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몸이 곤해 아무 전각에나 들어와 누워 있었던 산영은 천천히 일어났다. 바람이 불지 않는 문 사이를 바라보다가 발밑에 뭉쳐 두었던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보았다. 얼굴을 아는 사람한테서 무언가를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값어치를 알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옥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만지기도 아까운 구슬을 말없이 바라보던 산영은 보따리를 잘 매어두고 문을 짚고서 일어섰다.
하늘의 날은 적응되지 않는다. 밤도, 낮도 없는 오묘한 빛깔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보면 어느새 세월도 잊고서 이곳에서 일생을 까먹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강해지기 위해 떠나온 길이 어째 돌아갈 수 없이 멀리 온 기분이었다. 산영은 회초리를 기다리는 천방지축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사실 큰일을 저질렀음에도 간단한 심부름으로 끝내는 것부터가 내내 찜찜했다. 마음이 좋은 어르신인 줄 알았더니 일언반구 없이 산영을 붙잡아두는 모양새도 그렇고, 대궐 같은 궁에 가두어둔 다음 내버려두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그냥 온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답을 알고 있는 사내의 전각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제집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아까와 달라진 바가 없었다. 산영은 발끝을 들어 조심조심 전각 앞으로 걸어갔다. 열려 있는 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을 바라보니, 지독하게도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심지어 아까보다 서책의 수는 열 배 가까이 는 것 같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탁상의 양옆으로 정갈하게 쌓여 있는데, 사내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다가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말 걸어봤자 무시할 것이 뻔하고. 산영은 고픈 배를 쓰다듬으며 인사나 하자 싶었다.
“바쁘십니까?”
분명 말을 밥알 씹듯이 씹고서 저 혼자 삼키겠지. 하면 산영은 먼저 자겠습니다, 하고서 내일 말문을 터볼 생각이었다.
“바쁘지 않아.”
산영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책에 고정되어 있었던 사내의 시선이 들려져 있었다. 서책의 위로 내밀어진 까만 동공이 산영을 향해 있었다.
“시장하진 않으신지요?”
산영은 목을 가다듬으며 슬금슬금 전각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넓기만 넓지 안에 뭐가 든 게 없다는 평을 내리고 사내의 탁상 앞까지 걸어갔다. 아까는 제법 당황하여 구슬을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닌 척 무릎을 쓸어 만지며 탁상 앞에 앉으려던 산영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고 깜짝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내가 빤히 지켜볼 줄은 몰랐던 산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내는 별짓 하지 않았는데 넘어진 산영을 보고도 인상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산영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탁상 앞에 바로 앉았다.
“구름을 타고 다녔더니 다리가 아파서…….”
앞뒤가 안 맞는 산영의 변명에도 사내는 전처럼 서늘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산영은 자꾸 되지도 않는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희사 님.”
그 이름을 들어도 좀처럼 아무 반응이 없던 사내가 눈을 들어 산영을 보았다.
“이곳을 빌리신 겁니까?”
“응?”
사내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바람 빠진 웃음에 불과했지만 사내의 미소를 처음 본 산영은 얼뜨기처럼 굳었다. 이 사내가 제가 없는 사이에 뭐를 잘못 먹은 것이 아닌가.
“이런 곳을 빌려주는 이도 있나?”
산영의 말에 대답이라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들렸다. 산영은 얼음으로 뺨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지요?”
걱정 어린 눈을 한 몸에 받은 사내가 서책을 내려놓고 산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왜.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여?”
“아니, 그것보다는 머리 쪽이…….”
산영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입을 막았지만 사내가 그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산영은 사내의 양옆에 산처럼 쌓인 서적을 흘끔 바라보곤 한숨 쉬듯이 말했다.
“한데 그렇게 이것저것 꺼내다가 읽은 걸 보고 주인이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글쎄. 아마 별말 안 할 거야.”
“친하십니까?”
“나는 나에게 관대하거든.”
산영은 잠시 이해가 가질 않아,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머릿속에서 사내의 말을 조합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사내는 턱을 괴고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설마요.”
“무엇이 설마인데.”
“이렇게 큰 궁의 주인이시라고요?”
아니 이렇게 큰 궁을 가진 주인이 고작 심부름할 정도라면 이 사내의 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란 말인가. 산영은 구왕을 소화한 배 속이 원망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뱉어낼 수 있을 때 뱉어냈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산영의 얼굴을 사내는 뚫어져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해서.”
“제 얼굴이요?”
“네 머리가.”
사내의 신랄한 말에도 산영은 입술만 삐쭉거릴 뿐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사내가 자꾸만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는 게 아닌가. 산영은 설마 해서 진심을 뺀 농처럼 물었다.
