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셋째가 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는 거짓말을 해야 할 수고로움을 아예 모르는 이였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대개 그것으로 이득을 보거나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이지 않은가. 하나 셋째는 남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하튼 뭐든 모르는 쪽이었다. 그러하니 아무 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황이 꽤 심상치 않다는 뜻이렷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답을 기다리기보다는 찾아가 두 눈으로 봐야겠다.
그리하여 첫째가 오래간만에 외출 채비를 차렸다. 두 번 물어볼 것도 없이 가지 않겠다는 말을 제 얼굴에 써 붙여놓은 것 같은 둘째를 뒤로하고서.
지나가던 바람들이 그의 손끝에 모여 작은 회오리를 만드는데, 그 크기가 점차 커져 첫째의 몸을 집어삼킬 정도가 되었다. 흡사 바람이 만든 회오리에 잡아먹히는 모양새였으나 드러누운 둘째의 얼굴은 그만저만하기만 했다.
“나 거기서 감주 좀 얻어다 주라.”
쌩한 인사를 전하는 둘째였으나 첫째는 사람 좋게 웃으며 회오리에 몸을 맡겼다. 회오리는 첫째의 발끝부터 먹어치우기 시작하더니 온전히 삼킨 후에는 점 같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내 흙먼지만 일으키고 사라진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드러누운 둘째만이 있을 뿐이었다.
제 형제가 남긴 신력의 여운을 느끼며 누워 있던 둘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큰 난관에 부딪혔다.
“돌아가기 귀찮다.”
그리하여 첫째가 다시 제 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드러누워 있었다는 것은, 훗날 첫째의 궁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 * *
셋째의 취향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나무를 좋아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단지 보기 좋으니 모아둔 것 같기도 하고. 수집하듯이 꽂아놓은 수많은 종류의 나무 길을 지나던 첫째는 유감스러웠다. 이쯤이면 자신이 온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셋째의 무심함에 혀를 찼다.
첫째는 산뜻한 나무의 내음을 들이마시며 굳게 빗장이 잠겨 있는 문을 두드렸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오지 말라는 푸대접이었지만 언제 셋째가 그를 환영해 준 적은 있었던가. 이미 푸대접이 익숙한 첫째는 힘으로라도 열고 갈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한데 문이 의외로 손쉽게 열리는 것 아니겠나. 평소 담이라도 뛰어넘는 정성을 보여야 어렵사리 문을 열어주던 셋째였거늘. 개과천선이라도 하였나 싶어 첫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활짝 열린 문 안에서 향긋한 꽃내음이 났다. 궁에 화사한 진달래가 피어나 있었다. 원체 계절을 잊은 셋째의 궁이었지만 궁 안쪽에는 돌멩이 하나도 두지 않았던 심보를 잘 아는데 말이다.
첫째는 혹 궁을 잘못 찾아온 것인가 고심하였다. 하나 이렇게 널찍한 궁을 심심하게 꾸며둔 자가 어디에 또 있을까. 셋째 같은 이가 둘이라니. 그건 이 땅에 좋지 못한 징조였다.
“희사 님?”
희사.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첫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포근한 구름을 타고 있는 여인 하나가 눈을 빛내며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구름 위에 선 두 발은 위태위태하게 떨고 있었으나 여인의 타는 품새는 한두 번 타본 것이 아닌 듯 익숙해 보였다.
“아니 아까 저기에 계셨는데. 언제 또 이리로 오셨답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휘둥그레진 눈을 한 여인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풀나풀하는 소매가 달린 웃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신령이었고, 흑단 같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른 귀염성 있는 여인이었다. 새끼 노루처럼 순진한 눈이 첫째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이 여인이 구왕을 훔쳐먹은 산신령임을 알아차렸다.
“살아 있었구나.”
“아이고. 아침을 잘못 잡수셨나.”
확실히 이곳은 바깥보다 세월의 흐름이 느렸다. 못해도 스무 배는 느리게 명령해 둔 것 같았다. 궁 안에서 스무날을 보내도 궁 바깥으로 나가면 하루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대체 이 여인은 궁에서 며칠을 보낸 것일까.
“희사 님.”
여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구름에서 뛰어내려 첫째의 앞으로 황급히 뛰어왔다. 당장 침이라도 놓아줄 것처럼 요리조리 첫째를 둘러보는 눈은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신령 중에서도 이처럼 맑고 깨끗한 령은 보기 힘들었다. 주변에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건대 물과 관련된 태생인 것 같다.
첫째는 다정다감한 얼굴로 여인에게 물었다.
“내 이름이 희사니?”
“예에?”
