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47
046화 나는 용왕이 아닙니다 (1)
“다들 고생했어. 특히 격수들이 고생했는데 제일 먼저 쉬도록. 다른 이들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예!”””
선단의 기함인 조(曹)와는 달리, 참파의 전함은 돛이 있긴 하되 노를 저어야 제대로 된 속력이 나온다.
밤에는 안전이 더 중요하므로 조(曹)의 속도를 조절하여 속도를 맞췄지만, 낮에는 미친 듯이 노를 저어 참파의 전함이 조의 속도를 맞춰야 했다.
“나리도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밤새 한잠도 안 주무셨지 않습니까.”
석피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선장은 제일 먼저 움직이고, 마지막에 쉰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어.”
물론 휴식도 중요하다.
체력을 온존해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잡무는 다 떠맡기는 거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거.”
강을 타고 항구로 다가오는 일련의 선단.
팔렘방은 크게 외항과 내항으로 나뉘어 있는데, 왕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도시는 내항에 있다.
외항과 내항은 므시 강이라는 강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이는 대충 서울에서 인천까지 거리다.
“딱 봐도 민족이 다양하군요.”
“마자파힛은 수백 개의 민족과 언어가 섞여 있다고 하지.”
가장 거대한 민족은 자와족이다.
명나라에서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합쳐서 조왜(爪哇)라고 부르는 이유가 자와를 음차했기 때문이다.
자바섬도 본래 이름은 자와(Jawa)섬이다.
그런데 자와가 영국식 발음으로 자바(Java)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겐 자바섬이 더 친숙하지.
따라서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팔렘방이 있는 수마트라섬은 조왜가 아니라 삼불제(三佛齊)라 해야 옳다.
삼불제는 스리위자야의 음차다.
다만 마자파힛 제국의 위세가 어찌나 강력했는지, 대부분은 뭉뚱그려서 조왜라 부른다.
“말이 통할까요?”
“저기 딱 봐도 화교가 있네.”
당연히 명나라말도 알겠지.
“흠······.”
“왜 그러십니까?”
“후손들을 위해서······ 아니야. 아무것도.”
후손들을 위해서 조선말을 세계 공용어로 만드는 작업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문법이 너무 달라서 어렵겠다 싶었다.
명나라에서도 견제 넣을 테고.
대신 킹갓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면 한글을 보급하는 작업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문자를 읽을 수 있으면 외국어 배우는 게 한결 편해지겠지.
한글 창제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말이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요?”
큰 배에서 내린 화교가 물었다.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팔렘방의 국왕 대리인 시진경이라 생각되었다.
“조선의 정5품 안정 사관 강해인, 제독 정화의 명을 받고 구항을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진경 대인 되십니까?”
“오오. 용왕께서 오셨구려. 내가 바로 삼불제의 왕 시진경이오.”
삼불제, 그러니까 스리위자야 왕국은 하얌 우룩 황제에 의해 30년 전에 멸망했다.
따라서 자칭이다.
“왕이셨군요. 제가 배움이 짧아 미처 몰랐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태클 걸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정치적인 내용은 정화에게 넘기자.
알아서 교통정리 해주겠지.
“아니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그런데 참으로 빨리 오셨구려.”
감사하는 마음은 보였지만, 살짝 비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 알겠는데, 이대로 넘어가면 선원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도 편했던 건 아니니까.
더욱이 남의 나라에 목숨 걸고 싸우러 왔는데, 대접이 박하면 싸우기 전에 지는 것과 같다.
“아유타야에서 작전을 위한 훈련과 보급, 그리고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서둘러 육 주야 만에 도착했으니 전하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보급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무기만 싣고 달렸다.
덕분에 이번 항해에는 교역품이 없다.
해적왕 토벌만 끝나봐라.
그동안 못 벌었던 것까지 싹싹 긁어모아 줄 테니까.
그나마 가장 비싼 화약 값은 정화가 지원해주므로 큰 적자는 아니다.
참파에서도 왕실 어용 상인이 차를 좋은 가격에 사주면서 꽤 벌었고.
다만 찝찝한 게 있는데······.
나는 용왕이 아니고, 내가 파는 차는 용왕차가 아니라고 구구절절 설명했는데도 아무도 안 믿더라.
