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80
279화 종횡 (1)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전하. 돌아오셨습니까.”
이소군이 답했다.
일단 의문 하나는 해결했네.
어떻게 의사소통했는지.
이소군이 통역해주었나 보다.
그녀는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조선말은 물론, 영어와 라틴어도 구사할 줄 아니까.
“왜 조선의 상왕과 헨리 왕자가 격구를 하고 있어?”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상왕 전하께서 직접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 걸 확인한 상왕 전하께서는 전하께 하실 말씀이 있다며 잠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집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고, 헨리 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어. 근데 왜 갑자기 격구?”
“상왕 전하께서는 헨리 왕자의 외모에 큰 호감을 보이셨습니다.”
“Ang?”
“특히 큰 키가 마음에 드셨다고 하시더군요. 다부진 몸도 그렇고, 천생 무인 같다며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아. 그런 호감이 아니었구나.
근데 조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개방적인 나라였지?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는 않다.
현재 조선 궁궐에 중동의 천문학자가 천문 관리로 일하고 있으니까.
의외로 한반도인들은 외국인에 굉장히 관대했다.
온달도 외국인이라 추정되고, 허황옥도 인도인, 처용도 어딘가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지 않은가.
벨테브레도 조선으로 귀화하여 박연으로 개명하고 관직을 받았을 정도니까.
단, 우리 문화를 존중하고 귀화했을 때만 잘 대우 받았다.
벨테브레 다음에 온 하멜은 귀화를 거부했기에 온갖 고난을 겪다가 겨우 탈출했지.
“자! 받게나!”
정종 이방과가 채를 휘둘렀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헨리 왕자에게 향했다.
헨리 왕자는 이를 가볍게 받아서 상대의 문전에 넣었다.
“훌륭하구먼!”
“와아아아!”
헨리 왕자의 능숙한 모습에 이방과가 감탄하고, 상대편 격수들도 감탄하며 환호했다.
“더 놀고 싶지만, 집주인이 왔네. 그려.”
“예하!”
이방과가 나를 가리키자 헨리 왕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야생 호랑이를 길들인 느낌이다.
“이거 재밌군요.”
“능숙하던데?”
“잉글랜드에도 있어요. 폴로라고. 채가 다르긴 하지만요.”
“오호.”
격구는 기마술, 특히 기마 궁술을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잉글랜드에 궁기병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지만, 승마 자체가 귀족 스포츠인만큼 격구와 비슷한 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랜만일세.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내 덕이랄게 있는가. 하하하.”
이방과는 나를 슬쩍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조선과의 협상이 잘 안 된 모양이야.”
“그리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내 동생이긴 하지만 주상께서는 참 쉽지 않은 상대이긴 하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킬방원의 정치력은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도 원탑인데.
“날이 춥습니다. 일단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으로 향하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정종 이방과가 왜 나를 찾아왔을까.
그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개인적으로 나를 만나는 건 정치적으로 그리 좋지 않은데 말이다.
“혹시 구라파에서 좋은 술을 가져오지 않았나?”
“가져왔습니다. 대접해드리지요.”
“하하하. 좋군. 좋아. 역시 추운 날에는 격구와 술이 최고지.”
저 태평한 표정을 보면 딱히 깊은 속내는 없을 것 같지만.
***
정종 이방과와 헨리 왕자를 내 방으로 안내했다.
“뜨끈하구먼. 이대로 누워 등을 지지며 자고 싶구먼.”
“그러셔도 됩니다.”
“농담일세. 그런데 양반이 이렇게 온돌을 사용해도 되나?”
“저는 양반이 아니라 왕입니다만.”
“아하하. 우문현답일세.”
뭐가 그리 좋은지 정종은 계속 웃기만 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전하. 술상을 봐왔습니다.”
“들어와.”
이소군이 안줏거리와 아이리시 위스키가 담긴 쟁반을 가져왔다.
조선 초기 한양에서 아일랜드산 위스키라…….
‘이보게 점소이. 까르보나라 한 사발 말아오게.’
‘하잇!’
이 실현된 느낌이었다.
“오호. 제수씨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구려.”
“과찬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구라파에선 어땠나?”
“뭐가요?”
“듣자 하니 구라파에는 엄청난 미녀가 많다던데.”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합니다. 아름다운 이가 있고, 평범한 이가 있고, 못생긴 이도 있지요.”
“자네가 데려왔다는 색목인은 엄청난 미녀라던데?”
그 말에 이소군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나를 믿어서 괜찮다더니, 사실은 안 괜찮은 모양이다.
