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52
151화 급변하는 정세 (1)
조선에서 온 장영실.
일본에서 온 큐슈 단다이 시부카와 미쓰요리.
항해 초기에 잠깐 인연이 있었던 대월의 호족 레 리.
그 밖에도 류큐, 참파, 아유타야, 팔렘방, 믈라카, 한타와디 등에서 구면인 이들이 사신으로 와 있었다.
무슨 목적으로 대만에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국가의 사신이 일부러 나를 찾아와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게 되자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는.
역사를 바꿨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노라고.
“다들 뭐 하러 항구까지 나왔는가. 바닷바람이 차네. 어서 들어가지.”
“예. 전하.”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지만, 솔직히 민폐다.
나라를 방문한 것까지는 좋은데, 왜 항구에서 서 있냐고.
그동안 신경 못써줬던 허신애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못 하게 되었잖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허신애와 단둘이 마차를 탔다.
조금이나마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잘 지냈어?”
“예. 건강합니다. 이쪽은 소식이 없지만요.”
허신애는 슬쩍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못 본 사이 매우 성숙한 느낌이다.
게다가 행동 하나하나에 색기가 담긴 느낌이라고 할까.
따로 매혹술이라도 익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언제 출항하실 생각입니까?”
“이번에는 조금 길게 머물러야 할 거야.”
“그렇습니까?”
“서신으로 따로 보냈으니 알겠지만, 이번에 내가 원정대도 맡게 되었거든.”
3만의 원정대.
그야말로 엄청난 전력이다.
매번 수십만 대군을 상대했던 한반도로서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동남아시아에서 3만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대군이니까.
따라서 나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위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점이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전하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폐하께서 외인에게 막강한 군대를 맡기실 줄은…….”
“잘은 모르겠지만,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아.”
굳이 말하자면 함정에 더 가능성을 두고 있다.
아무리 영락제가 ‘너밖에 없다.’라는 이유를 붙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겠지. 의심받을 행위는 일절 하지 말고.”
“다행이라고 하기엔 그렇습니다만, 해관의 책임자인 병필태감 문루가 자주 대만을 오갔습니다. 대만의 상황을 알기 때문인지 경계하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가 자주 오고 갔어?”
“예. 그전에는 자주 오가셨지만, 삼보 태감께서 황궁에 귀환하신 이후에는 온 적이 없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다.
분명 동창의 눈길은 여기에도 미치고 있다.
“당분간은 몸을 낮춰. 요란한 일은 자제하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숙청기에 허가장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배웠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아예 같이 배를 탈래?”
나는 여러 곳에 씨앗을 뿌려두고 자연스럽게 분열되는 그림을 그릴뿐, 반란을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게 팩트로만 돌아가진 않는다.
내가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면, 증거를 위조해서라도 역모로 몰 터.
차라리 함께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의 기반은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킬 테니까요.”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오히려 목숨이 위험할 것 같으면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
기반이야 다시 쌓으면 된다.
어차피 내 기반은 세계 곳곳에 분산해서 쌓아두었으니까.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각오한 일입니다. 오히려 제 생각보다 훨씬 아껴주셔서 감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뭘 했지?”
“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게 해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뭘 했지?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신가 보군요. 기이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을 지닌 묘재. 정말 그 별명이 딱 맞습니다.”
허신애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 웃었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나이라서 그런가.
“만약 제가 다른 곳에 시집갔더라면, 창해 주식 상단이라는 거대한 상단을 운영할 순 없었겠지요.”
“상단 운영이 재밌어?”
“예. 전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규중에서 얌전히 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거든요.”
“죄송할 거 없어. 덕분에 부담이 많이 줄었으니 감사할 일이지.”
의외로 유학은 여성의 경제활동에 관대하다.
오히려 권장한다고 봐야 한다.
삯바느질이나 길쌈, 양잠 등을 해서 남편과 자식을 공부시키고, 가문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흔할 정도니까.
심지어 부유한 양반가에서도 재테크는 아내의 영역이다.
선비가 상업에 뛰어드는 것은 물욕을 좇는 것은 금기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은 학문에 매진하고, 아내는 전답을 경영하거나 점포를 열고 관리 감독하는 예가 많았다.
나의 경우 굳이 허신애가 반드시 나서야 할 정도로 상황이 위험하진 않으나, 그녀의 수완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 도움이 많이 된다.
지금은 어리니까 많은 도움 수준이지, 이대로 잘 성장해 나간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내인 만큼 믿을 만하기도 하고.
“굳이 나한테 시집오지 않았더라고 해도, 어디서든 충분히 가세를 일으켰을 것 같은데?”
“호호호. 전하께서는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음?”
“능력이 뛰어난 여자를 포용할 수 있는 남자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와.
자신도 높이고, 상대도 높이는 굉장한 칭찬 방법이다.
마치 ‘날 로그인하게 만들다니.’ 급이라고 할까.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물론 전하께서 조금만 더 저와 함께 보내주신다면 더욱 행복하겠습니다만, 그것이 전하의 앞길을 막을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사르르 눈웃음을 치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진짜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하기보다는 외롭고 힘들 것 같은데, 무리하게 참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으니, 더 잘해줘야겠다.
***
왕궁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렸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못 보던 건물이네. 분명 마지막에 봤을 때는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허신애는 살포시 웃었다.
“한 나라의 왕궁인데 궁전 한 채만 덜렁 있어서야 위엄이 살지 않지요. 계속해서 증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네.”
