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나 보다. 주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날카로워지는 게 느껴졌다. 산영은 찬바람에 머리를 식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희사 님 마음에 차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싸늘하게 굳어 있던 사내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게 무엇인데.”
“접니다.”
“너.”
“예. 저.”
사내와 산영의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을 얼리고 사내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줄 바람이었다. 사내의 속눈썹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산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데 싫으시지요?”
산영은 사내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드리려는 건 제 노동입니다. 보아하니 이곳에 나무도 많고, 닦을 곳도 많고, 가끔 시장도 하실 것 같아서요.”
산영은 눈치가 없을 뿐이지 머리가 나쁜 쪽은 아니었다. 이 말을 위해 잔뜩 포석을 깔아둔 그녀는 빌 듯이 두 손을 모았다.
“그러니 옥룡산에 왔다, 갔다만 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는데.”
산영의 눈이 배고픈 다람쥐가 알밤을 까달라고 빌 적처럼 가엽게 변해 있었다. 가능한 한 사내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살살 녹여, 옥룡산의 명운을 햇살이 비추는 쪽으로 이끌어보려고 했으나 이 무뚝뚝한 사내의 눈치는 그것만으로 부족한 듯싶었다.
“역시 안 되겠지요?”
참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평생 제 옆에서 종노릇이나 하다가 죽으라고 하면 밤에라도 몰래몰래 옥룡산에 다녀와야 할 처지였다. 이제 구름 타는 법도 배웠겠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남의 눈을 피해서 다니는 것보다 정직하게 정문으로 드나드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 것이었다.
사내는 이제 아예 드러누울 듯한 자세로 턱을 괴고 앉아 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괘씸하여 저 찬 바닥에서 자라고 할 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산영이 눈치를 보며 바닥만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사내의 입술에서 찬 숨이 새었다.
“옥룡산에 무엇이 있는데.”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더 붙였다.
“왜 그리 마음을 쓰지?”
사내는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다는 듯 산영의 눈을 보았다. 그 시선에는 산영을 질책하려는 것보다 단순한 호기심이 짙었다. 산영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그야 제 식구들이니까요.”
“내가 알기로 그 산에 신령은 너 하나일 텐데.”
“예. 그렇지요.”
“한데?”
산영은 사내가 말하는 속뜻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 땅에는 신령은 신령끼리 놀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신령은 적어도 사람끼리 놀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신령은 말 못 하는 미물일지라도 감싸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식구의 기준은 제각각이었다. 아마 사내는 적어도 신령은 신령끼리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희사 님도 식구가 있으시지요?”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표정이 조금 오묘해졌을 뿐이었다.
“옥룡산은 제집이고, 제집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제가 지켜야 할 식구인 겁니다.”
사내는 갑자기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손가락으로 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렸다.
“하면.”
“예.”
“너는 앞으로 여기서 살 테니, 나도 네가 지켜줘야 할 식구인 건가?”
산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먹이 먹는 붕어처럼 구는 산영을 본 사내가 편히 엎드리듯이 누워버렸다. 사내는 산영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팔베개를 했다. 사내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산영은 어디에 가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아까 사내가 한 ‘여기서 산다’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더 얘기해 봐.”
사내는 잠을 자는 것처럼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산영은 한 대 뺨을 맞은 것처럼 정신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여기서 삽니까?”
“너를 나한테 주겠다면서. 거짓이었나?”
“아니, 한데. 제가 여기서 삽니까?”
“달에 한 번 정도는 다녀올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르지.”
사내는 산영의 마음을 아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네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열흘에 한 번이 될 수도, 도저히 못 들어줄 만한 것이면 십 년에 한 번이 될 수도.”
“아이고, 나무 어른, 아니, 희사 님.”
산영은 일을 쉽게 풀어주는 것 같다가도 빡빡하게 구는 사내의 농간에 제대로 휘말리고 말았다.
산영은 잠이 드는 것처럼 숨을 고르게 내쉬는 사내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 있다가, 몸이 뻐근해 다리를 쭉 폈다가, 은근슬쩍 머리를 바닥에 기대어보았다.
따로 아궁이를 뗀 것도 아닌데 바닥이 뜨끈뜨끈하였다. 홀로 계곡물 아래에 있을 때와는 다른 포근함이 느껴졌다. 산영은 손 하나가 잡혀 있는 관계로 몸을 틀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내를 마주 보고 누웠다.
사내는 제 팔 하나를 베고, 하나는 산영을 잡고, 그 고운 얼굴을 산영의 코앞에 가져다 두고 있었다.
“제가 빗방울이었을 때 말입니다.”
고운 꽃이 있었다. 아니, 고운 꽃으로 자라날 것같이 튼튼한 싹이 있었다. 산영은 계곡물이 되었다가, 흙탕물이 되었다가, 마침내 그 꽃에 물을 줄 수 있는 땅속 빗물이 되었다.