“조선 국왕도 그렇고 다들 그 이야기뿐이군요.”
“맙소사. 주상도 노리고 있단 말인가.”
“안타까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달라고 하셔도 안 됩니다.”
킬방원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방과도 상당한 호색한이다.
근데 좀 미묘하다.
정실인 정안왕후와 금슬이 매우 좋고, 애처가로도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호색한이라 하는 이유는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첩만 7명에 15남 8녀를 두었다.
정작 정실인 정안왕후는 불임이라 적자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원 역사를 떠올려봐도 딱히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대단한 인물은 못 되는 모양이다.
“내가 이제 곧 환갑인데 무슨 또 첩을 들이겠나. 게다가 내 아내도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 태산일세.”
그런 것치고는 격구는 신나게 즐기는 것 같던데.
“그저 조카 녀석이 난리를 치기에 물어본 것일세.”
“조카라 하심은?”
“세자 저하 말일세. 대체 어쩌다가 그 어린 나이에 여색에 눈을 뜬 건지. 미녀에 관한 소문만 들리면 발정 난 개처럼…… 흠흠.”
이방과는 주변을 살폈다.
“후우. 다행히 사관이 이 방까지는 들어오지 않았구먼.”
“사관은 눈앞에 있습니다.”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내가 ‘발정 난 개’라고 말했다는 것은 적지 말아주게.”
“예. 알겠습니다.”
나도 사수였던 민인생을 본받아 ‘정종께서는 양녕대군을 발정 난 개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적지 말라고 하시었다.’라고 써야겠다.
그래야 신뢰성이 올라가지.
“아무튼, 세자 저하께서는 금발벽안 미녀의 소문을 듣자, 갑자기 조선과 대만의 우호를 위해 대만에 가보겠다며 난리를 쳤었다네.”
“…….”
“한차례 꾸중을 듣고 얌전해지긴 했지만, 저리도 여색을 탐해서야. 조선의 앞날이 걱정일세. 쯧쯧.”
“…….”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호색한인 거야 정종, 태종, 세종 전부 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정도면 집안 내력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물론 셋과 비교하면 양녕대군은 정도가 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위스키를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크으~”
이방과는 단번에 들이켰다.
“좋구나! 내 마음에 쏙 들어. 혹시 한 병 챙겨줄 수 있겠나?”
“그러지요.”
“그럼 두 병도 가능한가?”
“몇 병 가져오지 않아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쯧. 다음에 갈 때는 쩨쩨하게 몇 병 가져오지 말고 왕창 가져오게. 남아가 그리 배포가 작아서 어디에 쓰겠나?”
내가 왜 혼나고 있는 거지?
“혹시 동생이 여진족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는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킬방원이랑 둘이 짰나?
“이 사람아. 내가 평생을 전장에서 구르며 칼밥 먹던 사람일세.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정도는 아네.”
“그러고 보니 상왕 전하께서는 여진족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셨지요. 혹시 묘책이 있습니까?”
“없네.”
“아. 네.”
“하지만 귀한 술을 얻어 마셨으니 술값은 해야겠지.”
이방과는 다시 위스키를 원샷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 입맛에는 이 시대 위스키는 별로던데.
풍미가 많이 떨어져.
숙성도 덜 되었고, 향신료도 다양하게 넣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네도 한때는 조선의 관리였으니 이지란을 알겠지.”
“아!”
그러네.
이지란은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으로 여진족 출신이다.
그것도 여진족 족장의 아들.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내가 임관하기 1년 전에 죽었다.
그래서 난 그를 잘 모른다.
기록이나 들려오는 소문 정도만 안다고 할까.
“그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여전히 잘 살아있어.”
“장남은 요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서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킬방원과는 꽤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차남인 이화영이 살아있네. 원래는 삼군부와 의정부에 있었는데, 지금은 동북면으로 가 있지.”
동북면이면 함길도를 말한다.
현대의 함경도로 이성계의 고향.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개척하려고 했던 이유가 조선의 북벌을 완료하고 함흥평야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조선 왕조의 정치적 고향을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왜 동북면이 정치적 고향이냐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이쪽으로 이주하면서 나중에 이성계를 도와줄 군벌과 지지세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가문이 왜 동북면으로 이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관들의 술자리에서 들었던 야사에 의하면 기생과 관련된 트러블 때문이라고 한다.
……양녕대군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집안 내력이잖아.
