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19
118화
눈을 슬며시 떠보니 캄캄한 굴속이었다. 빛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데 발밑으로 영롱한 별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에서 떨어지는 별빛인지 돌아보았거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 발이 떨어뜨리고 있지 무언가. 희사는 가던 걸음을 멈추어 서서 별빛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별빛이 저 좀 주워가라며 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별빛을 주울 방법은 없었다.
희사는 망설임 없이 나아가면서도 그 떨어지는 별빛에 신경을 썼다. 그 별빛이 떨어지는 양이 많아질수록 머리가 가볍고 마음에 드리운 근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종 아팠던 과거를 지우는 것처럼 제 몸에 무거운 짐을 덜어내는 중이었다.
산영이로구나.
하나 별빛은 가슴이 먹먹하도록 서 있어도 떨어질 뿐이었다. 이 동굴의 끝으로 가면 산영을 온전히 잃을 것 같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가도, 한 시진이 지나자 그 가슴 아픈 통증조차 잊고 말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이토록 편리한 것이었다. 과거에 묻힌 아픔마저 가져가 버려 시종일관 도려내던 가슴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 동굴 안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희사는 출구로 나아갈 뿐이었다. 사방이 흑색인 동굴에서 발밑에 굴러다니는 별빛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산영이는 이처럼 어두운 곳을 좋아하지 않지.
하나 그 생각마저 별빛으로 떨어져 동굴 안에 흡수되었다. 가까운 곳에 출구가 있는지 어두운 굴속이 조금 환해지고 있었다. 희사는 빛과 어둠으로 나뉘는 경계에 서 있었다. 별빛은 잇달아 제 몸에서 떨어지고 있고 저 빛으로 나아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제일 잘 아는 바였다.
산영을 잊어가니 마음이 이렇게 평온할 수 없었다. 산영을 만나기 전 자신은 찰랑찰랑하는 잔물결처럼 살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산등성이만 한 파도에 휩쓸릴 일이 없다는 것이 안정을 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 앞은 극락이나 다름없다며 어서 그 이름을 놓아주자고 환호성이었다.
빛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가 도로 물렸다. 그 짓을 수십 번 반복했다. 이대로 서 있어도 기억을 잃는 것은 마찬가진데 머저리처럼 이 동굴에 수백 년은 서 있을 기세였다. 저 빛을 받아들이면 여지없는 끝인 줄 알기에 망설이는 것일 터다.
“영영 이 동굴에 갇혀 있을 생각인가.”
그때 빛무리를 이끌고 한 사내가 걸어왔다. 희사도 익히 아는 그 얼굴은 자신의 아비라는 사람이었다.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전 만남이라 마주쳐도 모르리라고 생각했건만 자신과 똑같은 얼굴에 실소가 나왔다. 그저 저나 형제나 이 사람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마음이 평온하지 않니.”
“예.”
“나오렴.”
굳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부정하지 않았다. 하나 저가 곤란하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 질문에는 입술을 닫는다. 희사의 아비는 비웃는 얼굴이 되어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어두운 굴속에서 영영 썩을 참이냐?”
고집 하나는 제 아비를 닮았다. 세상사 모든 짐이 무거워 떠났으나 그 짐에 짓눌리지 않을 훌륭한 아들들을 두었다고 생각했거늘. 희사의 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들에게 손짓했다.
“어차피 잊을 게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잊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한데 억지로 끌어낼 줄 알았던 희사의 아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간신히 산영의 이름과 산영이 챙겨준 보따리만 떠나 보내지 않은 희사는 그 웃음에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그 애가 나도 마음에 든다.”
“한데요.”
“그 애를 봐서 한 번 기회를 주마.”
아비는 결코 자애로운 자가 아니었다. 잔혹하자면 저보다 잔혹하고 나태하자면 둘째보다 나태하였다. 온정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를 알기에 희사는 기대를 버린 얼굴이었다.
“이 동굴에 그 애를 가두어주지.”
“가두어요?”
“영영. 네 것으로 말이다.”
귀가 솔깃할 만큼 마음이 끌리는 제안에 희사는 눈을 깜빡거렸다. 산영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날아갔으나 그 어렴풋한 마음과 욕심은 아직 잔존했다. 희사의 눈이 욕심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본 아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그 애를 여기에 가두어주마. 하면 하늘이고 무엇이고 이 세상 끝에 있는 굴에서 영원토록 그 애를 취할 수 있다.”
산영을 이 동굴에 가두어두고 매일 도망갈 걱정 없이 본다. 천 년이 흘러도 나가지 못하는 동굴 속에서 산영은 차차 포기를 배울 것이었다. 마음도, 원망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동굴은 체념을 가르쳐 줄 것이고 산영은 그 모든 것을 배워 완벽한 자신의 여인으로 거듭날 것이었다. 자지러지는 산영을 내리누르고 품어도 뭐라 할 이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일상이 흡족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희사가 아비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옷자락이 사라락 떨어지며 손목이 드러났다. 그 손목의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아비의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할 때 그 잇자국을 내게 된 경위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 쓰라린 아픔이 한 가지의 기억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산영은 어두운 것을 싫어한다.
