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21
120화
마음에 진물이 나도록 곱씹던 목소리를 잊을 리 없었다. 하나 저 임은 산영의 임이 아니었다. 기억을 뺏긴 희사의 얼굴은 번민이 없었다. 바라던 그대로라 산영은 미련을 떨칠 수 있었다.
“도둑은 아니옵고.”
지레 찔려서 말하는 행태가 더욱 수상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영은 역시 올 곳이 아닌데 잘못 왔다며 자책을 했다. 바뀐 희사의 얼굴을 보자니 가시방석보다 더한 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잠시 들른 겁니다.”
희사의 성품을 보면 여기서 한마디 차갑게 찔러주어야 하는데 그는 웬일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산영이 의아하여 고개를 들 찰나였다. 꽃단장하고 온 산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던 그가 경계를 풀듯이 말하였다.
“잔치에 온 건가?”
“예?”
“차림새가 그러한 것 같아서.”
구왕 나무 곁에 한 번만 더 얼씬거리면 곤장을 친다고 할 줄 알았거늘, 단장해 준 공까지 알아주니 감읍할 따름이었다. 산영은 분홍 저고리를 손가락 끝에 말아쥐었다. 못 본 사이 말수가 는 희사는 빈말이 아니라 참말 딴사람 같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보고 있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황급히 떠나려 했다. 만남의 여운은 옥룡산으로 내려가서 홀로 간직하려 하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산영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가만.”
봄볕처럼 따가운 것이 잠시 팔목을 감쌌을 뿐인데 가슴에 열이 올랐다. 산영은 구렁이가 저를 휘감기라도 한 것처럼 얼어붙어 꼼짝을 못 했다.
“작은 형님이 불러서 온 듯한데.”
하늘에 부끄럼 한 점 없이 말하건대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먼발치서나마 희사의 강녕한 얼굴을 보고 돌아가려 한 것이었다. 한데 주제넘게 욕심을 챙기려는 마음이 산영의 눈길을 희사에게 묶어두었다. 고 화사한 낯이 산영을 훑듯이 보고 있었다.
“어디 가려 해?”
“저기, 볼일이 생각나서.”
“잔치는.”
“어우, 저는 그런 잔치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차려입은 것을 보니 이대로 가기는 섭하지.”
무슨 영광을 얻자고 이리 치렁치렁하게 입었는지 제 속임에도 모르겠다. 산영은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인 양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매일 이리 입습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예?”
분명 저쪽은 옛날의 그 희사 님이 아닌데 말하는 본새가 영락없이 그 희사 님이었다. 저의 과분한 바람인가 싶어 우물쭈물 희사의 낱낱을 뜯어보는 와중에 마음은 설레고 자빠졌다.
“한데 무슨 잔치이옵니까?”
잔치를 베푸는 연유나 알자며 말을 돌렸다. 한데 희사는 답을 하는 대신 고 새털같이 보드라운 눈빛으로 말끄러미 쳐다보는 게 아닌가. 흔들림 없는 시선에 부끄러워지는 건 산영이었다.
“거짓말쟁이.”
무슨 잔치냐 물었더니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들려왔다. 긴장하느라 콩알만 해진 간이 펄쩍 뛸 소리였다. 팔목을 잡은 손이나 놓아달라고 조곤조곤 얘기하려는 차였다. 팔목 잡던 손을 내려 깍지를 낀 희사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손을 맞잡고 걷는 게 믿기지 않아 산영은 말을 어물거렸다.
“작은 형님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여서.”
설마하니 둘째가 저와 희사를 이어주자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싶었다. 절색의 미인이 나무 아래에 있으니 데려가라고 했다든가. 하나 희사는 그따위 질 낮은 농에 어울려줄 사내가 아니었다.
보들보들한 흙이 비단신에 눌려 퍼지고 납작해졌다. 희사의 큰 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흙길이 끝나고 풀숲이 나타났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푸르스름한 꽃이 봉곳한 동산마다 피어 있었다. 어영부영 따르는 산영의 마음처럼 꽃이 바람을 맞아 요동쳤다.
잔치가 열리는 곳이 이 근방이었나 보다. 비단신 앞코에 흙이 뭉쳤을 때 희사는 손을 놓아주었다. 잔치라는 호들갑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상다리가 보였다. 커다란 알 하나를 중앙에 둘 뿐이고 음식 가지는 몇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초청한 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걸터앉는 교의도 한 개였다.
주변에 초가 같은 집 두어 채가 지어져 있긴 하지만 야외에 차린 잔칫상 치고 수수하였다. 이리저리 구경에 나선 저를 두고 희사는 주인 자리에 앉아버렸다. 이리 난감할 데가 있나. 잔치의 주인이 희사인 모양이었다.
“저…….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빈 곳에 앉아.”
빈 곳이라고 하오면 저 검정 교의 하나뿐이었다. 초청받은 이가 저 하나란 소리였다. 아무리 봐도 둘째의 농간인 것 같아 산영은 혀를 깨물었다. 평소 친절하지도 않은 이가 몸소 옥룡산에 납실 때부터 불안불안하다 했더니만.
결국 둘째의 계략대로 잔칫상을 가운데 두고 희사와 마주 앉았다. 큼지막한 알 하나가 그나마 봐줄 만한 거리였다.
“무슨 알인지요?”
오연한 자세로 앉아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구경만 한다. 말수가 적은 분이긴 하나 말을 민망스레 잡수는 분은 아니었지 않나.
