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22
22화
기왕 이렇게 된 것 산영은 돌 위에 주저앉아 신력을 흙바닥에 쏟아부었다. 그러는 사이 산영의 식구들은 미주알고주알 옥룡산의 일을 일러바쳤다. 한 마을 노인이 불에 탄 옥룡산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린 일, 누군가 신령이 다쳐 산 기운이 탁해졌다고 혀를 쯧쯧 찬 일, 산영이 없으니 기운 없는 옥룡산은 과실이 더디게 나고, 산딸기는 싱거운 맛이 나고, 짐승들은 기가 죽어 숨어들었다고 했다. 그 서러운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화마에 당한 초목과 산꽃이 헤어진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내가 너희 곁에 있어야 했는데.”
하나 먹은 구왕의 값은 내야만 했다. 자연히 널따란 궁에서 서책만 들여다보고 앉아 있을 이가 생각났다. 산영은 부쩍 수척해진 산토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약조하마. 더 강해져서, 하루에 한 번씩 내려와도 아무 말 못 하도록 할게.”
오랜만에 제 안방에 왔다고 산영은 마냥 드러눕고 싶었다. 하나 하루를 십 년 같이 기다린 옥룡산을 위해 부지런할 수밖에. 아랫목이나 다름없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기도를 올렸다. 저를 옥룡산의 신령으로 만들어준 천제의 손길에게 빌었다. 부디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무탈하고, 악한 이가 걸음 하지 못하고, 마음씨 좋은 이들이 지나가다 쉬는 곳이 될 수 있기를.
산영은 계곡 바위에 앉아 옥룡산을 내려다보았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싹을 틔우는 나무, 꽃이 피길 바라는 이름 모를 들풀들, 생명이 움텄음을 알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풀벌레들을 보았다.
겪지 않아도 될 일에 휘말린 가여운 식구들. 때마침 늙은 호랑이가 다가와 산영의 다리에 코를 비볐다. 산영은 늙은 호랑이를 끌어안고 씁쓸함을 견뎠다.
“홀로 얼마나 속을 끓였을꼬.”
곧 호랑이 두 마리 정도를 더 들여올 작정이었으나 다행히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덕분에 아직은 요 호랭이 하나로 충분할 듯싶었다. 원래 호랑이들은 자리싸움이 치열하여, 뒷방으로 밀려난 늙은 호랑이들은 맥을 못 추는 법이었다. 산영이 곁에 있으면 싸움을 중재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맡겨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 나무꾼 얼굴은 기억하지?”
호랑이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영은 한숨을 쉬며 호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산이 사람에게 외면받기 시작하면 그 아무리 좋은 산일지라도 깡그리 죽어가는 법이었다. 산영은 사람의 발길을 막는 주술을 풀어두었다. 혹여 일이 생기면 알릴 수 있도록 신력을 호랑이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처럼 뺨이 쑥 꺼졌던 호랑이가 달라졌다. 누런 송곳니는 날카로워지고 눈빛은 독충 저리 가라였다.
산영이 한시름 돌리고 있을 차였다. 머리 위에서 폐부를 찌르듯 시린 목소리가 울렸다.
[약조를 어기면 곤란한데. 하룻밤 자고 돌아올 작정인가?]목소리의 뒷맛은 남았으나 그 주인은 온데간데없다. 호랑이는 후다닥 일어선 산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들선들한 바람결에 취해 헛소리를 들은 건가. 산영은 애써 미소를 짓고 호랑이를 쓰다듬었다.
때맞춰 머리는 희사의 말을 상기시켰다. 시킬 일이 있으니 자지는 말고 돌아오라고 했었나. 당장 돌아가야 함을 아는데도 산영은 뭉그적거렸다. 아직 산영의 마음은 이 옥룡산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어떤 이의 발도 도달하지 못하는 궁에 비가 내렸다. 열어둔 문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가 넘어왔다. 하늘 전역에 내리고 있는 이 비는 평범한 소낙비가 아니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날씨라는 것이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거나 천둥이 친다든가, 우박이 내린다든가 하는 것이.
여하튼 날씨의 조짐이 석연치 않다면 십상 세 형제 중 한 명이 원인이었다.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기에 천신들은 날씨가 바뀌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세 형제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하늘에 날씨가 어지러워지면 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제가 기침만 해도 땅에서는 폭풍우가 인다고 하는데, 만일 천둥이라도 치면 땅의 사람들이 몇만 명씩 죽어나간다는 소리였다. 비는 그 혼란의 시작이었다. 하나 세 형제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비라는 게, 천둥이라는 게, 제 마음대로 치고 싶다고 치는 것도 아니고 거두고 싶다고 거두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심기가 극히 상하거나 슬프거나 화가 치미거나, 함부로 어찌 손볼 수 없는 심중의 영역이었다. 애석하게도 이 땅을 만든 천제가 끼치는 영향을 모두가 받는 구조였다. 하여 세 형제는 저들의 기분을 거기까지 몰아넣지 않았다. 극히 심기가 어지러울 만한 일은 웬만해선 없애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듯 나른한 둘째의 목소리가 형제 둘에게 퍼졌다. 웬만해서는 말도 제때 걸지 않는 둘째가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에 신경을 둔다는 의미였다. 비가 내리는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테니. 희사는 싱겁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큰 형님께서 또 실연에 빠지셨나.”
