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20
119화
하늘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듯 하루도 빠지지 않고 푸르른 색을 보여주었다. 밤에 나다니는 것을 미심쩍어하던 사람들도 귀신이란 귀신이 쓸려나간 것을 보고 하늘이 도왔다며 연일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명맥이 끊길 것 같던 왕도 자리를 잡고 무당과 무녀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음이었다.
농지를 떠났던 이들이 돌아오자 씨만 뿌리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옥룡산은 특히나 먹거리가 많다며 폐가 같던 이웃 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아궁이를 떼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 올라가 보면 여기저기 연기가 나는 초가집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어?”
하나 여기 이빨 빠진 산신령이 하나 있었다. 과거 산을 호령하던 치가 기운 빠져 전각에 드러누워 있었다. 명운석을 열어 영교 언니의 행방도 알아야 하거늘, 혹여나 거기에 희사의 이름이 없을까 미루고 또 미루는 중이었다. 떠난 이가 두고 간 물건을 종일 쓸어보며 눈물을 닦는데 보는 짐승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저녁 먹어야지…….”
실연에 빠졌음에도 신령 수련은 게을리하지 않아 비나 바람을 재주껏 다룰 수 있음이었다. 쌀을 씻어 밥을 지어 먹지 않아도 달포는 너끈히 버틸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안정을 찾아가는데 홀로 삐쭉거리는 마음이 문제이렷다.
혹 산영이 탈이 날까 염려하여 바리바리 말린 대추를 싸 들고 온 짐승들이 모여 앉아 조잘거렸다. 울적한 얼굴을 감춘 산영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쳐주고 앉아 있었다.
“그러셨단 말이야?”
그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자신이 없는 동안 희사가 저지른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었다. 희사는 독한 주인이었단다. 실수라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가지고 벌서거나 혼꾸멍나기 일쑤였다고. 그 짠한 이야기가 무에 그리 재밌다고 산영은 듣고 또 들었다.
전처럼 산을 가꾸고 씨를 뿌리고는 빼먹지 않지만 확실히 의욕은 개미만치 보였다. 짐승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산영은 괜찮다며 뒷짐을 지고 산을 돌아보았다. 며칠 전 끙끙 앓기까지 한 터라 사달이 나도 나겠다고 식구들끼리 한 소리를 했다.
“희사 님이 떠난 지가 벌써 스무날이 넘었어. 잘 살고 계신 것이겠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하나 호미를 든 산영의 낯은 울기 직전이었다. 누가 좀 달래보라고 자기들끼리 허리를 꾹꾹 찌르는 찰나였다. 포로로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식구와 산영의 이목을 끌었다.
옥룡산 식구라고 하기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옵고 타곳에서 온 새라고 하기에는 그 깃의 색이 신통하였다. 빨강과 파랑이 조화로이 섞인 새의 외양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기도 산영의 허벅다리까지 올 것처럼 보통이 아니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산영이 넋두리처럼 흘린 말이었거늘, 빙긋이 웃은 새가 부리를 벌리며 말하였다.
―살아났다는 게 참말이었구나.
이 익숙한 목소리. 산영은 호미를 떨어트리고 날쌘 호랑이보다 재빠르게 다리를 폈다. 흔들리는 동공을 본 새가 껄껄 웃으며 산영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둘째 형님?”
―고 얼빵한 얼굴을 보니 산영인지 산호인지가 맞구나.
저 장난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불친절한 목소리는 둘째가 확실하였다. 산영은 코끝이 매워 다급히 눌렀으나 이미 빠져나간 눈물은 닦을 길이 없었다.
“그간……. 강녕하셨지요?”
―강녕은 무슨. 희사 고놈 때문에 속 좀 썩었지.
새의 얼굴이건만 저 불평불만이 가득한 낯반대기는 어째 변하지 않았다. 산영은 속이 쓰라림에도 배시시 웃었다. 앓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저 말은 희사가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었다. 뜻을 이루었으니 이 쓰린 속도 좀 나으면 좋으련만 희사라는 이름 두 글자에 더욱 발광을 하니 말이다.
“다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야.
“예?”
―희사 놈하고 그렇게 됐다고 하늘에 발길을 딱 끊을 생각이냐?
산영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하늘로 올라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니 여기까지 찾아온 둘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곧 잔치가 있을 터야.
“잔치요?”
―오든지 말든지. 여하튼 희사 놈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은 안 하냐?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새의 부리가 딱 멈추더니 날개를 펴 계곡 쪽을 가리켰다. 새의 날개 끝에서 빛 부스러기가 나온다 싶더니만 계곡 위로 하얀 동아줄이 생겨났다.
―올 적에 고운 옷을 입고 오너라.
“전 아직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요.”
―이만 간다.
