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38
037화 평화로운 세계는 없다 (4)
“듣기론 대인께서는 기이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을 가졌다 들었습니다.”
아 진짜.
이거 언제까지 들어먹는 거야.
영락제의 한마디가 그렇게 큰가.
“또한,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다 들었습니다.”
이건 또 언제 퍼졌다니.
“사람이 어찌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헛소문입니다.”
“대인을 보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미래는 모르겠으나, 앞날을 보는 안목은 확실하시다고요.”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날 알아보는 걸 보니까, 레 리도 나중에 엄청난 위인이 될 사람인가?
다시 보니 왕이 될 상인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네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려주냐.
“대인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금과옥조로 여기고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대인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언젠가 성심을 다해 보답하겠습니다.”
레 리는 내가 미래를 알고 있는데, 가르침을 내려주기 망설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냥 몰라서 그런 건데.
이대로 입 다물어서 원한을 만들기보다는 일반론이라도 이야기해주자.
“어떤 걸 구하거나 살리고자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레 리 공자께서 대월의 백성을 위한다고 했으니, 대월인을 예로 말씀드리지요. 대월의 백성은 무엇을 가장 원할 것 같습니까?”
레 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가장 원하는 건 생존입니다.”
민주주의 혁명도.
공산주의 혁명도.
그 사상에 깊이 감명받아 혁명에 참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배고프니까.
내 가족이 굶어 죽을 판이니까.
그러니까 들고일어난 것뿐이다.
혁명 대부분은 소수의 사상가와 대다수의 궁핍하거나 핍박받는 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대월의 백성들에겐 지배자가 리 왕조든, 쩐 왕조든, 호 왕조든, 심지어 대명이 지배하더라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어찌 상관이 없겠습니까! 명나라가 대월을 지배하면 가혹한 통치를 시작할 텐데요!”
“대월인이 대월을 지배할 때는 가혹하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내용만 해도 대월 백성의 삶은 절대 평탄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레 리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만약 대월에서 계속 선정을 펼쳤다면, 적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서운 원나라도 막아냈던 민족이 하나로 단결하여 막아설 텐데, 대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국가의 위기를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한다.
내우가 없는데 외환이 크게 문제 된 적은 역사적으로 별로 없다.
“레 리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면 호 왕조는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대월을 정복해도 호 왕조보다 더 민심을 잃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공자께서 대월의 백성을 살리고자 한다면, 조용히 엎드린 채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고, 상대가 민심을 잃기를 기다리세요.”
“언제까지 그래야 합니까?”
“미래는 변하기에 확답드릴 수는 없지만, 최소 10년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10년······.”
“상황은 바뀌기 마련이니 정확히 10년은 아닙니다.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가 올 겁니다. 그때가 대략 10년 전후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영락제는 20년 뒤에 죽는다지만,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다.
남방을 안정시킨 후 곧바로 북원과 싸우러 가니까.
대월에만 지속해서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터.
게다가 영락제의 뒤를 잇는 홍희제와 선덕제는 대외 팽창보다는 내치를 중시하는 황제.
20년 뒤에는 조공·책봉으로 합의 볼 수도 있다.
“그때까지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10년 뒤를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대월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줄 준비를요. 대월을 정복하는 것보다 외교로 합의를 보는 게 더 낫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사실 조선이 조공국 중에 그나마 우대받는 이유는 고구려의 영향이 크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막아냈고, 그 여파로 수나라가 멸망했다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한반도를 먹어봐야 딱히 큰 이득도 없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공격하기엔 중원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굳이 정벌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대월도 마찬가지다.
숙이기는 하되,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주면 명나라를 협상 테이블 위로 끌고 올 수 있다.
그것이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대월은 이런 전략을 펼치기에 최적화된 입지를 지니고 있다.
당대 세계 최강 원나라와 미국을 이긴 제국의 무덤이니까.
“가장 큰 힘은 민심입니다. 다들 가혹한 통치를 할 때, 선정을 베풀고 민심을 얻으세요.”
그 바탕에는 게릴라 전이 있고, 게릴라 전은 국민이 도와줘야만 성립할 수 있는 전투 방법이다.
따라서 민심이 제일 중요하다.
“또한, 적이 강대하면 절대 정면에서 마주치지 마세요. 대월은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덥고 습한 기후는 전염병을 불러오며 우거진 수풀은 시야를 가리니까요.”
“대월의 지형을 정확히 알라는 뜻입니까?”
“예. 싸울 곳을 잘 선택한다면 천 명의 군대로 능히 십만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아. 좀 오버 했다.
천 명으로 십만은 어렵지.
알아서 잘 알아들었을 테니, 이제 적당히 마무리하자.
너무 상세하게 들어가면 괜히 배신과 내통으로 엮일 수도 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
나의 경우 꺾이지 않는 목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내가 왕이 될 상은 아니니까.
“하하······.”
레 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그리고 대장부처럼 크게 웃었다.
“역시 대인께 조언을 구하길 잘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예?”
“다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인의 말씀을 들으니 확신이 생기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다른 확신도 섰습니다.”
“어떤 확신이요?”
“안쪽의 서책을 봐주십시오.”
“음?”
레 리가 가리킨 것은 아까 주었던 언어교재가 든 상자.
와. 씨바.
상자 위쪽은 언어교재였지만 아래는 달랐다.
다름 아닌 대월의 역사서.
“명나라는 분명 대월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려 할 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역사로 증명되었습니다. 한 무제가 대월을 정복할 때도 그랬으며, 본인들 스스로가 그러지 않습니까.”
“스스로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전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하는 게 중원 왕조의 특징 아닙니까. 그런 중원이 대월의 역사를 남겨둘 리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그렇긴 하지만, 중국은 유독 심하긴 하지.
