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04
103화
외딴 산에 무르익은 나무를 쪼는 볕이 따가웠다. 손등으로 사나운 볕을 막으며 사내를 주시하는 찰나였다. 한 무리의 새들과 인사를 나눈 듯 잔잔하던 사내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볕이 난 길이 아닌 나무 그늘 숲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망연히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끝단이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발을 들었다.
“저…….”
낯선 객이 제 산에 들어오면 나가라거나 정체를 묻는 게 순리였다. 하나 사내는 장날 구경꾼 보듯이 얼굴을 확인하곤 사라지는 것이었다. 설마 저 사내가 귀신이 아닐까 싶었으나 저렇게 무심한 귀신은 보지 못했다.
사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암만 뛰어도 그의 발끝조차 따르지 못했다. 바깥은 살이 시린 겨울인데 이곳만 훗훗한 봄이 부는 것 같다. 열기에 약한 끝단이가 흘린 땀이 턱 끝을 지나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봄날 가느다란 빗방울 같은 땀은 금세 흙에 스며들었다.
끝단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제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 길을 보며 경악했더랬다. 나그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봄의 산. 하나 이곳에 말을 나눌 수 있는 이라곤 저기 사라지고 있는 저 사내뿐이었다. 이 온온한 산에 갇히기 전에 온 힘을 다해서 사내를 쫓았다.
가는 길에는 온 짐승들이 사내의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귀신의 땅에 있는 산치고 이토록 아름다운 짐승들이 무진장한 곳은 처음이었다. 싹조차 나지 않아 농사하지 못하는 이들을 수두룩하게 보고 온 참이었다. 한데 풀숲 사이를 알록달록한 사슴이 뛰놀고 고사리나 취나물 따위도 풍족하게 자라나고 있다. 저 사내가 팔을 걷고 가꾸는 모습 따위는 상상이 되질 않았다.
사내는 짐승의 다정한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전진할 뿐이었다. 감 좋은 짐승이 다가서는 귀신이란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하니 저 사내는 틀림없이 사람일 것이었다. 끝단이는 확신에 찬 걸음으로 그를 착실히 따라갔으나 곧 보이는 광경에 탄복하고 말았다.
이 산속에 저런 검푸른 전각을 어떻게 지었을까. 전각 양측에 피어난 앵두나무와 산수유나무가 이 기품 있는 전각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일자로 세워진 열 개의 문을 시원스레 열어 바람을 오고 가게 한다. 산의 일면을 채운 듯한 전각 안에는 푸르른 비단 조각으로 산수를 그린 병풍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앞으론 비단 방석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으나 사람 하나가 눕기는 충분한 길이였다.
전각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그 비단 방석 위를 차지한다. 눈을 감은 사내는 누군가가 오기를 바라는 듯했다. 여까지 따라오느라 힘을 다 탕진한 끝단이는 흐물거리며 전각 앞까지 갔다. 돌계단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신을 조심히 벗었다. 사내의 비단신 옆에 나란히 두고 나무계단까지 오르니 사내가 눈을 뜬다.
나무 바닥을 가로질러 비단 방석 앞까지 주춤거리며 걸었다.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사내의 시선은 끝단이가 무릎을 꿇고 앉을 적까지 또렷하지 않았다. 나가라 말라 말도 없는 것을 보니 혹 말을 못 하시는 분인가 싶을 때였다.
끝단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머물다가 떠났다. 사내는 손을 들어 제 한쪽 눈을 가리고 나머지 눈으로 초점을 잡듯이 있는 게 아닌가. 눈이 어두운 이가 저를 살피려고 노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는 끝단이라고 하옵니다.”
전각의 주인은 눈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고 물었다.
“한데.”
“사람이시지요……?”
말로만 듣던 그 귀신의 소굴이라는 전각이 여기는 아닌 듯싶다. 하나 수상한 것은 수상한 것이라 거짓 없이 묻고 말았다.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싱거이 터뜨렸다.
“되레 내가 묻고 싶은 것인데.”
“예?”
“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 땅을 떠도는 망령인가.”
끝단이는 냉방에 가둬둔 듯한 물음이 어리둥절했다. 갑갑궁금한 건 저인데 공격은 저쪽에서 해온 기분이었다. 대뜸 귀신이냐고 물어 퉁명스러워진 것일까. 끝단이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 사람입지요.”
“혹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망령이거나.”
“저는 분명…….”
귀신이 아니라고 증명하려는데 사내가 묵살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의 말씨름은 거부하는 것인가 싶거늘 사내는 때를 넘기지 않고 도로 눈을 떴다. 하나 역시 저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디 머나먼 별천지에 간 눈이었다.
“혹 눈이 아프십니까?”
“…….”
“의원은 부르시지 않고요?”
“여기까지 온 연유는.”
사내는 간신히 뜬 눈으로 저를 건성건성 훑어보았다. 무척이나 곤해 보이는 얼굴에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끝단이는 당황한 손짓으로 짐 보따리를 어서 풀었다. 그 안에 곱게 접어둔 초상화 한 장을 꺼내 들어 사내의 앞쪽으로 내밀었다. 엽전을 써서 영교의 얼굴을 그려둔 것이었다.
“이렇게 생긴 여인이 이 근방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습니까?”
