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05
104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이 암담한 전각 안으로 불었다. 귀 뒤로 넘겨 땋은 머리가 바람 덕에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설마하니 귀신을 부르는 사내의 발이 이국땅처럼 낯선 연정에 걸쳐 있는지 몰랐다.
“그 여인이 누구이옵니까.”
무릇 사람을 찾으려면 그 사람의 인적을 상세히 고해야 맞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대뜸 여인이라는 말만 던져 주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내의 내리깐 속눈썹 그늘이 반반한 콧잔등에 맺혔다. 저건 자신하지 못하는 자의 태도였다.
“기억이 나질 않아.”
그 말로 책임이 면하여지지 않는다. 목숨을 내건 거래였다. 목숨을 보증으로 쓴 거래에 명확하지 않은 단서를 쥐여 주다니. 한데 올바르지 않은 그의 거래가 심금을 울리는 건 저의 심지가 약해서일까. 아니면 사내가 목을 매는 게 고작해야 연정이라서일까.
“찾는 분도 기억나지 않는 여인을 어찌 찾을까요.”
“그 여인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는 것은 나의 업보이고 죄지만 너는 무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내의 목소리는 물살을 일구는 바다처럼 그윽하고 어려웠다. 거래에 토를 단다면,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면 여기서 물러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내가 손을 가지런히 내려둔 덕에 곱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하나 사내의 눈빛은 탁하며 빛이 들지 못한 색이었다. 사내의 시선이 저를 사주하듯 갈퀴고 있었다. 침묵이 지나간 후에 끝단이는 이 얼토당토않은 내기를 받아들였다.
“죽이는 것은 제가 할 수 없고.”
“…….”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볼 것이고요.”
당찬 각오를 밝혔으나 치마 밑에 둔 손은 어찌나 비 맞은 개처럼 떨리던지. 사내의 눈이 모순을 본 듯하다. 얼굴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한숨을 목침 삼은 사내는 다시금 반듯하게 누웠다. 잠에 빚진 사람처럼 무방비하게 곤한 얼굴이었다.
“한데요.”
뜨인 그의 눈은 잠기운 없이 들짐승인 양 형형했다. 천장을 응시하고 있으나 말마디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단서 하나를 안 주십니까.”
“단서.”
“적어도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다, 무얼 하다가 만난 여인이다…….”
무얼 하나라도 건져 보려고 휘두르는 끝단이의 말끝에 사내가 답을 걸어주었다.
“이 산.”
“이 산이요?”
“이 산이 곧 그 여인이니.”
“예에? 그뿐입니까?”
아는 것 없다더니 생생히 아는 눈이었다. 그는 돌풍에 실려온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눈언저리를 비볐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뿐이야.”
그는 삽시에 변했다. 비비던 손을 내려놓자마자 수십 리를 달려온 듯한 숨소리를 내었다. 팍 꺼져 버린 촛불인 양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숨의 기세가 어릴 적 열병에 걸린 동무의 것과 같았다. 잠든 모양새지만 실은 골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람인지라 길게 뻗어 누운 그의 몸이 안쓰럽다. 여기서 의원을 부를 수도 없으니 저 사내를 어쩌면 좋냐며 조마조마했다.
별다른 수 없이 곧게 누운 그의 몸 위로 들고 온 솜옷이나 덮어주었다. 채 반도 덮이지 않는 길이지만 꼼꼼히 펼쳤다. 오지랖 부리는 행위임에도 사내는 깨어나지 못했다. 눈가는 평화로우나 흐르는 땀을 보니 흉몽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끝단이는 물동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서둘렀으나 이 전각에는 도통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그나마 방이라고 쳐줄 수 있는 데가 보이긴 하지만 문고리에 궁궐 곳간 저리 가라 할 만큼 묵직한 쇄금이 달려 있었다. 갈 수 있는 데라곤 사내가 깔고 누운 이 방석 더미뿐이었다. 보다 보니 저 사내도 만만찮다. 대관절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 전각에서 귀신이나 부르면서 살게 되었을꼬.
빈 바닥서 잘 수 없는 끝단이는 사내의 앞에 앉아 수발이나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볕이 실하던 산에 비님이 오고 있었다. 토도토도 빗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사방을 비가 점령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무 계단까지 내려가 빗물의 양을 재고서 전각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아픈 사람 푹 자게 문은 닫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차였다. 거슬림 없이 문을 닫으려 하는데 뒤편서 물기 젖은 목소리가 났다.
“닫지 마.”
찬바람이 들지 않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한데 사내는 흐릿하게 뜬 눈으로 저를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저 실컷 내리는 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에 물린 사람처럼 찬바람 이는 시선 때문에 끝단이는 닫으려던 문을 놓쳤다.
한데 물러서며 그의 앞까지 찬찬히 걸어와 앉는 사이에 사내는 거짓처럼 잠잠히 잠들었다. 시끌시끌한 빗소리가 안정을 찾아주는 것일까. 사내의 식은땀을 닦아주려다가 말았다. 그것까지는 해줄 깜냥이 아닌 듯싶다.