‘암요. 그렇고 말고요. 대인은 용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용왕차가 아닌, 그냥 차는 팔아주실 거죠?”
대충 이런 느낌.
바가지까지는 아니지만, 꽤 높은 가격이었음에도 차는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살기 힘들다 어쩐다 해도 돈 많은 사람은 참 많은 것 같다.
조만간 예비 처가에 또 다녀와야 할 듯하다.
“육 주야? 아유타야에서 이곳까지는 열흘은 걸릴 터인데 어찌······.”
“열심히 달렸습니다.”
어허. 기업 비밀을 쉽게 알려고 해서야 쓰나.
“그러니 용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진경 옆에 있던 여인이 나섰다.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용왕을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삼불제의 왕의 차녀, 시이저라고 합니다.”
외모는 평범했다.
다만 그동안 봤던 여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었다.
갑옷 차림이라는 것과 살갗이 드러난 팔뚝에 잔근육이 가득하다는 점.
뭐라고 할까.
아시아판 여성 바이킹?
아마존 여전사?
스테로이드도 없는 이 시대의 여성이 저런 근육을 갖기 쉽지 않은데.
노력도 많이 했겠지만, 테스토스테론이 과하게 분비되는 체질 같다.
복근 역시 식스팩을 넘어 에잇 팩이 뚜렷하지 않을까.
“시이저라고요?”
“이상한 이름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익숙한 이름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저와 비슷한 이름이라니. 참 궁금하군요. 누군가요?”
“서역의 중심에는 대진국이 있고, 초대 황제의 성이 시저라고 들었습니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시저라는 성이 더 유명하지요.”
정확히는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지만, 옥타비아누스보다는 시저를 초대 황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습니까? 처음 들어보는군요.”
“구라파에서는 유명하다고 합니다. 어찌나 유명한지 황제의 칭호를 시저라고 하는 나라도 있다고 하더군요.”
독일 황제 카이저, 러시아 황제 짜르도 카이사르를 다르게 발음한 것이 아닌가.
“나도 안다. 시저는 황제가 맞다. 우리 오스만이 시저의 후예다.”
옆에서 무함마드가 맞장구쳤다.
“넌 조용히 해. 어디 윗사람 이야기하는데.”
“미안.”
이 녀석은 눈치가 빠른 편인데, 로마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사실 오스만은 누구보다 로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비잔틴을 부숴버린 게 아닐까.
“부하와 격의 없이 지내시는 걸 보니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녀석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끔 헛소리도 하니까요.”
오스만이 로마의 후예라니.
그런 헛소리가 어딨냐.
로마의 후예는 조선인데 말이야.
반박 시 게르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대책을 의논해야 하니까요.”
옆에 있던 청년이 끼어들었다.
“누구시죠?”
“삼불제 왕의 장남, 시제손입니다.”
분명 처음 볼 때만 해도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는데,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이 가라앉는 게 눈에 보였다.
무함마드가 ‘시저는 황제가 맞다.’라는 말이 나올 때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팍 썼고.
시제손, 시이저.
둘 사이 후계자 분쟁이라도 있나?
아무리 모계의 힘이 강한 동남아시아라도, 여왕이 즉위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기껏해야 대월의 독립 영웅인 쯩짝, 쯩니 자매.
그리고 마자파힛 3대 군주인 트리부와나 여왕.
“그러네.”
“예?”
“아닙니다.”
트리부와나 여왕의 본명은 디아 기타르자.
마자파힛 제국 초대 황제인 라덴 위자야의 장녀이자, 그 유명한 하얌 우룩 황제의 어머니다.
여왕은 아들이 장성하자 평화롭게 양위했다.
즉, 하얌 우룩 황제는 부계 혈통이 아니라 모계 혈통.
디아 기타르자에서 하얌 우룩에 이르기까지를 마자파힛 최고의 전성기라고 하는 만큼 그녀를 추앙하는 이도 많겠지.
물론 그 뒤에는 명재상 ‘가자 마다’의 조력이 컸다고 한다.
가자 마다는 능력도 매우 뛰어나고 충성심도 대단했다지만,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하얌 우룩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유배당했다가 고독사했다고.
중요한 건 시이저는 아마도 디아 기타르자를 롤 모델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불과 50여 년 전 사람인 만큼 기록도 많고, 구전도 많을 테니 충분히 개연성 있다.