사내의 시선이 초상화를 향해 내려갔다. 장장이 훑듯이 보는 그 눈이 고단하지 않게 끝단이는 일부러 초상화를 더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그 노력을 알아챈 것인지 사내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감히 건방지다는 듯한 느낌이지만 끝단이는 개의치 않았다.
“무당의 느낌이 나는 여인.”
“아이고, 예! 맞습니다!”
“그런 이는 하루에 수십 명씩 이곳을 지나쳐. 얼굴을 일일이 기억해 두라는 건 내게 고역이지.”
“하오나.”
사내는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비단 방석 수십이 깔린 보료 위로 여유작작하게 누웠다. 그때까지도 그는 한쪽 눈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는다. 더는 말을 이어나갈 의지가 없어 보이는데 저는 아무런 단서도 건지지 못했다.
문득 뒤돌아 바라보니 이 산중에도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전각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볕이 쨍쨍했거늘. 이러다가 이 산중에 갇힐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어 다급히 보따리를 싸는데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밤의 어둠이 아니니 나가지 않는 게 좋을걸.”
그는 끝단이의 행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는 듯 나긋이 말했다.
“재앙이 내릴 시각이지.”
허업. 끝단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싸던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당최 전각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가. 끝단이는 엉덩이걸음으로 슬금슬금 한쪽 구석으로 가서 바깥을 휘둘러보았다. 헛침을 삼키고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고.
전각 위쯤에 있는 하늘이 열렸다. 두 쪽으로 갈라지는 하늘에서 검붉은 연기가 땅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피 칠갑한 용이 승천하듯 땅으로 고꾸라진다. 보지 않아도 저 연기가 귀신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상스러운 건 이 산에는 연기가 닿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흡사 이 전각의 주인을 피하는 듯한 연기 덕에 끝단이는 슬슬 감이 잡혀갔다.
저 연기의 등장 시기를 아는 것도, 고고한 전각도, 귀신이 산속에 없는 것도. 만일 그 소문만 무성한 전각이 이곳이고 저자가 주인이라면.
“영교, 영교 언니를 어쨌는지요.”
알량한 꽃잎 문양이 저를 지켜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 영교 언니의 죽음만큼은 저가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오들거리며 말하는 꼴이 우스웠는지 사내는 냉혹한 미소를 물고 저를 관조했다.
“내가 계집 하나를 어째서 무엇에 쓰지?”
“이곳이 그 소문의, 그곳이지요.”
“하아…….”
몹시 귀찮다는 사내의 한숨이 그치자마자 재앙을 쏟아내던 하늘도 닫히기 시작한다. 보낼 만큼 보낸 뒤에 닫히는 하늘이 경악스러울 때 사내의 입술이 초연한 목소리를 꺼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나의 자멸뿐이니.”
“…….”
“네 언니는 다른 곳에서 찾아.”
사내는 자멸밖에 바라는 게 없다는 거친 말을 했다. 하면 자신도 귀신을 부르는 하늘 따위 바란 적 없다는 뜻이렷다. 은하수 꿈에서 그를 보았기 때문일까. 일 없으니 저리 꺼지라는 말에도 끝단이의 마음은 그를 붙들어야 답이 나올 것만 같은 감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
“저……. 꿈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편히 누워 있던 그가 고개를 지그시 돌려 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일말의 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것이 무슨 허풍인가 싶을 것이다.
“저도 무당입니다.”
“해서.”
“제 감은 영교 언니가 여기서 사라졌을 것이라 말하고요.”
꿈에서 그를 본 것이 어쩌면 영교 언니를 저 사내에게서 찾으라는 예지일 수도 있었다. 사내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천구의 인연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듯싶다. 훗날 그를 만나 영교 언니를 구해내리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굳은 의지가 사내에게도 조금은 전달되었을까? 사내는 눈썹에 힘 들어간 끝단이를 보더니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동정이 한 숟가락도 들어가지 않는 척박한 시선이 저를 긁어내렸다.
“하면 거래를 할까.”
“거래요?”
“아무리 내쫓아도 내쫓아지지 않는 것은 제 원을 해결하기 전까지 나를 성가시게 굴거든.”
무사히 수행을 마치고 온 이들은 경국지색의 사내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이들은 이 사내를 만난 것일까. 영교 언니도 이 사내를 만나 거래를 한 것일까.
“셋 중의 하나를 해내면 네 원을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셋 중의 하나요?”
영교 언니가 돌아오지 않는 연유는 이것뿐이었다. 언니도 제 원을 해결하기 위해 이 사내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다. 끝단이는 결심을 마쳤다. 뒤는 한 맺힌 귀신의 밭이었다. 여기서 죽어 저 귀신 무리에 합류하든, 영교 언니의 행방을 듣고 살길을 찾든, 빈손으로 털레털레 걸어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렷다.
거래를 받아들인다는 끝단이의 마음을 읽은 사내가 몸을 옆으로 틀어 누웠다. 거만하게 돌아누운 그는 손가락 세 개를 치켜세웠다.
“내가 찾고 있는 여인을 되살리거나.”
“…….”
“내가 찾고 있는 여인의 혼을 저승에서 데려오거나.”
“…….”
“나를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