여인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아예 푸르게 질려가고 있었다. 속내가 다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어디에 눕혀서 머리를 열어봐야 한다고. 여인의 손이 서서히 들어 올려져, 첫째의 이마라도 쓸어보려고 오는 순간이었다. 걱정을 담은 손이 이마에 닿기 전 찬 음성이 여인을 막았다.
“난 널 부른 기억이 없는데.”
서늘한 기운이 고인 목소리에 벽이라도 쏟아진 듯 놀란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의 뒤에, 저 한참 뒤에, 큰 전각의 문에 기대어 선 사내는 첫째가 아는 셋째가 맞았다. 희사라는 청초한 이름을 갖게 된 셋째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첫째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아, 저, 그것이.”
당황한 듯 보이는 여인의 이름은 멀뚱히 선 셋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령 산영.”
산영이라는 이름이 불리자 이 천진난만한 산신령은 뒤돌아 셋째에게로 뛰어갔다. 산영의 뛰어가는 등에서 읽힌 것은 그녀가 이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는 얼굴이 둘이 되자 그나마 제 이름을 아는 자에게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 터였다. 첫째는 가여운 산영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고랫등 같은 전각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첫째의 입꼬리는 씰룩쌜룩 올라가고 있었다. 걱정을 한 아름 안고 뛰어왔더니 이게 웬걸. 축배를 들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 냉혈한 셋째의 등이 안락한 보금자리라도 되는 듯 숨은 신령이라니. 첫째는 퍽 두 사람이 다정한 사이인가 보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이리 재미날 데가.”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으나 셋째가 알아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형제의 방문이 어째서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이루어졌는지 눈치챈 셋째의 얼굴은 그다지 노여움이 없었으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분노의 감정은 모르나 성가심을 느낄 수는 있는 셋째였다. 그가 성가심을 느낀다는 것은 극상의 불쾌함을 나타낸 표현이었다.
첫째의 발이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닿았다. 하나하나 느긋하게 올라오는 그를 보고 산영이 셋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 선 모두였다.
“아니 저것이 얼굴 빼먹고 산다는 그 귀신이 아닙니까.”
하늘의 사람이 저따위 미신을 믿는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신력을 부릴 수 없는 땅의 사람들이나 믿는 하찮은 미신 따위를 셋째는 묵묵히 듣고 앉아 있었다.
그 또한 재미난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산영을 내려다보는 셋째의 눈은 어이없다는 빛을 띠고 있지만 애초부터 셋째는 그런 미신을 그냥 들어주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전각 앞, 셋째의 코앞까지 당도한 첫째는 미워할 수 없도록 사근사근히 말했다.
“감주를 좀 얻으러 왔지. 둘째도 먹고 싶다고 난리를 부리는 통에.”
하늘의 사람들은 먹는 것에 퍽 집착하는 편이었다. 한 알을 먹으면 일 년을 거뜬히 보낼 수 있는 열매가 있는데도 극상의 맛, 최상의 맛을 찾아 음식 솜씨가 뛰어난 종을 찾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긴 생을 사는 데에 맛난 음식만큼 재미난 게 또 있으려고. 땅의 사람들은 모르는 별미를 수백 가지를 차려놓고도 겨우 몇 젓가락 할 만큼 입맛이 까다로운 것이 또 하늘의 사람이었다.
특히 하늘의 사람들은 음주 가무를 즐겼는데 그런 자리에 또 맛난 술이 빠지면 섭섭지 않겠나. 하늘에서 이름난 술들은 여럿 있었고, 개중 셋째의 보리감주는 맛이 기가 막혔다. 종종 얻으러 왔으니 오늘도 그 핑계를 대어보았지만 셋째는 그것이 아님을 진즉에 안다는 눈치였다.
“이리 세워두기만 하려고?”
은근히 섭섭해지려는 차였다. 제가 무슨 팔 척 귀신이라도 되는 양 보고 있는 산영 하며, 푸대접을 넘어선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는 형제 하며. 어디 가서 미움이라는 걸 받아본 적 없는 첫째의 가슴에 생채기가 날락 말락 했다. 물론 반쯤 농담이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착한 산신령에게 한시라도 빨리 해명은 해야 할 듯싶었다.
셋째는 가타부타 말없이 전각 안으로 몸을 돌렸다. 거절의 말이 없다는 건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렷다. 산영은 저와 둘만 남겨지는 게 싫은지 셋째가 가는 곳으로 졸졸졸 쫓아갔다.
“이거 참.”
전각 안으로 발을 들이면서도 첫째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뚝뚝한 셋째를 무서워하여 그에게 매달리는 이는 보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이 긴 생에서 처음이었다. 그간 셋째는 이런 서러움을 매일 달고 살았던가 싶다가도, 서러움을 모르는 그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