다만 지금은 좀 참아줘라.
안 그래도 위험한 상황인데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진짜 큰일 난다.
해적왕을 소탕한 후에 지지든, 볶든 알아서 하시라.
***
우리는 곧바로 배를 타고 팔렘방의 왕궁으로 들어가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참파의 왕궁이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한 양식을 지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크기가 작았는데······.
팔렘방의 왕궁은 그보다 작았다.
게다가 곳곳에 불타버린 흔적이 있어, 이 땅이 그리 평화롭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왕궁 사정은 못 본 척 넘어가고 회의를 시작했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입니다.”
전장의 상황은 계속 변하는데, 이를 일일이 통역하거나 문자로 썼다간 적기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기본 전략을 정하고, 부대별로 알아서 움직이되, 깃발을 정해 몇 가지 변주를 준비함이 옳습니다.”
“그래야겠지요. 기본 전략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시진경은 왕이라 자칭한 것치고는 주도권을 전부 이쪽에 넘겼다.
능력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은데, 그동안 진조의에게 수없이 시달린 반작용인 듯했다.
아니면 납작 엎드려 자기 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명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속셈일지도 모르고.
“제독께서는 믈라카 해협 일대의 해적 본거지를 소탕한 후 해적의 뒤를 잡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개입니다.”
시진경을 비롯해 가신들을 둘러본 후 말했다.
“해적왕을 끌어내고, 버티는 것.”
“해적왕을 어찌 끌어냅니까?”
“알아서 올 겁니다.”
원정대와 해적의 싸움은 중무장한 보병 대 암살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상황에서 암살자가 유리하지만, 딱 하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 있다.
정면 승부.
정화의 전략은 해적왕에게 정면 승부를 강요하고 있었다.
아무리 해적이라도 안정적인 보급과 장물을 팔아넘길 시장이 없다면 조직이 유지될 수 없으니까.
“해적왕이라는 단어에서 모순이 드러납니다. 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갖췄지만, 역설적으로 거대해진 세력은 해적의 강점을 다 깎아버리니까요.”
게릴라군이나 레지스탕스처럼 숨을 수도 없다.
이는 민심이 중요한데, 해적에게 민심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또, 해적은 숨을 수 있어도 배는 숨길 수 없다.
배를 잃는 순간, 발 잘린 도적에 불과하다.
“도망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주변을 약탈하면서 해적들이 많은 마닐라 같은 곳으로 도망친다면······.”
“정규군이라면 가능하겠지요. 해적은 불가능합니다. 도적에게 의리라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마닐라 해적과 자리싸움 하기도 전에 지리멸렬할 겁니다.”
의리가 있을 수도 있다.
심복들에 한해서는.
하지만 1만에 달하는 해적들이 전부 의리로 똘똘 뭉쳤을 리는 없다.
이건 진짜 장담해도 좋다.
그 근거로 우리가 아유타야에서 출발하기 전.
더 정확히는 그 이전에 비자야에서 해군을 모을 때부터 전향자가 나오지 않았던가.
“해적왕의 군세는 생각보다 훈련도 잘되어 있고, 단합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물이 빠져야 누가 벌거벗은 채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지요.”
“예?”
“승리하고 있을 때는 내부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본인들조차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주식 용어다.
상승장일 때는 어떤 기업이 부실한지, 어떤 기업의 주가가 거품인지 알기 어렵다는 뜻.
하락장이 와야 기업의 진짜 가치가 드러난다고 한다.
“해적은 그 특성상 튼실할 수가 없습니다. 불순물이 가득한데 어찌 강철보다 단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은······.”
“공포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공포와 패악질로 억누르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해적왕이 도망치거나 패배하는 순간, 그 공포는 안개처럼 사라지겠지요.”
그러니.
온다.
반드시.
“반대로 남해의 거대 도시 팔렘방을 불태우고, 용왕으로 오해받는 제 목을 베면 그 공포를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살길이 여기에 있으니까.
“언제까지 버텨야 합니까?”
“약 20일 정도만 팔렘방을 지켜내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20일······.”
정화가 해적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알아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 망할 터.
실질적으론 20일이 아니라 10일 이내에 결판난다고 봐도 된다.
“이 점을 고려하여 방어 전술을 짜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