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63
162화 조선의 선택 (4)
“에…… 그러니까…… 음…….”
석피는 오래간만에 본가로 돌아온 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본가는 조금 널찍하긴 해도 산등성이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도인 한성에서도 꽤 괜찮은 터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고 있었다.
그 돈은 전부 석피에게서 나온 것이다.
모시는 주군인 강해인 전하께서 녹봉을 확실하게 챙겨주셨고, 석피는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어서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으니까.
그 덕에 기회가 생길 때면 조선으로 향하는 상인에게 부탁해 본가로 돈을 송금했다.
불만도 없다.
그동안 고생하신 부모님이 호의호식하겠다는데, 오히려 더 보태드릴 용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다.
“뭘 망설이우? 오빠 새…… 오라버님께서 훌륭하시니 이런 혼담이 들어온 게 아니겠습니까.”
“어디서 비음을 내냐. 멧돼지 같은 게.”
“호호호.”
석피의 여동생, 춘자는 장난처럼 받아넘겼지만, 속은 열불이 끓는 모양이었다.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새언니 앞이라고 잠깐 띄워졌더니 똥오줌 못 가리네.’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석피 너. 동생에게 무슨 악담이냐! 새애기 보는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
여동생 춘자의 반응은 듣지 못했는지, 석피의 아버지는 곧바로 석피에게 호통을 쳤다.
“새애기라니요. 저는 동의한 적 없습니다!”
석피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혼처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보통 혼례는 부모가 정해준다고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가정일 때 이야기다.
석피의 경우 조선은 아니지만 대만국으로부터 정식 관직을 받았다.
그것도 왜구와 해적을 제압하고, 바다를 제패했다고 일컬어지는 용왕의 최측근이다.
이 정도면 새로이 가문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다.
애초에 석피의 가문은 조선에서 가장 천하다고 여겨지는 백정이기에 가문이라고 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집안에서 발언권은 석피가 압도적으로 위다.
부모라고 해도 이 정도로 발언권의 차이가 난다면 함부로 혼인을 강요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이 못마땅해서 그러느냐. 새애기의 가문은 우리가 보기엔 황송할 정도로 격이 높고, 새애기도 저리 아름답고 현명한데! 절을 하고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쯧쯧.”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전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요. 저렇게 귀한 가문의 규수가 대체 뭐 볼 거 있다고 저에게 시집을 옵니까?”
“이 혼례는 주상 전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조용히 부자간의 싸움을 보던 여인은 다소곳하게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께서요?”
“낭군님의 가문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조선의 건국 때부터 크게 힘을 보탠 명가이며, 주상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도 큰 공을 세운 은인이라고요.”
“그렇다고 들은 건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지금은 평범한 백정 가문입니다. 귀한 집 아가씨께서 오실 곳이 못 됩니다.”
“그 역시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는 그간의 공을 인정하여 다시 공신을 책록하실 생각이라 들었습니다. 낭군님의 가문은 조선의 공신이 될 것입니다.”
석피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비슷한 약속은 있었다.
강해인 전하를 잘 모시면, 무관으로 임명해주신다고.
이는 양반 중 무반의 위치에 오른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공신이 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양반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공신에 책록되며, 그야말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니까.
“낭군님의 가문이 공신 가문이 되지 않더라도, 낭군님은 이미 공신이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만국의 개국공신으로요. 오히려 소녀의 가문이 부족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반박하려다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분명 할 말은 많은데 이게 문장으로, 언어로 변환이 안 된다고 할까.
새삼 강해인이 얼마나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는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는 배를 타는 사람입니다. 한번 바다로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혼인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진심이었다.
실제로 강해인도 늘 이런 걱정을 했으니까.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상호봉시라 하였습니다. 남자가 큰 뜻을 세웠는데 어찌 아녀자가 방해하겠습니까.”
상호봉시는 옛 중국에서 남아가 태어났을 때,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살을 천지사방에 쏘아 큰 뜻을 이루기를 빌었던 풍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에 와서 상호봉시는 ‘남자가 큰 뜻을 세우다.’라는 의미가 되어 화살처럼 뒤도 보지 말고 나아가라는 뜻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가 그 큰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내조를 잘해야 한다는 의미까지 내포되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큰 뜻을 이루소서. 바깥 일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집안의 일은 부족하나마 제가 잘 단속하겠나이다.”
말투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데, 눈빛은 매우 예리하다.
상대를 띄워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리는 확실하게 챙긴다.
석피는 직감했다.
이 여인과 혼인하면 집안에서는 절대 기를 펴지 못할 것이라고.
“한씨 가문의 여식이라고 하셨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역시…….”
“만약 낭군님께서 저를 거부하신다면, 저는 공녀로서 명나라에 끌려가게 됩니다.”
“예?”
“대명의 황제 폐하께서 공녀를 요구하신 직후, 조선 양반가에는 금혼령이 내려졌습니다. 공녀로 선발하기 위함이지요.”
“금혼령이 내려진 상태인데 어떻게 혼담을 주신 것입니까?”
