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문밖에서 서성이던 발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는 차오르는 짜증을 누를 수가 없는데 반대편에 앉은 이는 여유롭게 창밖 구경이었다. 방해받은 둘째가 희사의 느긋함에 발을 걸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애초에. 네 차례도 아닌데 여긴 왜 왔어.”
창밖을 향하던 무심한 눈이 둘째에게로 돌려졌다. 희사의 눈에는 희미한 지루함이 깔려 있었다.
“쉬고 싶어서.”
“그 신령이 산영인지 반영인지 하는 그것이지? 구왕을 훔쳐먹은.”
“한데.”
“자의든 타의든. 네가 처음으로 들인 종이라 그러한가. 아주 각별한 모양이야.”
둘째의 도발에 걸리지 않은 희사가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의도를 뻔히 알겠다는 미소였다.
“각별하지 않을 리가 있나. 남부럽지 않게 키워 골칫거리 사이에 던져 넣어주어야 하는데.”
살리든 버리든 아쉽지 않다는 투였다. 제가 벌을 내리려는 것을 막아서기에 그래도 일말의 정은 쌓였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흥미가 식은 둘째는 창밖에 눈길을 두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나 주는 건 어때?”
장난삼아 말한 것이었다. 탐 날 만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산영은 못나지 않은 인상이었다. 어차피 신령이야 또 구하면 되는 것이고, 전쟁이 코앞이라지만 희사의 궁은 세월의 흐름에서 비껴간 곳이었다.
희사가 조정해 둔다면 몇 년을 궁 안에서 보내도 모를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구왕을 먹이지 않아도 걸출한 신령 하나쯤은 구할 수 있었다. 저를 짜증 나게 한 벌로 평생 괴롭히며 수발들라고 해버릴까 보다.
그렇게 가벼운 복수심으로 불타던 둘째는 아무 말이 없는 희사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예의상 띠던 미소도 지운 채였다. 감정이 없다고는 하나 둘째가 보기에 그는 웃기도 자주 웃고, 기분 나쁜 표를 내야 할 때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뚝뚝하다고 생각될 만큼.
그조차 남을 흉내 낸다는 것쯤은 형제끼리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알더라도 희사의 감정이 깨끗하게 치워진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놀란 둘째는 쥐고 있던 찻잔을 슬며시 놓았다.
“주기 싫어?”
희사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오래간 알고 지낸 천신이라고 하더라도 잘못을 처벌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엊저녁까지 얼굴을 맞대며 웃다가도 그처럼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사람의 반성을 믿지 않았다. 사람을 모르기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사람을 모르기에 다시 고쳐 쓰기보다 뿌리부터 거두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었다.
볼 때마다 잠이 든 천제가 퍽 기막힌 것을 만들고 떠났다는 감상이 들곤 했는데.
“이름도 붙여주었던데. 희사? 참. 재밌게도 사는구나, 아우야.”
앞에 앉은 아우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심도, 무심함도 사라진 그의 눈은 둘째가 아니라 다른 것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희사야. 야.”
그 순간 희사는 답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그의 머릿속에서 전쟁이 일어났구나 짐작하고 있지만, 정작 희사의 머릿속은 침묵 서린 궁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째서 둘째의 말이 마치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끔찍이 조용한 궁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장면이었다. 한데 머릿속으로 제 전각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는 장면이 되풀이하듯 떠오르고, 그 밖은 방해 없이 조용하며…….
“어라. 이것 봐라.”
둘째의 당황함이 섞인 목소리가 작아졌다. 귀에 들린 것은 가느다란 빗줄기 소리였다. 희사는 눈을 돌려 흑색의 창문틀 뒤로 내리는 부슬비를 바라보았다.
엷게 내리는 빗줄기는 희사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고요하고 흐릿했다. 구질구질하다고 여긴 비를 보며 희사는 무심한 얼굴로 찻잔을 쥐었다. 하나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는 손에는 힘줄이 서 있었다.
“저번에 비 내린 것도 너지.”
희사의 귀에 둘째의 비아냥거림보다 먼저 들린 것은 자그마한 발소리였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유심히 듣던 희사는 더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형을 대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기뻐서 날뛰어야지. 내가 비를 내릴 수 있다는 건, 너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뜻이니까.”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자신이 비를 내릴 수 있다면, 잠이 들 수 없는 그의 형제가 꿈을 꿀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희사는 자신이 비를 내렸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래 살았다. 그 오래 산 세월 중에서 착각 한 번이 없으려고, 겹치고 겹치는 우연 한 번이 없으려고.
