시 숨을 멈췄다.
“오래 걸었는데 다리 아프지 않아? 잠깐 근처 찻집에서 쉬었다 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까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요? 청룡학관으로 바로 가는 편이…….”
“빨리 끝내고 가 봤자 또 다른 일만 시킬 게 뻔해. 아, 저기로 가자.”
“……마음대로 하시죠.”
흑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문제없이 청룡학관에 들어가려면 이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찻집에 들어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차를 시키고 창밖을 구경하는데,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흑영의 예민한 청각은 주변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어머머. 저기 좀 봐…….”
“허. 선남선녀가 따로 없군.”
“옆에 남자만 없었으면 말이라도 걸어보는 건데…….”
“아서라. 네 얼굴로 가당키나 하겠냐.”
“……근데 솔직히 얼굴은 남자가 더 낫지 않냐?”
“너, 너 이 자식. 그런 취향이었어?”
백수룡과 함께 다니면서 좋은 점 하나는, 더 이상 귀찮은 날파리가 꼬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외모로 비교되는 건 좀 불쾌하지만.’
창밖을 보던 흑영은 눈동자만 돌려 차를 마시는 백수룡을 힐끗 보았다.
무공을 익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빠져들 듯한 깊은 눈.
찻잔을 부드럽게 쥔 손가락은 웬만한 여자보다 섬세하고 길었다.
‘잘생기긴 했어.’
남자의 외모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객관적인 미적 기준으로 보아도 백수룡은 대단한 미남이었다.
‘……본인은 그다지 자각하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실제로 지난 한 달간, 백룡장을 몰래 기웃대던 자들 대다수가 여자였다.
백수룡은 아마 모를 것이다.
흑영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조용히 쫓아냈는지 말이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닙니다.”
사실 흑영은 백수룡의 뒷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모시고 있는 공손수의 안전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였다.
‘과거는 확실히 깨끗했지.’
백수룡은 청룡학관에 입사하기 전까지 쭉 시골에서 살았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적 없는 부친은 시골에서 무관을 운영 중이었고, 모친은 백수룡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백수룡도 어머니를 닮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지만, 죽을 고비를 크게 한번 겪고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청룡학관에 와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여럿 저질렀고.’
천무제에서 청룡학관을 우승시키겠다고 선언한 것.
일타강사인 남궁수와 누가 가르친 제자가 더 좋은 성적으로 입관하느냐를 두고 내기한 것.
흑영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물론 공손수에게도 다 보고했다.
-푸헐헐! 그렇단 말이지? 백 선생을 위해서라도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공손수는 내기 내용을 듣고도 그냥 웃어넘겼다.
흑영은 그것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르신이 괜찮다고 하시니 자신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으로 받은 휴가인데 좀 더 즐기지 그래? 그렇게 표정 팍팍 구기지 말고.”
백수룡이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부드러운 미소에, 찻집 안의 여자들 여럿이 꺄악 꺄악 자지러졌다.
하지만 흑영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제 몸은 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역시 상담이 필요해 보이네.”
“상담?”
작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굳어 있는 흑영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평소에 널 보면 말이야. 네 이름 그대로 어르신의 그림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바로 제 역할입니다.”
흑영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백수룡이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백수룡이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그림자처럼 멍하니 있었던 거야?”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흑영이 백수룡을 지그시 노려봤다.
“주제넘은 발언은 삼가시죠.”
“정곡을 찔렸나 보네.”
흑영이 사납게 백수룡을 노려봤지만, 그의 유들유들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만약에 말이야. 넌 어르신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물론입니다.”
“어르신이 날 죽이라고 명령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일부러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백수룡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 질문. 어르신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떨 것 같아?”
“…….”
흑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가정은 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 만약을 가정하자 머릿속이 멍해졌다.
백수룡이 목소리를 낮춰 진지하게 물었다.
“이래도 모르겠어? 어르신이 왜 너한테 휴가를 줬는지?”
“그건…… 청룡학관이 지원자 외에 출입을 금지해서…… 어쩔 수 없이…….”
더듬더듬 대답하는 흑영에게, 백수룡은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럼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되지. 굳이 휴가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놀러 다니게 한 이유가 뭔데?”
흑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공손수의 명령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나.’
한 달간 지켜보며, 백수룡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적인 호위 대상과 호위 무사 간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은 아니고.
“넌 네가 어르신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상대에게 더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너야.”
“무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흑영이 발끈했다.
그러나 이어진 백수룡의 말에 그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은 널 딸처럼 생각해.”
“!!”