“이 혼담은 명 황제 폐하께서 공녀 요구를 하기 전에 오가던 것이니까요. 금혼령이라고 해도, 이미 오간 혼담까지는 인정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만국은 이제 시작하는 신생국입니다. 명나라 남경과는 비교도 안 되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삶이 더 부귀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편한 것보다 마음이 편한 것이 우선입니다.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한들, 독이 있을까 두려워 제대로 삼키지도 못할 진데 어찌 그것이 부귀한 삶이라 하겠습니까.”
한씨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차라리 거친 밥에 간장 한 종지와 함께 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랑하는 임과 함께라면.’이라고 덧붙였다.
“아우! 답답해. 뭘 그리 망설이우? 남자답게 확실히 결정하소. 그래 우유부단해서 큰일을 할 수 있겄소?”
“너나 빨리 신랑감 찾아라. 널 데려갈 남자가 있을 때 얘기겠지만.”
“그러려고.”
“응?”
“아바이, 어무이 허락받았소.”
“네가 진짜 혼인한다고? 상대는 누구야? 미리 가서 사죄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뭔 소리야! 나도 배 탄다고.”
“……뭐?”
“네가 편지를 보냈잖아. 용왕 전하께서 날 원하신다고.”
“아…… 맞다.”
이소군이나 여성 간부들을 밀착 경호하기 위해 훌륭한 여성 무사가 필요하다.
무예가 뛰어난 여성은 꽤 있지만, 밀착 경호를 맡길 정도로 신뢰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석피의 여동생에게 맡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배 타는 거 생각보다 어렵다. 경호도 어렵고. 네가 잘 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니는 니 일이나 확실하게 결정하그라.”
석피는 한숨을 푹 쉬고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한씨 여인을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이렇게 격 없는 집안입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석피의 질문에 한씨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자못 아름다운지라 석피는 본인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솔직하게 서로를 걱정해주는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 남동생은 누나와 여동생을 팔…… 호호호. 아닙니다. 때로는 깍듯한 예의보다 격 없는 순수가 더욱 값진 법이지요.”
어차피 계산은 할 줄 모른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자.
석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 조금 전에 환하게 웃었던 여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자태는 여태까지 봤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부, 부족한 몸입니다만,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한씨 여인은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부족한 몸입니다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정화가 직접 공녀를 선발하겠다고 공언한 지 3일이 지난 시점.
칙사단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우리의 딸, 누나, 여동생을 데려가려고 한다!”
“더러운 놈들. 원나라 때 얼마나 끌고 갔는데 그걸 또 하겠다고?”
“지금은 양반가만 데려간다고 하겠지만, 나중엔 노총각들 혼인시키겠다고 백성들도 죄다 끌고 가겠지!”
“되놈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어디 나부터 데려가 봐라!”
칙사단이 머무는 태평관.
그 앞에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아침부터 시위를 시작했다.
칙사단은 태평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는 돌 맞을 것 같아서.
듣자 하니 조선의 백성들은 투석 놀이를 자주 해서 돌팔매질이 그렇게 정확하고 아프다든가.
“대체 어쩌다가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건가.”
정화는 곧바로 조선의 관리를 불러 이 일을 따졌다.
“그, 그것이 양반가에 금혼령을 내리고, 직접 공녀를 선발할 테니 준비하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만…….”
병조 판서 윤저는 정화의 말에 여전히 심약한 모습으로 움찔하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 일이 유생들에게 퍼지고, 유생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일이 커져 버렸습니다.”
“당장 무력으로라도 해산시키게.”
“그, 그것이…… 병사들도 무척 분노하고 있는지라 자칫하면 민란과 군란이 함께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정치력 만렙인 킬방원 시대에 군란이 일어난다?
킬방원을 알고, 원 역사를 아는 나는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화의 시점으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선은 유학의 통치 원리에 따라 왕은 병권을 갖지 못하고 신하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지휘하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병권을 쥔 자리인 병조 판서가 이렇게 심약한 인간이다.
병조 판서만 보면 조선의 군대는 조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고, 병조에서는 이를 제대로 관리 못 해 쩔쩔맬 것 같다.
“소, 송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예?”
“그대의 잘못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사, 사직을…….”
“도망치면 끝인가?”
정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로 절제하고 차분하게 따지는 모습이 더 두렵게 다가왔다.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시, 시간을 주시면 워, 원상태로 해놓겠습니다.”
“시간이 없네.”
“그, 그렇지만 이, 이대로면 너, 너무 위험합니다. 미, 민심이 너무 흉흉하여 자칫 대규모 민란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대단하다.
저렇게 심약해 보이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할 말은 다 하네.
실은 심약한 사람이 아니라,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게 아닐까.
“조,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대명과 조선의 우애를 위해서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3일.”
“예?”
“3일 내로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리게.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에서 수작을 부린 것으로 간주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를 걸세.”
정화의 최후통첩에,
“며, 명심하겠습니다.”
병조 판서 윤저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정화는 보지 못했겠지만, 옆에 있는 나는 똑똑히 보았다.
병조 판서 윤저의 입가에 이유 모를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