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53
152화 급변하는 정세 (2)
장영실이 가져온 증기기관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직접 석탄을 때워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일단 겉모습만큼은 확실히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섬세한 부품도 일일이 장인의 손으로 다듬은 것처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보통 공을 들인 물건이 아닌 만큼, 모양만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져왔군.”
내심과는 별개로 담담하게 말했다.
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밝히는 건 그리 좋지 않을 수 있다.
괜히 호들갑 떨었다가, 예상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아 개망신당하는 것도 피하고 싶고.
“전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만들었긴 합니다만, 솔직히 너무 생소한 기계인지라 과연 전하의 뜻대로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따로 확인해보도록 하지.”
보는 눈이 많다.
어차피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만약 내가 ‘오오! 이렇게 굉장한 기계를 발명하다니!’라고 감탄하면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게 될 터.
최소한 선점 효과를 확실히 잡을 때까진 조용히 있는 게 좋다.
“그리고 그쪽은…….”
“중산왕의 명을 받들어 용왕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류큐를 말하는 것이다.
나도 왜구 토벌 당시에 들은 사실인데, 류큐는 지금 통일 왕국이 아니라고 한다.
중산국과 북산국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원래는 남산국도 있었는데, 12년 전 중산국에 의해 멸망했다.
남산국의 왕자는 조선에 망명했는데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들었다.
“그래. 북산국에서도 사신을 보냈구먼.”
“아국 왕께서는 전하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린다 하였사옵니다.”
북산국의 영토는 증산국보다 넓다.
하지만 토지가 거칠어 농사를 짓기 어렵다 들었다.
인구도 적고.
류큐의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얼마 안 가 중산국에 의해 통일될 것 같다.
그다음 일본에게 먹히겠지만.
정확히 언제 류큐가 일본에 먹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류큐의 거상이 이순신과 권율 장군에게 막대한 전쟁물자를 보급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볼 때, 200년은 더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류큐는 대만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이고, 그에 관한 사정을 들은 바 있네.”
류큐 왕국의 내전은 조선과 명나라에서도 유명하다.
그 영락제가 ‘작작 좀 싸워라.’라고 말할 정도로.
딱히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쟁이 격화되면 패잔병이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백성이 해적이 되어 명나라나 조선의 해안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관심은 없는데, 귀찮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오키나와섬이 600년 뒤에는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방파제가 된다니.
역사란 참 오묘한 것 같다.
알 박아 놓을 수만 있으면 600년 뒤에…… 중국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려나?
“미리 말하네만, 나는 중산국과 북산국의 싸움에 관심이 없네. 오히려 시기가 좋지 않은 만큼 그대들도 당분간 자제하길 바라네.”
내 말에 중산국의 사신은 살짝 인상을 쓰고, 북산국의 사신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북산국이 어지간히 밀리고 있는 모양이다.
근데 내 말뜻은 그게 아닌데.
행간을 읽기 쉽도록 조금 더 풀어서 말해줘야겠다.
“다른 이들도 듣게. 우리는 좋든 싫든 대명의 책봉국일세.”
우리는 같은 운명이다.
“천자국에 근심이 있다면, 그 근심을 덜어주진 못할지언정 근심을 더 얹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명나라는 지금 혼란스러워서 너희에게 간섭할 여력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안에서 할 일을 하게나.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내부 사정 정리하고 조용히 힘을 키워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그대들이 그대들의 군주를 잘 보필하고 해야 할 일을 한다면, 하늘도 감동하지 않겠는가.”
지금 힘을 키워놓으면 나중에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언뜻 듣기엔 하늘이란 천자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당연히 아니지만, 중의적으로 해석되도록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말하고 보니 괜히 홍무제가 문자의 옥으로 탄압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무제가 한 건 대부분 억지 트집이었긴 하지만, 실제로 한자를 가지고 장난질 치며 황제를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용도로도 쓰는 예도 상당히 많았으니까.
“잘들 알아들었는가?”
사신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럴 때 건문제 세력이 제대로 날뛰어 준다면 더욱 일이 편할 텐데.
그렇게 내 생각대로만 세상이 돌아가진 않겠지.
***
사신들의 목적은 같았다.
무역에서 좀 더 잘 봐달라는 것.
아직 국교를 맺지도 않은 벵골 술탄국에서도 어떻게든 명나라와의 해상 무역을 트고 싶어 할 정도니, 이 시대 Made in China의 위엄은 가히 세계 최고라 하겠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목표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한발 건너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육지에서 국경을 접한 조선이나 이미 점령당한 대월의 경우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끝나고, 각 사신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제일 먼저 만난 독대를 허락한 이는 레 리.
같은 명나라 관리인 만큼 부담이 적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때는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도 그대가 대명의 관리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영웅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독립운동가가 되거나, 수호지의 양산박처럼 호걸들을 모으며 힘을 기를 줄 알았건만, 설마 공무원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강렬한 열정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을 마주하고 절망한 사회 초년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지난 2년간 많은 일이 있었지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대명이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호꾸이리가 전투 코끼리를 앞세웠는데, 대명의 부관이 겨우 두 발의 화살로 무력화하더군요.”
“겨우 두 발?”
“예. 한 발은 기수를, 다른 한 발은 코끼리의 코를 맞췄습니다. 코끼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대월군을 밟아 죽였고요.”
전투 코끼리는 나도 한타와디에서 상대해봐서 안다.
