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5
15화
이 근방쯤에 사내가 있을 법도 한데. 그나저나 궁의 주인 허락 없이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 것인가. 산영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 잘 나가던 구름이 갑자기 밑으로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산영이 바람을 써도 누군가 끌어당긴 것처럼 아래로 내려간다. 산영은 구름을 쥐어 잡고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을 견뎠다. 다행히도 구름은 땅에 처박히기 전에 멈추었으나 더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마치 이곳의 주인이 더는 들어오지 말라고 멈추어 세운 것 같았다. 제 발로 걸어오라는 뜻인가. 문을 열어준 것을 보면 박대하며 내쫓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산영은 천천히 구름에서 내려와 땅 위에 올라섰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며 한 발자국 나아가 보았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구름을 두어 번 쳐준 연후에 세 발자국 더 나아가 보았다. 처음 만난 것은 샛노란 꽃이 잔뜩 핀 산수유나무였다. 초봄에 들어서야 볼 수 있는 꽃인데 제법 주변이 서늘함에도 산영이 본 그 어떤 산수유나무보다 꽃이 풍성했다. 길의 양옆으로 핀 산수유나무를 보자니 이 궁의 주인은 산수유 열매는 원 없이 먹겠구나 싶었다.
하나 산수유나무의 길이 끝나자마자 이어진 것은 열매가 맺힌 산사나무였다. 보자마자 군침이 넘어가는데 이 또한 서늘한 지금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산사나무의 길이 끝나면 나뭇결이 군데군데 하얀 백송의 길이 이어지고, 그다음은 허리가 꼬불꼬불한 팥배나무가 흰 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무는 진분홍 꽃을 가지마다 피우고 있는데 그 광경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나무의 구역을 지나치자마자 산영의 앞에 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생겨났다. 본 데 없는 문양이라 이질적인 문고리가 달려 있었다. 산영은 한쪽 어깨로 문을 밀었다. 혹여 손때가 묻을까 봐서.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웬만한 돌문보다 육중했다. 산영은 낑낑거리며 문을 밀어야만 했다.
겨우겨우 문을 열고 보니 문의 두께가 산영의 몸집보다 두꺼운 게 아닌가. 구왕을 먹지 않았으면 옴짝달싹 못하였을 것이다. 산영은 힘이 쪽 빠진 채로 궁 안에 들어왔다.
궁 안에는 드높은 전각만 하나 세워져 있고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전각으로 이어진 길바닥에는 정갈한 백색의 돌로 채워져 있었다. 흰 눈에 선 듯한 느낌을 받은 산영은 열려 있는 문을 보고 저 안에 누군가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하얀 돌 위에 발을 올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전각으로 올라가는 층계 옆에 설치된 난간은 연꽃과 호랑이, 참나무 문양이 세심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역시 하얀색으로 되어 있으나 연꽃의 분홍색과 금색 호랑이의 까만 등무늬와 참나무의 짙푸른 초록만은 칠해져 있었다. 염료가 아닌 보옥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 산영은 값을 셈해보다가 무섬증이 나려는 차였다.
그때 열린 문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산영은 긴장 섞인 시선을 문 안으로 들였다.
중앙에는 금으로 만든 탁상이 놓여 있고 그 뒤에는 공작과 거북이, 붉음과 푸름이 한데 섞인 병풍이 있었다. 그 병풍의 길이가 어찌나 긴지 산영이 한눈에 담지 못할 만큼 거대한 병풍이었다. 그것이 다였다. 널따란 방 안에는 탁상과 병풍, 그리고 한 사내만 있었다.
올 때까지 기다린 듯 눈을 감고 있던 사내는 닿지 못할 만큼 멀리 있었다. 산영이 한 발자국을 더 옮기자마자였다. 손님의 기척을 느낀 사내가 눈을 떴다.
“늦었어.”
산영이 희사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 사내였다.
* * *
고개를 들자 검은 틀에 흰 꽃이 새겨진 문양의 천장이 보였다. 그 천장을 받치고 선 기둥은 만지면 묻어날 것같이 청명한 푸른색이었다. 산영은 사내가 이 궁의 주인처럼 앉아 있는 것에 안절부절못하다가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희사 님!”
산영은 여기까지 소중하게 끌어안고 온 보따리를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러다가 경을 치지요! 경을!”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탁상에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았다. 동절의 여울처럼 차가운 사내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하여,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을 노린다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영은 사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인이 오면 어쩌려고 이런 데 앉아계십니까.”
여전히 산영에게 사내의 존재는 나무 지기, 아니면 가여운 동행 정도에 그쳐 있었다. 꽤나 정성을 쏟은 것처럼 보이는 궁인데 떡하니 주인 자리에 앉은 사내가 염려스러웠다.