희사는 아비의 손을 잡지 않고 대신 보따리를 쥐었다. 고소한 옥수수 내가 풍기는 그 보따리가 미소를 되찾아주었다. 아비는 싸늘한 안광으로 희사를 노려보았다.
“그 애가 찾으러 올 줄 아는가?”
“안 오겠지요.”
“알고 있구나.”
산영은 거짓이 서툴렀다. 어찌나 서투른지 마지막까지 저를 속이지 못하였다. 하나 산영과 저는 반드시 만날 것이었다. 기억은 앗아가도 마음은 앗아가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는 산영보다 자신을 믿었다.
“마지막 기회를 이리 놓치는구나.”
“놓치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겁니다.”
비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확신은, 이 감정은 자신만의 것이니까. 한데 아비가 모자람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애로운 표정까지 지어주면서 말이다.
희사는 보따리를 빼앗으려는지 의심하였으나 이내 아비는 희사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끌고 온 빛무리와 함께 아비의 육신이 산산이 부서지며 수만 개의 별빛으로 변하였다. 어두운 동굴을 밝히는 빛들의 춤사위가 희사의 주변으로 옮겨왔다.
[희사라니. 좋은 이름이다.]그때 희사는 오래간 자신의 몸을 구속하던 하얀 꽃이나 줄기가 그 빛무리에 닿자마자 녹아가는 것을 보았다. 빛무리는 희사의 몸에 둘러 있던 넝쿨과 꽃을 지우고 그의 팔과 다리에 붙어 스며들고 있었다.
[드디어 네 제약을 깼구나.]희사는 넝쿨과 꽃이 사라지고 빛이 온몸에 스며든 그때. 이전과는 숨 쉬는 과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허한 몸 안으로 바람이 지나다니는 것 같았는데 그 안을 무언가가 채우고 있었다.
[혼이 담긴 이는 전보다 무거워진단다.]“혼?”
아들이라면서 제약을 걸어둔 이유를 그들도 궁금해했었다. 본바탕을 주기는 싫은 것 아니냐며 혀를 차곤 끝냈던 대화였다. 깨라고 만들어둔 제약인 줄 모르고 그것을 깨지 않으려 경계하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다른 형제에게는 비밀이다. 스스로 깨닫기 전에 절대 내색하지 말아야 해.]아비의 의도를 뻔히 알겠다. 껍데기만 준 아들이라고 하나 믿을 수 없던 게다. 제약을 깨고 나올 정도가 돼야 제 혼을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희사의 아비는 그 말만을 남기고 더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하나 희사는 자신의 안에 그가 살아 있음을 뼈와 피로 느꼈다.
생각을 마친 그는 웃음을 갈무리하고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출구가 내뿜고 있는 빛으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하나 출구를 나가기 직전 그는 멈추어 섰다. 바르게 서서 자신의 손목에 난 잇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연정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연정이, 투기가 자신의 마음을 악하게 만들고 악한 선택을 종용한다고 믿었다. 하나 완전해진 그는 속속들이 알았다. 그 모든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하여 그 모든 순간에 고통받고 있을 산영을 공격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아비가 구태여 이 동굴로 그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완전해진 희사는 아무 제약 없이 이 동굴에 스며든 기억을 가질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산영을 여기에 가둔다고 택했다면 아마 아비는 그를 여기서 죽일 생각이었을 것이다. 시험을 통과하고 제약을 깼으나 여전히 망설이는 것은 과오를 번복할 자신 때문이었다.
손을 뻗어 잃어버린 별빛을 부르니 한곳에 모여 실타래로 변하였다. 그의 손에 들어오는 실타래를 보고 희사는 찬찬히 웃음을 지었다.
출구로 나아가지 않고 그 앞에 주저앉아 실타래를 풀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실 한 올에 담겨 있어 풀어낼 적마다 그의 손을 타고 들어오게 된다. 그 기억은 오롯하여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담고 있었다.
“불을 낸 것이 나였구나.”
내심 직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산영을 앗아간 이가 누구냐며 온 천지를 뒤져도 모자라는데 그러지 않고서 그 산에 죄수처럼 있지 않았나. 첫 만남에 발랄하던 신령은 날이 지날수록 웃음이 없어져 갔다. 그 또한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실타래를 풀어갈수록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얻는 기쁨보다 산영이 잃은 것이 눈에 잘 보인다니.
자신이 불이었다. 산영이라는 산을 불태우고 재만 남겨, 그 산에 풀 한 포기 자라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나. 혼을 갖게 된 지금에서도 산영에게 아이를 줄 수 있다는 몹쓸 생각뿐이니 반성은 옛말일 것이다. 과연 아비가 제약을 깼다고 이 권리를 주는 게 맞았을까.
수척해진 하늘은 세상 끝에 있는 동굴에 앉아 하염없이 실타래를 풀었다. 그는 그 실타래가 다 풀리고 나서도 그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땅을 헤집던 귀신이 모두 사라지고 열닷새째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