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67
266화 떠나는 자, 남는 자 (2)
대체 석피의 검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맘루크의 아사신들도 딱히 ‘우리는 검의 주인을 따른다!’ 같은 마음은 없는 것 같은데.
“석피의 검은 내 것이 아니야. 따라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래도 전하께서 한마디 말씀해주시면…….”
“나는 너희의 권리를 존중한다. 그 권리에는 재산권 역시 포함되지. 함부로 부하의 재산을 빼앗는 주군을 어떻게 믿겠냐?”
“…….”
“석피의 검이 필요하다면, 직접 석피를 설득해서 얻어내도록 해.”
석피는 항상 내 곁에 있지만, 지금은 배 위라서 잠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남고 싶다는 제안은…….”
솔직히 불안했다.
오스만에 강한 자부심이 있는 녀석이라, 메흐메트를 도와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아서.
전에 사고 친 것도 있고.
“네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
애초에 그것이 우리의 계약이었다.
무함마드는 나를 섬기고.
나는 무함마드가 고향에 갈 때까지 보살펴 주고.
계약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전하.”
“왜?”
“나는 전하를 배신하려는 게 아닙니다. 메흐메트 술탄도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전하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부는 됐고.”
“진심이에요. 그러니 내가 오스만에 붙는다거나, 전하께서 애써 구축해놓은 기독교와의 유대도 끊을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대로 된다면 종교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수천 년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극단적인 사건들.
언제나 누군가는 말리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곧 느끼게 될 거야. 조직은 지도자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큰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해도 집단 광기 앞에서는 무력할 때가 많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괴롭고 힘들 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떠오르는 건 미얀마다.
군부 독재를 종식하고, 미얀마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길 원했던 아웅산 수 치 여사.
그녀는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미얀마는 10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사는 다민족 국가.
개중에는 대영제국이 미얀마를 편하게 통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밀어준 소수민족, 로힝야족이 있었다.
그 탓에 로힝야족은 미얀마 내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민족으로 여겨졌다.
미얀마 군부는 이러한 민족적 감정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로힝야족을 폭력으로 탄압하고 학살했다.
여기서 만약 군부를 비난하면 미얀마 내의 지지를 잃게 된다.
반대로 탄압과 학살을 방조하면 국제 사회의 지지를 잃게 된다.
아웅산 수 치 여사는 국내의 지지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를 방조하게 되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잃어버린다.
그러자 국제 사회의 견제로 잠시 물러났던 미얀마 군부는 곧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 수 치 여사를 감금하게 되니…….
미얀마 민주주의의 꿈은 불과 5년 만에 무너지게 되었다.
외국인인 내가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할 일은 아니지만, 미얀마는 국민들의 민족적 ‘감정’으로 인해 자신과 후손들에게 불운한 미래를 가져온 셈이다.
“만약 어떻게 하기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정말 늦은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응할 생각을 하지 말고, 대비할 생각을 해.”
럴커 가시가 날아올 때 피하는 건 임요환이나 하는 거고.
“특히 잘 나갈 때일수록, 내가 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비를 해.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기 마련이고, 영원히 잘 나가는 조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러하고.
“또, 집단 광기가 발현되면 그에 휩쓸리기 쉽다. 그 광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평소에 마음속 기준을 잘 세워놓아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됐다. 보선 두 척을 남겨줄 테니까, 다시 볼 날까지 몸 건강히 잘 있어라. 엔히크 왕자랑도 잘 협의하고.”
마음 같아서는 넉넉하게 남겨주고 싶지만, 가져가야 할 화물이 있어서 두 척을 남겨주는 게 최대다.
사실 이조차도 무리한 것이다.
“넵!”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무함마드는 힘차게 대답했다.
***
우리 함대는 엔히크 왕자, 베아트리스, 무함마드를 각각 리스보아에 내려주고 곧바로 귀국 항해를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앙 1세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또 일정이 질질 끌릴까 봐 그러지 못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유럽인들은 연회를 너무 좋아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체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초대받아야 하는 처지에선 무척 성가시다.
가자니 귀찮고, 안 가자니 모욕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엔히크 왕자가 주앙 1세에게 잘 말해주기로 했으니 그걸 믿기로 했다.
“드디어 가는군요.”
석피가 감회에 젖은 듯, 멀어져 가는 리스보아 항구를 바라보았다.
“벌써 1년이 흘렀네.”
놀랍다.
유럽에 1년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다.
몇 나라 방문하지도 않았는데 1년이 후딱 지나간 게 놀랍다.
“그래도 지금 가면 덥지는 않겠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검은 무함마드에게 준 거야?”
“간곡히 부탁하기에 빌려주었습니다.”
“그 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합니다만, 동료의 목숨이 달린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귀하지는 않습니다.”
대체 뭐라고 구슬렸기에…….
“다행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오스만에서 여러 검을 사놨어. 그중에 마음에 드는 거로 써.”
오스만에는 다마스쿠스 강으로 만들어진 명검이 많다.
현대의 시리아 지역인 맘루크 술탄국 영토에서 만들어져 오스만에 판매된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직원에게 좋은 장비를 구해주는 건 당연한 거지.