싹을 틔우고 긴 줄기를 만들고 산영의 바람처럼 아리따운 꽃이 피어났을 때였다. 산영은 그 날의 햇살, 바람, 땅의 내음, 자식을 키워낸 것 같은 벅차오름. 그 무엇도 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하늘에 빌었지요. 이 꽃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새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는 두 귀를, 두 발을, 두 손을 달라고.”
사내는 답 없이 듣고 있었다. 자는지, 자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산영의 입은 쉬지 않았다.
산영은 처음 손발이 생겨서 신이 난 일, 뛰어다니다가 넘어졌는데도 좋다고 웃은 일을 얘기하면서 점점 수마에 감겨들었다. 따듯한 바닥, 손목에 감긴 타인의 온기, 누구의 방해도 없는 조용한 방 안, 잠을 부르는 듯이 불어오는 바람.
산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처음 신령이 되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듣자 하니… 신령은 천제께서 고르시는 거라고 하던데.”
산영의 목소리는 잠결에 있어 자그마했지만 사내의 귀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나를 어째서 뽑아주셨을까 싶다가도, 만나면 꼭 감사하다고 해야지…….”
속삭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따듯한 바닥이 산영의 넋을 빼앗아간 게 틀림없었다. 산영의 눈이 감기고 사내의 눈이 뜨였다. 사내의 새까만 동공은 자는 산영의 얼굴을 담았다.
사내는 잠을 자지 않는다. 태어난 순간부터 천제를 대신하여 일하는 존재였다. 하나 그의 일 중에서 신령을 고르는 일은 없었다. 세상을 손바닥 위에 두고 있는 그 또한 신령들이 어떠한 기준으로 뽑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흔히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가 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태평히 잠을 자는 중이었다. 제 아들들은 잠을 잘 수도 없이 만들었으면서, 저는 속 편히 자고 있는 아버지. 사내의 서늘한 눈길은 그 밤 조용히 산신령 하나를 더듬고 있었다.
* * *
천제의 첫 번째 조각은 정신없이 궁의 회랑을 좌우로 반복하여 걸어 다니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하염없이 걸어갔다가 다시 번뜩 왼쪽으로 발을 꺾고, 생각이 난 듯 멈추어 서고. 첫째의 부름에 불려 나온 둘째는 드러누워 그 광경을 한 시진째 보고 있었다.
“나 가도 돼?”
둘째는 무심한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애초에 불러도, 불러도 오지 않다가 아끼는 술을 주겠다고 하여 겨우 꼬셔낸 둘째였다. 첫째의 한숨은 회랑의 끝까지 닿을 듯 깊어졌다. 그는 잘난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둘째의 앞으로 걸어왔다.
“넌 걱정도 안 되니.”
“그치.”
“내가 무얼 말하는지는 알고?”
“아마도.”
고작 그것을 묻기 위해서였냐는 듯 둘째는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첫째는 골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둘째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셋째는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하게 한단 말이야. 이쯤이면 됐으면 됐다, 말 거면 만다고 말을 해줄 터인데.”
“아직 덜 끝났을지 누가 알아.”
“덜 끝나?”
날짜는 날짜대로 흘러가고 천신끼리의 전쟁은 불붙기 직전이고, 그 밑에 사는 가여운 하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소식을 듣자 하니 셋째는 제 궁에 틀어박혀 뭐 하는지 알 길이 없단다.
일거리를 보내면 꼬박꼬박 처리하는 것으로 보건대 일은 놓지 않는 모양이고, 대관절 그 산신령에 대해서만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하지 않으니. 혹 제 마음대로 죽이고 천신들 또한 반쯤 죽여놓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피로 일을 마무리하면 깔끔하지만 그 땅에 눌어붙은 핏자국은 웬만해선 지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피를 닦기 위해서 또 다른 피를 불러야 할지 모른다.
“매사 걱정이 많은 게, 네 단점이야.”
이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던 둘째가 웬일로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소식 없는 셋째를 걱정하다가 얼굴이 상한 첫째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매사 걱정이 없는 건, 네 흠이고?”
“그럴지도.”
둘째는 나태하지만 한번 마음을 먹으면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이 셋째에게 유리한 쪽이든, 첫째가 원하는 평화로운 방식이든, 둘째가 가만히 있다는 건 아직 나설 마음이 없다는 뜻이렷다. 첫째는 셋째의 궁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봐야지.”
셋째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하는 쪽을 선호했다. 하여 그는 자신의 궁과 바깥 시간의 흐름을 달리해 두었는데, 어떨 때는 이쪽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궁에서는 열흘이 지났을 때도 있었고, 여기는 열흘이 지나 있는데, 그의 궁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궁의 시간 흐름은 그 주인의 마음이요, 하여 그 산신령을 데리고 들어간 게 그 안에서는 벌써 몇 날 며칠이 흘렀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산신령에게 가르칠 만한 것은 다 가르쳤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산신령은 백골이 되어 다른 이를 구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