신혼인데 독수공방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일 시키고 있으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척 즐겁습니다. 하루하루가 매우 빠르게 간다고 느낄 정도로요.”
“즐겁다니 다행이네.”
“물론 전하와 함께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지만요.”
허신애가 매우 가까이서 걷자, 이소군은 한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정실과 측실이라는 엄격한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늘 함께하는 만큼 대만에서는 시간을 양보하려는 배려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한결같으시군요. 중전마마나 귀빈 마마와 금실 좋은 모습을 보니 무척 부럽기까지 합니다.”
슬쩍 끼어든 사람은 장영실.
안색이 그리 좋지 않다.
다크 서클은 광대뼈 가까이 내려와 있고.
엔간히 혹사당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몰골을 할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역사와는 달리 킬방원이 기술에 관심이 큰가?
“밥은 먹고 다니니?”
“예. 잘 먹습니다. 밥은 매우 잘 먹지요. 조선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밥은 정말 매우 잘 먹습니다. 비가 안 올 때면 숭늉에 밥 말아서 김치랑만 먹기는 하지만 양은 충분합니다. 야식이라면서 고봉밥을 계속 주시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밥이 아니라 잠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만 아무튼 밥은 매우 잘 먹습니다.”
“어이. 정신 차려.”
“예?”
장영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추태를 깨닫고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마음이 풀어져서 실수하였습니다.”
“어차피 같이 온 사신 말고는 조선말 알아들을 사람 없을 테니 상관없긴 하다만…….”
대체 얼마나 갈렸기에 이런 모습이 나오지?
마치 대학원생을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해야지. 방법이 없다.”
“…….”
그러게 왜 내 밑에서 도망가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도 못 들어봤나 보다.
들어봤으면 더 이상하겠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사신들과 함께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허신애의 안내대로 새로 지어진 건물로 향했는데, 별다른 장식은 없었지만, 내부 공간만큼은 무척 넓은 곳이었다.
“이곳은?”
“본래 각 부족의 족장이 모여 법률을 만들 때 쓰는 장소입니다.”
현대로 치면 국회의사당 정도 되려나.
“법률 만든 횟수보다, 모여서 술을 걸치고 친목을 도모한 횟수가 더 많긴 하지만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정치에는 견제의 원리가 중요하다지만, 대만은 서로 칼 들고 목을 베던 부족들을 모아놓은 국가인 만큼 일단은 친하게 지내는 게 중요하니까.
어차피 먹고살 만해지면 알아서 서로 견제하게 된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일단은 차례로 소개하지. 먼저 그쪽은 한타와디에서 온 것 같은데 맞는가?”
“예. 전하.”
우리가 출발하고 나서 곧바로 따라 보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빠르시더군요. 열심히 쫓아갔는데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빨리 남경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원정대를 넘겨받기 위해 한 달간 머무는 사이 부지런히 따라잡았나 보다.
“그래. 라자다릿께서는 잘 계시고?”
“라자다릿께서는 곧바로 군을 움직여 아라칸 왕국을 해방하셨습니다.”
그 양반은 전쟁을 억수로 좋아하네.
“해방? 정복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민소몬 왕에게 돌려주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잉와에서 세운 허수아비 왕인 아나우 라흐타를 처형하고, 소 폐이 찬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라자다릿이 정당한 아라칸의 왕입니다.”
“…….”
소 폐이 찬타는 민카웅의 딸이다.
민카웅이 아라칸을 정복하고는, 아나우 라흐타를 사위 삼아 아라칸의 왕으로 임명했다.
근데 라자다릿은 이미 민카웅의 유일한 여동생과 결혼한 상태인데.
여러 왕비 중 하나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모와 조카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한 건…….
모르겠다.
이 시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실제로 잉첩이라고 해서 자매를 동시에 맞아들이는 일도 많은데.
그냥 넘어가자.
이름도 어려울뿐더러,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왜 중요한 일이 아니냐면…….
“당연히 잉와의 왕, 민카웅은 분노해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겠고, 지금 열심히 전쟁 중이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천 리를 보신다는 용왕…….”
사신이 여러 미사여구를 동원해 내 능력을 찬양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저 미얀마의 평화는 멀게만 느껴진다는 게 안타까울 뿐.
다음 항해 때는 한타와디는 건너뛰고 바로 벵골 술탄국에 가야겠다.
“공자는 오래간만에 보는구려.”
“예. 이제는 저도 명나라 소속이 되었기에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한때는 대월의 호족이었던 레 리.
그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못 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열정은 넘쳐도 풋내기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성숙한 장군이랄까.
한 무리의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카리스마가 엿보였다.
“명나라 소속?”
“이번에 대명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전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말단이지만 말입니다.”
레 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라를 잃었는데도 여유 있게 웃는 모습이라.
2년 전 열정 넘쳤던 모습을 생각하면 무척 이질적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분노를 가라앉히고 발톱을 숨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처럼 말이지.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 뒤로도 여러 사신에게서 인사를 받았다.
사신들은 하나같이 귀한 선물을 보내왔는데,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선물 받아본 적도 없어서 부모님 제사조차 간소하게 치렀다는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래. 장영실. 그대는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
킬방원 성격에 쪼잔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조선에서 보내는 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장영실은 아까의 정신 나간 모습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는 내용물을 열어보았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장영실에게 평생의 업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던 기계.
증기기관이 들어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