희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붓끝을 먹에 적셨다. 조짐이 이상한 천신 하나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쓰던 중이었다. 이것을 받고도 달라진 바 없이 타락한다면 끝을 낼 작정이라는 문장을 쓰고 있을 찰나. 어리둥절한 첫째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이찼다.
[나는 둘째 너인 줄 알았는데.] [무슨 잡소리야.]희사의 붓이 그대로 멈추었다. 먹이 한지에 스며들어 까맣게 변하는데도 움직임은 없었다. 희사의 눈만이 천천히 감겼다가 뜨일 뿐이었다.
첫째의 오지랖은 하늘에서 모를 정도가 없어, 가끔 제가 키우던 종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슬비를 내리는 경우가 있긴 했다. 이번에도 첫째의 얄팍한 눈물샘인 줄 알았건만. 달갑지 않은 첫째의 목소리에 한 번, 바깥에 내리는 비를 한 번, 가만히 제 머릿속에서 곱씹으며 앉아 있었다.
처마 끝에서 투둑투둑, 간신히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희사는 붓을 놓았다.
“설마. 너겠지.”
단호한 희사의 말에 억울함을 담은 첫째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니. 지금 막 피운 꽃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느라 정신이 없는데 슬퍼할 새가 어디에 있어.] [난 가만히 있다가 빗소리에 놀랐는데.]세 형제가 불러낸 비가 아니라면 이 비는 누가 불러낸 비란 말인가. 삼형제의 궁은 하늘 중심부에서 머나멀게 떨어져 있었고 하늘 전역에 비를 내릴 정도의 신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그것이 큰일이었다. 둘째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따져댔다.
[누가 거짓을 뱉는 것 같은데.]희사는 다시 붓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 없는 형제의 침묵을 기다리다 못한 둘째가 신경질을 부렸다.
희사는 짜증스러운 둘째의 목소리에 조용히 답했다.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네.”
[난 가만히 앉아 있었다니까?]“비는 내리고, 한 사람은 가만히 있었고, 한 사람은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렇다면 비는 내가 내리는 건가?”
희사의 물음에 두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비를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슬픔, 분노, 원한, 그 언짢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비를 내렸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내가 왜?”
자문에 가까웠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결 차분해진 둘째만이 어렵사리 대답했다.
[내가 짜증이 났나.]더 고민하기 싫다는 듯 드러눕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의 태만한 머리는 그쯤에서 생각하기를 그만둔 것 같았다. 첫째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말을 홀로 중얼거렸지만, 모두 답은 찾지 못하고 빗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희사는 다시 붓을 들지 못했다. 그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형제처럼 궁에 고인 물웅덩이, 그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열흘째 같은 풍경이었다. 빈 궁궐, 빈 전각, 빈 길가. 부르지 않으면 바람조차 드나들 수 없는 그만의 궁. 그는 이곳에서 열흘째 홀로 지내고 있었다. 산영에게는 하루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그에게는 열흘이었다. 산영이 떠나가고 세월의 흐름을 조정해 두지 않았다. 골칫거리가 없는 동안 남은 일을 느긋이 처리하리라고 여겼다.
[참 셋째야.]고요하던 그의 머릿속으로 상념 하나가 끼어들었다.
집 나간 망아지 같은 빗방울이나 제 앞에 내리고 있는 빗방울이나. 역시 비라는 것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형제가 울적할 때마다 찾아오는 이 번거로움 때문에 그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에 불과한, 맞으면 축축하고 습기가 차고…….
한데 오늘은 왠지 저 비를 멀거니 보고만 싶었다. 희사는 다시 붓을 쥘 생각을 하지 않고 편하게 두 손을 내려놓았다. 바짝 조여졌던 날카로운 신경이 저 빗소리에 풀리는 것 같았다. 첫째는 저의 자그마한 앙금이 울고 나면 사라진다고 했다. 그는 마음이 풀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다. 다만 신경이 느슨해지는 이 느낌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바깥을 향하였다. 바깥은 이 땅의 종말까지 적적할 것 같았거늘.
희사의 입술이 조금씩 벌어졌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껍게 맞으며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든 옷자락은 상관없다는 듯이 이따금 웃기도 한다. 그 철없는 모습이 너무도……. 비를 피해 뛰어 들어오는 이가 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를 알아본 눈치였다.
“희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