“알다시피 주상께서는 사병을 철폐하셨네. 하지만 이화영만큼은 어느 정도 사병을 유지할 수 있지. 아비인 이지란의 공과 그가 스스로 세운 공 때문일세.”
“이화영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것 같습니다. 임오년에 2등 공신이 되지 않았습니까.”
5년 전 일이다.
내가 사관이 된 후 1년 뒤.
“그래. 그 녀석 말이야.”
“이화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북면에서 상당한 유지이지 않은가. 아버지의 연줄을 통해 여진족과도 어느 정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하고.”
“……아!”
“나는 정치에서 손을 뗐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네니 딱히 뭘 해줄 수 없겠지만, 이화영이라면 자네의 도움이 될 수도 있네. 그를 만나 보겠는가.”
“상황이 위태롭습니다. 누구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응당 그리해야겠지요.”
“시원해서 좋군. 대장부는 이래야지.”
그렇게 말하며 정종은 품속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이화영에게 보내는 소개장인 모양이다.
……근데 이걸 품고 격구를 했던 거야?
날씨가 추운 덕에 땀에 젖지는 않았지만, 땀 냄새가 푹푹 나는데.
“감사합니다.”
“술값일세.”
“오신 김에 이야기나 더 해주시지요. 술은 더 대접하겠습니다.”
“그래? 흠흠. 그럼 내가 갔던 기방 중 최고는…….”
“아니요. 동북면이나 여진족에 관한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어허. 이 사람이. 풍류가 없어.”
“풍류는 살아남고 나서 생각해도 됩니다.”
살아남고 나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여진족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나누어진다는 것. 그리고 여진이 1만이 넘으면 대적할 상대가 없다는 것. 이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여진족이 1만을 넘으면 상대할 수 없다.
이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평가한 내용이었다.
나중에 청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나라가 되는지를 생각하면.
또, 청나라의 모든 황제는 최소 중간은 간다는 걸 생각하면 거의 예언에 가까운 내용이다.
“흠. 그래. 말 그대로 대충만 알고 있구먼.”
“가르침을 주십시오.”
“조선 사람들이 여진족에 가진 가장 큰 편견은 바로 이것일세. 여진족은 유목 민족이다.”
“……아니었습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틀린 부분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목축을 주로 하지만, 몽골처럼 이동하면서 하지는 않네.”
“…….”
그랬어?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아예 이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때로는 정착하기도 한다는 말일세.”
“왜 그럴까요?”
“왜 그러긴. 농사를 지으니까.”
여진족이 농사를 짓는다고?
호랑이가 풀을 뜯어 먹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쌀농사는 못 짓지만, 의외로 이것저것 잘 심네. 땅과 기후가 별로라서 수확량이 많지는 않지만.”
“한 잔 더 하시지요.”
“고맙네.”
지금까지는 편하게 따라주었는데, 이번에는 공손하게 따랐다.
“그러니까 여진족은 반농반렵의 민족이라는 뜻입니까?”
“농사도 짓고, 목축도 하고, 수렵도 하고, 채집도 하고, 어업도 하고, 심지어 해적질도 하지.”
여진족 해적은 진짜 난생처음 듣는 말이다.
유목 민족이라 하면 평야에서는 거의 무적인 만큼, 수상전에는 약해야 밸런스가 맞는 게 아닌가.
정종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중원을 두 번이나 점령한 이민족은 여진족이 유일하다고.
요나라.
청나라.
이게 다 이런 배경이 있으니까 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여진족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네. 변화무쌍하고, 유연하며, 약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변화무쌍하다는 것과 유연하다를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변화무쌍이란…… 이거 참 설명하기 어렵구먼. 중원과 조선의 문명을 잘 받아들여서 이리저리 잘 맞게 쓴다고 할까.”
진화.
상대방의 장점을 잘 배운다는 것.
이는 진화에 능하다는 걸 의미한다.
“유연하다는 건 말 그대로야. 기병으로 왔다가 여차하면 보병으로 전환하고, 활도 잘 쏘고, 여차하면 수군으로도 활약할 수 있지.”
그동안은 전생의 영향으로 조선 변방에 살던 유목민.
나쁘게 말하면 오랑캐 정도로 인식했는데.
이 정도면 생각을 완전히 수정해야겠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길이 보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역시 자네야. 과연 자네가 어떤 결과를 낼지 심히 기대되는구먼.”
정종은 위스키를 아예 병째로 들이키더니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의 호탕하고 털털한 표정을 지운 채 진지하고 묵직하게 말했다.
“부디 조선을 잘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