하나 산영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도 사내는 미동이 없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은 어떠한 변명을 뱉지도 않았다. 다만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산영이 내려놓은 보따리의 매듭을 건드렸다. 기다랗고 고운 손가락 하나가 매듭 사이로 들어가 건드리자, 매듭은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스르르 풀려갔다.
산영은 혹시 이것을 가져다줘야 할 곳이 여기인가 싶어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곳 주인에게 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무 말 하지 않던 사내가 드디어 답을 해주었다.
“그런 셈이지.”
시일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심부름이 끝났다. 생각보다 날을 많이 잡아먹지도 않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옥룡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미소 지은 산영은 보따리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기대했다.
다 풀린 보따리 안에는 자그마한 나무로 짜인 상자가 있었다. 산영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했지만 열어보는 것은 이곳 주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참았다. 한데 사내가 산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겠나.
“열어봐.”
“제가요?”
“네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만약 산영의 것이라면 진즉 줄 것이지, 이렇게 심부름을 끝낸 연후에 주는 연유가 무어란 말인가. 하나 산영은 사내가 허튼 농담을 치지 않는 이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의미 없는 농을 치느니 혀를 깨물 것 같은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산영은 찜찜하지만 손을 들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구슬?”
상자 안에는 새하얀 구슬이 담겨 있었다. 산영은 이게 무엇이오, 하는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지만 사내는 이 구슬의 정체에 대해 답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마주친 사내의 눈이 어서 만지지 않고 무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오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산영의 눈에는 참말로 그렇게 보였다.
산영은 주춤거리며 손을 뻗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구슬에 비해 손이 너무 더러운 것 같아, 혹시 나중에 받아 들 주인이 기분이 나쁠까 염려되었다. 하나 어쩐 일인지 호기심을 참기 어려웠다.
산영은 머뭇거리나 확실한 욕망이 담긴 손으로 구슬을 쥐었다. 얼음 낀 계곡물보다 차가운 그것을 쥐자마자 입으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쑤시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산영이 만진 것은 평범한 구슬이 아니었다. 그 구슬은 사람이 꼭꼭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진실한 속내를 보여준다. 사내가 알기로 이 땅 위에 욕망에 초연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한 가지씩은 그것이 나쁜 바람이든, 좋은 바람이든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속세를 등진 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평범한 땅의 사람이란 그 바람의 가짓수가 하늘에 뜬 별처럼 많은데, 이 구슬을 쥐면 그중 가장 뚜렷한 욕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법이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 배 아파 낳은 어미도 모르는 마음. 신령을 낚을 미끼로 쓰기에 그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구슬이 어떤 색이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구슬은 흰색에 가까우나 만약 잡은 이가 금은보화를 바란다면 용의 비늘처럼 광 나는 금색으로 보일 터였고, 사람을 죽이기를 원한다면 그 흑심처럼 새까만 색으로 보일 터였다. 턱을 괸 사내의 눈에는 구슬을 향한 흥미가 배어 나왔다.
“피처럼 빨갛습니다.”
얼핏 꺼림칙하게 들릴 법하나 산영의 목소리는 산딸기라도 본 듯 무덤덤할 뿐이었다. 구슬이 피처럼 빨갛게 보였다면 그 의미가 가리키는 건 하나에 불과했다.
“이걸 정말 저를 주시는 겁니까?”
산영 자신도 몰랐던 욕망은 타인의 애정이었다. 붉은색이 구슬에 나타날 경우 그 붉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짙은 붉음은 연모하는 이의 애정을 원한다는 뜻이고, 주황빛의 붉음은 자식의 애정을, 핏빛의 붉음은 누구든 상관없는 애정을 뜻하는 바였다. 이 생선이 어떤 미끼를 가장 좋아하는지, 낚싯대 끝에 달 미끼를 어느 것으로 하면 좋을지 파악한 사내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지게를 지고 천덕꾸러기 같은 사고를 주워 담은 듯한 하루였다. 겨우 가짜 옥룡산에서 탈출했는가 싶었더니 하늘에서 떨어지지를 않나, 웅장한 궁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왔는데 정작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를 않나, 곤한지 약간 오락가락하는 사내는 제가 주인인 것처럼 굴지를 않나.
여기 주인을 만나야지 심부름이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터인데. 정작 이 심부름을 위해 떠났던 사내는 탁상에 올려둔 서적을 제 마음대로 읽는 게 아닌가.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달포를 말하고 떠나온 게 엊그제인데 벌써 약속한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혹여 시일이 더 걸린다면, 더 걸릴 수 있노라고 전해줄 이가 필요했다. 한데 땅까지 내려왔다가 하늘로 다시 돌아올 만큼 거대한 새는 자신이 부릴 수 없음이었고, 그걸 빌려줄 만한 이를 하늘에서 알 리도 만무했다. 유일하게 하늘에서 얼굴 맞대고 이야기해 본 이는 사내가 고작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