“이것은 제 착각이나 다름없는데. 한 가지 궁금하여.”
사내는 눈길로 산영의 입술을 훑으며 대답하였다.
“말해.”
아까부터 사내가 보내는 신호가 심상치 않았다. 심부름을 마쳤다는 얘기도, 그렇다고 더 해야 한다는 얘기도 없었다. 사내가 알려준 것은 이 커다란 궁의 주인이라는 것뿐이었다. 산영은 굳은 머리를 잘 녹여서 돌려보았다. 만약 사내가 말하는 바가 따로 있었다면.
“혹… 제가 잘못 따먹은 나무의 주인과.”
산영은 마지막 말을 하며 침을 강물 삼키듯이 삼켰다.
“주인이십니까?”
손에 땀이 차오르는데 사내의 대답은 느리고 느렸다. 무엇을 생각해도 벌써 답이 나왔을 법하거늘, 사내의 고혹적인 입술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산영이 긴장한 나머지 탁상 위에 올려진 사내의 손끝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갑자기 헛웃음을 지은 사내가 느긋하게 입술을 열었다.
“무서워서 그래?”
산영은 자신이 사내의 새끼손가락을 꼭 쥐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영이 무서워하는 것은 사내의 의도였다.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널찍한 궁에 가두어두고, 먼젓번도 하늘에서 떨어트리지를 않나, 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하질 않나.
고라니처럼 겁을 먹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한데 산영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깝게도 이 사내밖에 없는지라 손에 쥔 것도 사내의 손가락이었다.
산영은 이제 꼼짝없이 이 궁에서 나무나 심으면서 살다가 죽겠구나 싶었다. 보아하니 이 궁에 심어진 나무들도 다 이 사내의 것인데, 평생 그 나무들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무를 수집하는 것에 퍽 진심인 듯한 사내의 나무를 심다가 죽거나.
평생 옥룡산 식구들은 이 집 나간 산신령이 뭐 하다가 죽는지도 모르는 채로 쓸쓸하게 살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산영은 눈물을 글썽일 뻔했으나, 미운 이가 울면 더 미운 법이기에 설움을 삭이며 말했다.
“제가 미우시지요?”
그러니 그렇게 못살게 굴고 매번 차갑게 노려보기나 했지. 이제야 사내의 냉대가 이해가 된 산영은 눈물이 나지 않는 맨눈을 소매로 찍었다. 사내는 겁먹은 빗방울이 꼭 저 같은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사내의 손끝은 거짓을 담아 산영의 뺨에 닿았다.
“글쎄. 그건 너 하기에 달렸지.”
“예?”
나무에 미친 것처럼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산영의 머릿속에는 꽃밭이 피었다. 산영은 나올락 말락 하던 눈물을 싹 거두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실은 제가 나무의 주인을 만나면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요.”
“네 일생을 걸어서라도 갚겠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 하찮은 산의 무엇을 팔아서라도 갚는다는 말일까.”
사내는 다 안다는 듯이 산영의 말을 대신했다. 산영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멋쩍은 뒤통수만 긁었다. 긴장이 풀린 산영은 사내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있는 자신을 알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갚아.”
한데 사내가 떨어지는 산영의 손을 꼭 잡아서 다시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산영은 잡힌 손목이 불덩이에 데는 것 같았다. 빼내기 위해 꼼지락거려도 사내의 단단한 손은 꿈쩍을 하지 않는다.
사내는 웃지 않고 있었다. 하나 산영의 눈에는 사내의 얼굴이 꼭 웃는 것만 같았다. 깊은 우물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눈. 그 눈앞에서 산영은 홀딱 벗겨진 기분이었다.
조그만 머릿속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는 듯한 얼굴이었다. 산영은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건 신령이 된 산영이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예감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가파른 산등성이에 남겨진 기분. 옥룡산을 닮은 환영에 남겨졌을 때와 똑같은 기분. 이 땅 위에 혼자 남겨져 있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러한 기분.
산영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요. 어떻게 갚으란 말씀입니까?”
“너는 어떻게 갚을 생각이었지?”
구왕. 귀한 열매를 먹었으니 그 값을 치러야 했지만 산영이 원한 힘은 아니었다. 하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돌려줄 수는 없으니 값을 치러야 할 터인데. 지난번 산적을 보고 값이 맞지 않는다고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이미 나무의 주인과 마주하고 있었음이었다. 산영은 불길한 예감을 지우며 물었다.
“생각해 둔 것이 있긴 있습니다.”
“그래?”
“한데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전혀 생각지 못한 소리라는 듯 사내가 산영의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이 계집이 뭐라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