-네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딸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불과 몇 시진 전에 들었던 말이니까.
하지만 자신도 몇 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을, 이 남자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물론 너도 어르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지.”
“그, 그걸 어떻게…….”
당황한 흑영이 말을 더듬었다. 백수룡이 찻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
“내가 눈치가 많이 빠르거든. 그리고 넌 눈치가 많이 없고. 오죽하면 자립심을 길러 주려고 휴가를 줬더니 자길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침울해하고 있을까.”
“그런…….”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분이면 좋겠다.
고아로 자란 흑영은 공손수를 모시며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백수룡은 찻잔을 쥔 흑영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걸 살수 무공을 익힌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흑영이 살수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무공을.
“낯설 거야. 타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
살수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감정을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
흑영도 분명 그런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훈련은 결국 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본능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흑영이 공손수의 호위를 전담한 게 벌써 몇 년 전이라고 했으니.’
그 몇 년 동안, 살수로서 죽여 놓았던 인간의 감정이 서서히 살아났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최근에 들어서야 흑영은 자신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부분에서 흑영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맹목적으로 아빠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나는…… 나는…….”
흑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백수룡을 봤다가, 찻잔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백수룡을 바라봤다.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잘못한 게 아냐.”
백수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살수가 인간적인 감정을 갖는 것.
옛날이었다면 살수로서 실격이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녀석은 살수가 아니니까.
“어르신도 네가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진 않을 거야. 그랬으면 널 진작 해임했겠지.”
“…….”
“어르신이 왜 너한테 휴가라는 자유 시간을 줬는지,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혼자서 다니도록 했는지 잘 생각해 봐.”
남은 차를 후루룩 마셔 버린 백수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 상담은 충분히 해 줬다.
이 이상은 본인이 더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다.
“일어나자. 너무 늦게 돌아가면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혼나거든.”
“……예.”
찻집을 나선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백수룡이 조금 앞에서 걷고, 흑영은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왔다.
대화는 없었다.
‘어색해 죽겠네.’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혼자 있는 흑영과 마주쳤을 때, 도저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봐 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앞으로 종종, 길을 잃고 헤매는 학생들을 보게 될 때가 올 게다. 선생이라면 결코 그 아이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얼마 전에 매극렴에게 들은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생각해 보면 얘는 학생도 아닌데 말이야.’
공손수에게 많은 돈을 받았으니, 덤으로 해 준 셈 치기로 했다.
“당신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침묵하던 흑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르신과 제 정체를 알고 있나요?”
“……대충 추측은 해.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한 달 동안 ‘천자’며 ‘황궁’이며, 그런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눈치를 못 채면 그게 더 이상했다.
공손수는 아마 자신이 상상하기 어려운 황궁의 권력자 중 한 명일 것이다.
“어르신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는 금의위 출신입니다.”
“…….”
금의위는 황제 직속의 친위대이자 비밀경찰이었다.
웬만한 권력자들도 금의위를 두려워하며,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은 막강했다.
또한 현재 금의위의 수장은 무공으로 천하 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어릴 때 전쟁고아로 금의위에 거둬져, 무공을 배운 후에 여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흑영은 덤덤한 목소리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원래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그냥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잠입, 암살, 공작.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천자께서 저를 어르신에게 내리셨습니다.”
“내리셨다는 건?”
백수룡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묻자, 눈이 마주친 흑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저는 금의위 소속이 아니라 어르신의 개인 호위입니다. 만약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전 자유의 몸이 됩니다. 어르신께서 금의위에 있는 제 기록을 다 소각하고 새로운 신분을 주셨거든요.”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당신도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네요. 놀라 자빠질 줄 알았는데.”
“너 농담 되게 못한다.”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저 멀리 청룡학관의 현판이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짐을 잔뜩 짊어지고 청룡학관 내부로 들어섰다.
우와아아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대련장이 있는 방향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흑영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어르신께서 청룡학관에 입관한 후에 말이에요. 나이가 많다고 다른 학생들이 시비라도 걸면…….”
“시비? 무슨 상관이야.”
백수룡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함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했다.
“내가 충분히 강하게 가르쳤거든.”
저곳에 자신의 제자들이 있을 것만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 * *
퍼엉!
일장에 복부를 얻어맞은 조막생이 허리를 새우처럼 꺾었다. 한순간 숨이 턱 막히고 하늘이 노래졌다.
“헉……!”
고개를 치켜든 조막생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런. 미안하네. 설마 그것도 못 막을 줄은 모르고…….”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공손수가 조막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