“산신령인가?”
다 같이 꿀 먹은 벙어리 노릇 해보자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으니 저쪽에서 물음이 날아왔다. 참을성은 예전도 지금도 별로인 모양이었다.
“예.”
“이름은.”
“산영이라고 합니다.”
온갖 요사를 부려 꾸미고 오길 잘하였다. 막판에 기억될 얼굴이 곱디고우면 좋지 않은가. 희사는 좀체 망가지기 어려운 외양이니 이렇게라도 합을 맞추어주어야지.
“산영.”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할 것이라곤 차 마시기밖에 없었다. 노란 꽃이 둥둥 떠다니는 차를 호롭 마시던 산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식을 들었는지 듣지 못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예.”
“내 기억에 문제가 있다더군.”
감히 상을 나눌 처지도 안 되는 산신령을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산영은 희사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찻잔을 꼬옥 움켜쥐었다.
“한데요.”
“한데 네가 낯설지 않아.”
나비가 팔랑거리며 이 꽃으로 저 꽃으로 날아다니고 작은 개울 소리까지 들리는 게 여기는 흡사 옥룡산 같았다. 풍경이 심심하지 않게 지어둔 초가까지 산영의 취향이었다. 하나같이 희사의 안목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잔치일까. 그것도 아니면 둘째나 첫째 형님의 솜씨일까.
“전에 나와 만난 일이 있었나?”
암요. 힘써 안고 옥룡산 전각에서 눈물을 비단처럼 자아냈지요. 희사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부정해야 하거늘, 하늘까지 올라온 마당에 흔적 하나는 남기고 싶다고 몸부림치는 속내였다.
“있지요.”
시험하듯 조곤조곤 말하던 희사가 단박에 목소리를 바꾸었다. 땅에 파묻힌 단서를 쇠고랑으로 긁어내듯 조급하였다.
“네가 나의 무엇이었는데.”
산영은 두 갈래의 강 앞에 서 있었다. 한 강은 진실의 강이요, 희사가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강이었다. 한 강은 거짓의 강이요, 저가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강이었다. 기억을 깡그리 잊은 희사는 감히 제까짓 게 정인임을 자처한다고 노할지 모르겠다. 하나 실없는 소리를 해대다가 가까스로 평온히 사는 이에게 초를 칠까 걱정이었다.
하여 산영은 거짓의 강을 건너기로 결심을 굳혔다.
“저를 이리로 부른 게 둘째 형님인 것은 아시지요? 희사 님이 아프셨던 동안 보약을 지어 올린 정성이 갸륵하다며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 주셨나 봅니다.”
이건 희사가 바란 답이 아니었나 싶다. 한껏 부푼 그의 기대가 실망으로 녹아가는 게 보였다. 커다란 알 위에서 부딪친 둘의 시선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사내는 거짓을 가려내려 하고 여인은 거짓으로 위장하려 했다. 시선이 오고 감에 따라 지쳐 가는 건 여인 쪽이었다. 거짓을 두르고 싸워본 적이 없는 터였다. 침묵을 무기로 쓰던 사내가 가여운 여인을 놓아주려 입술을 벌렸다.
“이 알은 금일이면 부화할 테니.”
누구의 알인지도 알려주지 않고서 희사는 그리 부탁했다.
“하룻밤 묵고 가.”
산영이 거절의 말을 내놓기도 전에 희사는 뒤편 초가를 가리켰다. 그러곤 부탁한 적도 없다는 듯이 잔칫상을 버리고 일어섰다. 잔치의 주인이 파한 자리니 오래 앉아 있어 좋을 것이 없었다. 하룻밤은커녕 한 시진도 기대하지 않았던 산영은 뭣에 홀린 듯 희사의 뒤를 밟았다.
나이 먹은 나무를 써서 토대를 잡은 초가였다. 기둥을 쓸어보기만 해도 그 나무의 연로함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나무의 살 냄새가 바람에 섞여 온 집 안을 쓸고 다녔다. 제 고향에 온 것처럼 안락한 느낌이 안개인 양 자욱하였다.
산영은 비단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 문고리를 당겨보았다. 희사가 그러면 그렇지. 한 칸 있는 방 안에 고풍스러운 살림살이를 갖추어 두셨다. 돼지에 진주가 이럴 때 쓰는 말이렷다.
“저기.”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하룻밤은 무리였다. 기울어진 그림자가 툇마루로 올라오더니 산영의 등을 감쌌다. 듬직한 팔이 허리를 안고 향내 나는 얼굴이 머리꼭지 위로 올라갔다. 듬쑥 뒤에서 끌어안은 희사가 정을 애걸하듯이 말하였다.
“거짓말쟁이.”
그럴 리 없다. 용서의 대가로 기억이란 기억은 죄 훔쳐 갔을 텐데.
“너는 거짓말쟁이로구나.”
하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희사의 눈물방울이 비처럼 포슬포슬 내렸다.
“나를 용서하였다더니.”
“희사 님……?”
“나를 찾으러 온다더니…….”
정인을 살리기 위해 질러버린 거짓이 무슨 상처가 되어 돌아왔을까. 산영은 희사의 품에서 용케 뒤돌았다. 하이얀 의복을 입은 게 저처럼 만남을 고대하여 꽃단장한 것인가.
거기에는 서로 몰라보는 남이 아니라 산영의 희사가 버티고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