그래야 만약의 사태 때 내 목숨을 더 잘 구해줄 테니까.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아룬델 백작 부인 말입니다. 전하를 보는 눈이 참 예사롭지 않았습니다만…….”
베아트리스를 말하는 것이다.
리스보아 항구에서 헤어질 때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망부석이 되기 직전의 아내 같은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나한테 왜 저러는 거지?”
“첫눈에 반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내가 잘생겼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사람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니까요. 제 아내도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생겼다고 합니다.”
“…….”
석피는 잘생긴 게 맞다.
현대인들이 본다고 해도 백이면 백 잘생겼다고 할 거다.
……설마 날 기만하는 건가?
누가 봐도 미남이 ‘저는 평범해요. 아웃사이더이기도 하고요.’라고 말하는데, 그 아래 자막으로 ‘고백받은 횟수 20회’라고 쓰여있는 걸 본 기분이다.
좋겠다.
나도 저렇게 외모로 기만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런데 이대로 바로 귀국하는 겁니까?”
“그러면?”
“그 유대인인가 하는 이들을 한번 둘러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 걔들은 알아서 잘 살 거야.”
근본 그 자체의 문명인 이집트도, 모두가 선망하는 로마도,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교회도, 히틀러 같은 미친놈이 난리를 쳐도 살아남은 강인한 민족이다.
이 정도는 극복하고도 남는다.
“필요한 건 다 건네줬기도 하고.”
섬에 가둬두고 나 몰라라 한 게 아니다.
섬을 개척하기 위한 도구와 식량, 그리고 유럽에서 산 큰 배도 넘겨주었다.
“그래도…….”
“괜찮다니까. 다 생각이 있어.”
현재 유대인들은 마데이라섬과 아소르스 제도에 골고루 퍼뜨려 놓았다.
지금은 무인도지만, 섬 자체가 꽤 기름지고 괜찮은 땅이다.
유대인들이 발전시켜놓으면, 여기를 기점으로 아메리카도 탐험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신천지로 안내하겠지.
농담이지만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싫어한다고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석유가 흐르는 땅이 아니라.
“이만하면 됐나? 뭐 잊어버린 거 없지?”
잊어버린 게 있다면 지금 떠올려야 한다.
나중에는 떠올려도 찾으러 가기 어렵다.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후우…….”
리스보아 항구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스르륵 긴장이 풀렸다.
“많은 일이 있었지.”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미래의 흐름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미래에 벌어질 비극을 막고, 정당하게 이권을 쟁취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비록 나의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얻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한 노력들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피야.”
“예. 전하.”
“나는 잘한 걸까?”
“식견이 부족하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전하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못 했거나,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석피는 환하게 웃으며 드넓게 펼쳐진 대서양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꼭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냥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즐거웠어?”
“세상에 이렇게 새로운 것이 많고, 이렇게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 때마다 무척 즐거웠습니다. 만약 조선에만 있었다면 이런 세상은 전혀 모르고 살았겠지요.”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그런 의미에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나에게?”
“물론 전하께 받은 은혜야 헤아릴 수 없지요.”
“그럼 누구에게?”
“이 대륙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임에도 무척 친절하게 대해줬으니까요.”
“안 친절한 사람도 많았잖아.”
친절하기는커녕 칼을 들이대는 강도부터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간신배도 많았는데.
“그런 사람은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만 생각합니다. 오히려 말도 안 통하는 제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지 걱정됩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타인을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해야 한다.
“석피야. 너는…….”
“예?”
“아니다.”
인종도 다르고, 재능도 다르지만.
가끔은 석피가 공자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뭔가 바라는 건 없어? 일생을 걸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거라든가. 사소한 욕망이라든가.”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군요. 그저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기에 이웃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많습니다.”
석피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아래 감춰진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푸른 눈에 이국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가축이나 사냥감을 도축하는 천민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사람 대우도 못 받았을 테니까.
조선 관리였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조정에서는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
승마술이 뛰어난 자는 조선 최고의 정예병인 기병으로 채용도 하고.
천문학이 능통한 자는 일관으로 채용도 하고.
또, 이 시대에는 백성을 백정이라 불렀는데, 사회적 차별이 심해지니까 이들도 백정이라 부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을 백성이라 하고, 백정은 고기를 도축하는 천민을 가르치는 단어로 바꿔 부르더라.
현대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차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야.”
석피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 사회는 퇴보할 테니까. 그리고 욕망은 남들과 다르다는 차별과 우월 의식에서 나오지.”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까요?”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아. 그건 확실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완화할 방법은 없습니까?”
“있지. 역설적으로 이 해답 역시도 욕망이라 생각해. 욕망을 위해서라면 철천지원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나치 독일을 쓰러뜨리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손을 잡고.
일본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는 일도 일어나니까.
“이 점이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욕망 때문에 부모나 은인을 배신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 점도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지.”
배신은 인간의 전유물이라고도 하지 않은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같아. 협력하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도록, 반대로 배신하면 잃는 게 많아지도록 바꿔나가는 거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론이다.
죄수의 딜레마.
“석피야.”
“예.”
“귀국하게 되면 할 일은 더욱 많아질 거야.”
협력을 구하는 것이 아닌.
배신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 방법은 당연히 힘.
억제력이다.
“전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