분서갱유에서 문자의 옥,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자체 문화 리셋은 어휴······.
사실 그거라도 없었으면, 조선과 한국은 더 힘들어질 뻔하긴 했다.
“그렇다 쳐도 대월의 역사서를 왜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조선의 사관은 기록을 매우 중시하며, 있는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들이 판단하게끔 한다 들었습니다.”
“사관의 자존심이니까요.”
심지어 영락제의 양물이 쇠해서 후궁들이 바람났다는 사실도 노빠꾸로 적어놓는 게 조선 사관이다.
정작 중국에서는 철저하게 말살되어 그런 기록이 없는데 말이다.
“대월의 역사를 조선으로 가져가 주십시오. 그리고 대월이 다시 일어서게 되면 그때의 황제에게 전해주세요.”
“다시 안 일어서면요?”
“그때는 대인께서 마음대로 처분하셔도 됩니다.”
“그러죠.”
“예?”
딱히 죄도 아니다.
아직 대월은 정복된 게 아니니까.
타국의 역사를 모으는 게 어찌 흠이 되겠는가.
내가 가지게 되면 조선에 국보를 남겨주는 셈이고.
그의 말대로 대월이 독립하게 되면 대월은 나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다.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건 없다.
“더 안쪽을 봐주시겠습니까?”
또 뭐가 있어?
“저는 레 리 공자가 큰일을 할 분이라 생각하여 호의를 베풀었는데, 공자는 저를 속이고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 무척 슬프군요.”
말은 슬프다고 했지만, 경고이기도 했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을 거라는 경고.
“제가 어찌 대인을 기만하겠습니까. 오해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까?”
“예?”
“저를 두 번이나 속이려 하셨는데 어찌 오해라 하십니까?”
레 리는 말없이 상자 제일 아래에 있는 서책을 꺼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이것은 제가 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문의 재산을 아낌없이 써서 모은 진짜 보물입니다.”
책에 그려진 것은 지도.
인도 동쪽부터 필리핀과 대만까지 그려진 동남아시아의 지도였다.
한 장으로 끝나는 지도가 아니다.
여러 권에 걸쳐 동남아시아 곳곳의 세밀한 지형을 그려 넣었으며, 시기에 따른 풍향, 기후, 특산물, 뱃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항로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실제 동남아시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내가 보더라도 상당히 정교한 지도.
말 그대로 보물이었다.
그런데 왜 미리 선물로 준 거지?
내가 먹고 입 씻었으면 어쩌려고?
“제가 대월에 호의가 없었다면 바다에 버리는 꼴이 아닙니까?”
“어차피 명나라군이 들어오면 파괴하거나 약탈해 갈 물건입니다.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지요.”
“하지만······.”
“게다가 제가 대인께 드리는 선물은 지도가 아닙니다.”
“네?”
“화인(華人)과 마찬가지로 대월인도 남해 곳곳에 뻗어 있습니다. 여기에 붉은 먹으로 표시된 곳을 가시면 제 가문의 은혜를 입은 이들에게 보답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 리는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취옥과 황금으로 장식된 명패.
레 가문의 인장이다.
“이것이 제가 대인께 드리는 진짜 선물입니다.”
“이걸 왜 저에게······.”
“대월은 명운을 잃었고, 곧 명나라군이 노도처럼 들이닥칠 터. 레 가문은 가산을 정리하여 화를 피하고자 합니다. 아버님께서 삼보 태감을 만나 뵙기를 청한 것도 그러한 이유지요.”
가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당장 가치가 없는 보물은 마땅한 인재에게 전해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때마침 내가 참파에 온 거고.
“다만 명나라군이 제 예상대로 대월의 백성을 핍박하고, 가혹한 통치를 일삼는다면······.”
레 리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결단코, 참지 않을 것입니다.”
힘내라.
진짜 남 일 같지 않네.
“떨어지는 칼날을 잡으려고 하지는 마세요.”
“예?”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바닥을 확인한 후에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주식처럼.
“명심하겠습니다. 언젠가 대월이 다시 일어서게 되면······.”
“그럴 날이 올 겁니다.”
“꼭 저를 찾아와주십시오. 그때는 더 넓은 천하를 논해봅시다.”
“그러지요.”
그렇게 레 리와의 만남은 끝났다.
다시금 생각하는데 역시 평화로운 세계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 보자.
국적과 민족을 가리지 않고.
왕과 신분이 없는.
하늘 밖의 하늘.
나라 밖의 나라.
창해(滄海)의 제국을.
***
레 리가 우리 장원에 다녀간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정화와 참파 조정 사이에 조율도 끝났는지 나보고 입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참파의 왕이 뛰어난 공을 세운 나에게 직접 포상을 내려주고 싶다나.
“인간적으로 가마나 인력거는 좀 주지.”
안 그래도 습하고, 비 온 지 얼마 안 돼서 길바닥이 진흙 천지다.
덕분에 내 신발은 물론, 버선까지도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이대로 왕궁에 들어가도 되려나 모르겠다.
왕궁으로 향하는 길.
갑자기 도로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남녀가 크게 말싸움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왜 싸우는 건지는 모른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니까.
짝!
남자가 화가 났는지 여자의 싸대기를 후려갈겼다.
그것도 전속력 풀 스윙으로.
싸대기를 제대로 맞은 여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와 씨. 목 돌아간 거 아닌가?”
말리려고 다가가려는데,
팍!
쓰러졌던 여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돌로 남자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마치 내가 쓰러졌던 것은 돌을 줍기 위함이었다는 것처럼.
“뭐냐 여기.”
이것이 전투 민족의 나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