살다 살다 이리 고운 사내는 귀 빠지고 처음 보았다. 감긴 사내의 눈이 초승달 모양이었다. 눈은 달님이고 입은 꽃님이다. 사내의 숨은 솔바람처럼 여리고 뺨은 꽃무릇처럼 붉었다. 만지고파 뻗어진 손가락 끝을 굽혔다. 추근대는 무뢰한도 아니고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여까지 걸어오느라 기력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끝단이는 아둔한 손등을 때리며 빈 바닥에 누웠다. 삐뚤게 누운 자세는 백자에 유약을 바르듯 신중히 고쳤다. 바르게 눕자마자 사내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상황을 헤아려보니 사내와 동침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저쪽이 귀신 부르는 요사한 것일지라도 사내는 사내였다.
“아유, 무슨…….”
괜한 부스럼일 것이다. 여인을 찾지 않으면 차라리 저를 죽여달라고 할 만큼 딴마음 드신 사내였다. 나라님 목을 가져오라든가 귀신 패거리와 싸워서 이기라든가. 그따위 무리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찾아다 주면 하늘이라도 가져다 바칠 것처럼 순정에 있어서 아주 바람직한 사내였다.
저렇게 곧이곧대로 연정을 말할 수 있는 사내가 상대를 잊어간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해서 상사병에 걸렸나.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깊이 파고들어서도 안 되었다.
말만 무당이지 굿조차 할 수 없는 저는 꼼수를 부려서라도 이겨야 하는 판이었다. 한데 저 사내를 동정하면 어쩔 텐가. 여기서 선무당의 굿판이라도 벌일 텐가. 이 마음은 영교 언니의 몫으로 써야 했다. 저 사내에게 쓰면 안 되는 것이다.
한데 딱 한 가지. 사내가 왜 문을 닫지 말고 열어두라고 했는지는 알겠다. 빗소리가 놋쇠로 만든 방울 소리만큼 좋았다. 삿된 흙탕을 쓸어가는 것처럼 맑은 빗방울 소리가 처마에서 떨어져 돌계단에 부딪히고 튀어 올라와 난간에 부딪혔다. 그 물끼리 부서지는 소리가 참 좋았다. 잠이 솔솔 올 만큼 말이다.
이 산에 사는 닭은 울지 않는다. 한데도 새벽 기운에 소스라쳐 일어난 것은 부정한 느낌 때문이었다. 빗소리에 같이 섞여들었던 사내의 숨소리가 옅어지자마자 잠이 달아났다. 뒤돌아 눈살을 찌푸려 보니 사내는 솜옷을 두고서 몸만 빠져나간 상태였다.
설마 전부 꿈이었나. 귀신에게 속아 폐가에서 하룻밤을 잔 것인가. 하기야 그만큼 허황한 이야기긴 했다. 끝단이가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까지 다급히 달려가는데 신이 제 것 하나밖에 없었다. 여인을 찾으라는 둥, 여인을 잊었다는 둥. 역시 말 아닌 말 같은 거래는 꿈임을 확신하는데 고개를 쳐들자마자 사내를 찾았다.
비님은 야단스럽게 오시고 있었다. 한데 속된 말로 동침했다고 볼 수 있는 사내가 소낙비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은 사내를 씻기려는 것처럼 빗줄기를 퍼붓고 사내는 그 하늘을 기꺼운 듯 경외하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사내는 웃고 섰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끝단이는 사내의 소소한 미소에 난처하고 답답했다. 저 비를 환대하는 사내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러다가 고뿔 걸리지.”
보는 사람 안쓰럽도록 호되게 앓던 것이 저리 비를 맞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눈이 어두운 사내가 비를 맞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치마저 잊었나 보다.
하나 끝단이는 사내가 어리석다며 까면서도 나무 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비 맞는 사내를 구경했다. 쥐색의 하늘은 새벽인지 아침인지 아리송했다. 사내는 언제쯤 비를 털고 떠날 수 있을까. 하나 말리기보다 지켜보는 건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사내가 말도 못 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비를 굳이 손에 받아 빤히 바라보는 것이 그랬다. 그 미소를 앗아가는 자격이 저에게는 없어 보였다. 떠나는 비를 정인처럼 대하고 있는 이가 보통 아픈 것이겠는가.
사내를 끌어낼 힘이 저에게는 없었다. 그가 비에 젖든 말든 저는 관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한데도 좀 가엾은 건 아마 저 사내가 잡을 수 없는 비를 잡으려 한다는 것 때문 아닐까.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비를 무에 그렇게 긴박하듯 잡을까.
크지 않은 동작이나 똑 부러지게 앉아 지켜본 끝단이는 알 수 있었다. 비와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하나 비는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러하니 그의 고달픔도 언젠가 그칠 것이다. 이 새벽에 긋고 말 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