제멋대로인 둘째는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시키고 미련 없이 훨훨 날아가버렸다. 성질머리 급한 사람답게 날아가는 모양도 급하기 짝이 없었다. 난데없는 잔치 초청에 난감해하는 것도 잠시. 달라진 희사를 먼 곳에서나마 볼 수 있다는 가정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니 갈 것이야.”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대답하고는 전각으로 뽈뽈 달려갔다. 관심이 없다는 사람치고 면경을 다급히 꺼내 들어 얼굴을 살피니. 이 무슨 날벼락인고 싶은 식구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얼이 빠지고 말았다. 갈 생각이 없다며 한사코 부인하던 사람이 있는 치마란 치마는 다 꺼내두고 턱을 쥐며 고민하는 게 아닌가.
“요것은 너무 칙칙한데.”
보다 못한 식구들이 나서서 산영에게 어울리는 색을 골라주었다. 평소 쳐다도 안 보던 장신구까지 꺼내어 요리조리 대보다가 아뿔싸 싶은 게다. 산영이 난장판을 친 전각 안을 둘러보고 한숨을 뱉어냈다.
“됐다. 갈 것도 아닌데.”
그 말에 당황한 것은 여태 골라주고 입혀주던 식구들이었다. 얌전하던 이들이 손가락질까지 하며 항의를 하자 산영은 난감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서 무얼 해. 높으신 분들 다 오는 자리에 수련하고 있는 내가 가면 잔치 분위기나 쌉쌀해지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골라놓은 치마나 장신구를 곱게 개어 한쪽 구석에 두니 산토끼 하나가 억울하다며 가슴을 퍽퍽 쳐댔다. 말하고 손이 따로 노는 저 신령 좀 보란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헷갈리기 때문이렷다.
설레어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산영의 고민이 산에 걸쳐진 보름달처럼 커져 있음이었다. 희사의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소망과 봐서 무얼 하겠냐는 걱정이 옥신각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음을 강건하게 먹으려 할 때마다 눈에 아른거리는 동아줄 때문에 잠도 못 이룰 무렵. 동이 터오자 노루 하나가 나서서 개어둔 치마나 장신구를 머리로 밀었다.
“가보라고?”
산영은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치마를 펼쳐 허리에 두르고 희사가 내어준 노리개 또한 알차게 찼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가는 양 산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하였다.
“그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멀쩡히 사는 거 보고 포기하는 것이 낫지.”
한데 바닥 닳는다고 계단 밑에 숨겨두었던 비단신까지 꺼내어 신고 나니 염려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보고 나서 그립다고 매달리면 어쩌지. 저 미친 산신령은 뭔가 할 거 아니야.”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데 그 갈팡질팡하는 혼잣말을 종일 듣고 있던 식구들이 이를 갈았다. 저러다가 안 간다고 할까 무서웠다. 합심하여 산영의 치맛자락을 물고 동아줄이 있는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산영은 어어 하면서 끌려가는 척하였으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영의 발이 옳다구나 하며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운 마음을 누가 이길쏘냐. 입술에 기름칠하며 살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장담하던 것도 엊그제였다. 고 희고 고운 얼굴을 꼭 두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릴 마음이었다.
둘째가 내어준 동아줄은 잔치가 열리는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만지면 은가루가 떨어질 것처럼 반짝이는 동아줄을 잡자마자 위에서 당기고 있었다. 내릴까 말까 말할 새도 없이 위로 올라가는 산영을 식구들이 배웅하였다. 얼굴만 보고 내려올 거라며 큰소리치는 산영의 말을 콧등으로도 안 듣는 얼굴이었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하는 고민 줄을 싹둑 자르듯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어어 하자마자 뽀얀 구름이 맞이해 주니. 산영은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의 구름을 단박에 통과하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곳이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이 아니라 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탐스러운 나무가 있는 곳이렷다. 어리벙벙한 채로 구름을 디디자마자 동아줄은 사라지고 말았다.
산영은 치맛자락을 들고 주변을 기웃거리며 고 나무 앞까지 걸어갔다. 왜 이리 눈에 익은 것인가 했더니만 희사와의 첫 만남을 주선해 준 구왕 나무가 아니던가. 아직 덜 익은 구왕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둘째 형님이 배려해 주신 모양이구나.”
여기서 첫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두 번 다시 못 볼 곳을 배포 크게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그리운 눈으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을 차였다. 뒤편서 사뭇 간절하던 기척이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등이 간질간질하였다. 설마 했다. 차오르는 기대감을 진정시키고 황소걸음처럼 느릿느릿 돌아보았다.
하얀 의복에 은실 수가 먼저 보였다. 희사 님, 이라고 부르려고 하였으나 눈치 빠른 입술이 옹다물렸다. 첫 만남 때처럼 무표정한 희사의 뒤로 바람이 설렁설렁 불었다. 산영은 치맛자락을 꼬듯이 쥘 뿐이었다.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