여러 대처법을 알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영 자신이 없어서 화약을 이용했고.
“대명의 군대는 세계 최강일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영락제는 한족 역사상 최강의 정복 군주.
황태손 주첨기가 황제가 되면 내·외정에서 한족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강자를 따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자네의 선택은 현명했네.”
“하지만…….”
레 리가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기가 너무 힘듭니다.”
느긋했던 목소리에 분노가 어렸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명군이 대월을 정복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
“대월의 역사서를 불태우는 일이었습니다.”
“자네의 예상이 맞았구먼.”
나는 레 리의 부탁으로 대월의 역사서를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에 관한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다음에는 황금과 비취옥 광산을 점령하고, 장인들을 보는 족족 붙잡아 명나라로 보내고 있습니다.”
황금은 천자의 금속.
비취옥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다.
대월에는 황금과 비취옥이 널려 있다고 하니, 눈 돌아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도 괜찮습니다. 승자의 권리죠. 하지만 남자들은 노예로 삼고, 여자들은 노리개로 삼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롭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역시 없네.”
선을 그었다.
악명 높은 동창과 금의위가 움직이는 시기다.
본토에서 떨어진 대만국이라 해도 안심할 수는 없다.
내가 베트남의 역사를 잘 안다면 비유를 통해서라도 한마디 해주겠는데.
베트남이 언제 독립하는지 잘 모르는 이상 쉽게 조언해줄 수는 없다.
“제가 대월의 독립을 꿈꾼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대월인들이 사람 취급만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없네.”
“……네?”
“패전국의 국민에게 인권이 어디 있겠는가.”
“예? 인권?”
“대충 알아듣게나.”
내가 냉정히 선을 그었다는 걸 느꼈는지, 레 리는 손을 저었다.
“용왕 전하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박학다식한 전하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지금의 대월 같은 일을 겪은 나라는 어떻게 대처한 지를요.”
멀리 갈 것도 없다.
원나라에 정복된 고려가 똑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동아시아 특수한 체제’라는 조공·책봉은 엄밀히 말해 식민지처럼 착취되는 시스템이 아니다.
하지만 원나라는 달랐다.
그야말로 악독하게 뜯어갔으니까.
세계 역사학자들이 원나라 영토를 그릴 때, 한반도까지 정복한 것처럼 표기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원 간섭기’라고 표현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는 레 리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지.
절대 이길 수 없는 제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독립을 쟁취한 영웅의 일대기를 듣고 싶은 것일 테니까.
“음…….”
떠오르는 나라가 있긴 했다.
바로 베트남.
프랑스를 상대로 멋지게 독립에 성공했지.
그때 호찌민이 했던 말이 멋있다.
‘우리가 프랑스인 한 명을 죽일 때, 당신들은 베트남인 열 명을 죽이겠지. 하지만 이 땅에서 먼저 사라지는 쪽(혹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일 것이다.’
문제는 이걸 말해줄 수가 없다는 거지.
미래의 일을 각색하려면 필연적으로 거짓말이 들어가게 되는데, 레 리처럼 똑똑한 청년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하긴. 신화라면 모를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겠지요.”
아. 그러네.
신화를 말해주면 되겠다.
“있네.”
“정말입니까?”
“대진국. 그러니까 로마 시대에 있었던 일일세.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당시 로마 제국은 서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지배하던 최강의 대제국이었네.”
나는 그에게 아서왕 일대기를 말해주었다.
사실 아서왕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켈트 신화와 고대의 영웅 설화, 그리고 여러 군인들의 활약이 짜깁기 된 가공의 영웅이라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실제 역사서에는 아서라는 이름은 등장하지도 않을뿐더러, 원탁의 기사들도 그 원전이 되는 영웅 설화가 각각 다 존재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레 리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줄 희망.
“……그렇게 아서 왕은 로마로부터 브리튼을 해방하게 되지. 내가 읽은 기록에서는 로마의 총독과 싸웠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세금징수관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네.”
“세금 걷으러 온 사람과 싸웠다고 하면 위엄이 살지 않을 테니까요.”
레 리는 무척 재미있어하다가, 세금징수관 이야기를 듣자 무척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는 세금징수관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지만 말입니다. 아서 왕은 그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으로 돌아오고 나니, 조카 모드레드가 왕비 귀네비어와 불륜을 하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네. 그 반란은 진압했지만 회생 불가의 상처를 입게 되지.”
“저런…….”
“그래서 아득히 머나먼 곳에 있다는 아발론이라는 이상향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해. 언젠가는 부활하여 나라를 구원해준다고 하든가. 그래서 미래에 부활할 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고 하지.”
나중에는 불륜을 일으킨 기사가 모드레드가 아니라 랜슬럿으로 바뀐다고 들었다.
랜슬럿은 가장 나중에 추가된 기사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프랑스에서 재창작한 소설에 등장했다고 알고 있다.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솔직히 내가 말한 아서왕 전설이 제대로 된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흥미 깊습니다. 특히 엑스칼리버라는 검을 뽑은 자가 왕이 된다는 구절은 매우 신비롭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군요.”
“지금 브리튼에 가보면, 유명 영주 가문마다 엑스칼리버 한 자루씩은 다 있다고 하더군.”
“하하하. 저라고 해도 그럴 것 같습니다.”
레 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저에게 엑스칼리버를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네가 베트남의 아서왕이라도 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