제가 돌려 말한 뜻을 알아들었는지 형제는 불쾌한 표정으로 변했다. 헛된 꿈에 매달리는 제 형제를 보면 나태하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목적으로 두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형제는 느려지기도, 빨라지도 하니까.
심기가 상한 형제는 지루한 술자리를 파하려는 모양이었다. 형제의 손이 붉은 휘장을 걷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한데 열자마자 나타난 것은 종과 신령이었다. 하나는 아까 부탁한 술을 들고 선 종이었고, 하나는 부름이 없는데도 제 발로 찾아온 신령이었다.
형제는 그의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신령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비가 내려도 젖을 땅이 없는 그에게 비를 퍼부어봤자 무슨 소용일까.
희사 님. 산영이 문 앞에서 입 모양으로 그를 불렀다. 둘째의 눈초리가 무서운지 수차례 손을 흔들며 그를 재촉한다. 화가 미치면 구해줄 것은 저밖에 없다는 듯이.
하나 형제보다 더한,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게 저라는 걸 알까. 제가 뱉는 말에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저 신령은 꿋꿋이 일어서서 이곳으로 왔다.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은 눈이 망설임 없이 제게 꽂힌다. 희사의 찻잔을 쥔 손끝이 잠시 움찔거렸다.
“방문하는 것에 허락이 필요 없는 사이인가 보네.”
끝나지 않은 형제의 비아냥을 무시하고 희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은 휘장을 걷은 형제의 등 뒤에 섰다. 제 가슴팍밖에 오지 않는 산영이 말간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희사는 손을 뻗어 종이 든 술병을 움켜쥔 후, 한 걸음 물러나며 산영의 방문을 허락했다.
“들어가도 된다는 얘기지요?”
“그런 것 같지. 나는 쫓겨나는 참이고.”
형제는 그 말만을 남기고 미련 없이 문턱을 넘어갔다. 눈치가 빠른 종은 산영에게 길을 터주었다. 차례가 돌아온 산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문턱을 넘었다.
문 앞에 서성이던 그림자가 멀어지자마자 희사는 등을 돌려 탁상 앞으로 갔다. 술병을 내려놓고 기다리자 머뭇거리는 산영의 발소리가 곁으로 붙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닐는지요.”
평상시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던 게. 몇 마디 싸늘하게 했다고 거리를 재는 기분이었다. 희사는 차분하게 술을 따르며 턱짓을 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산영은 문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재빠르게 희사의 앞자리에 엉덩이를 붙여왔다.
“생각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희사는 산영의 앞에 있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눈을 맞췄다.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막힌 묘수를 내는 듯한 얼굴로 산영은 앉아 있었다.
“오늘 본 아름다운 아이들이 다 영물이지요?”
“응.”
“제가 알기로 영물은 다 짝이 있지 않습니까?”
희사는 산영의 입에서 나올 말이 한심할 것을 알면서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데?”
“그… 오늘 본 영물 중에 제 짝이 있는 것 같사온데.”
“그래서.”
“그래서 말이온데. 그 형제분께서 가시기 전에 제가 먼저 산을 돌아보아도 될지요?”
희사의 기울어진 손은 잔을 가득 채우고서 물러섰다. 산영의 눈은 영물을 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 희사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싸늘해져 가는 참이었다.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신령. 제가 나서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둔한 것. 희사의 시선은 어리석은 신령에게 흥미를 잃고 바깥을 메운 부슬비로 옮겨갔다.
산영이 현저하게 떨어진 그의 관심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하다하다 부슬비에 마음을 주는 무정한 이였다. 산영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것처럼 떨렸다.
“자꾸만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창밖으로 대피하듯 가 있던 희사의 시선이 다시 산영에게로 돌아갔다.
“이대로 가면 자꾸만 생각이 날 것 같은데 어쩝니까.”
하나 마음을 다한 산영에게 돌아온 것은 희사의 매정한 물음이었다.
“네 생각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상관.”
“제가 희사 님의 유일한 손과 발인데도요?”
이래서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으로 그의 머릿속에 오래 남고, 곱씹게 되고, 곱씹다가 얻어걸린 것이 쓸데없는 충동을 불러온다. 지금처럼. 산영의 어리석음을 비웃다가도 동요하게 되는 것처럼.
“네가 왜 나의 손과 발인데?”
산영의 말에 또 휘말리고 말았다. 깨달았지만 갑작스레 내리는 부슬비처럼 갑작스레 든 충동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시지요. 그 넓은 궁에 겨우 저 하나지 않습니까. 제가 잡생각이 많아서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수련도 더디고 하면 희사 님이 퍽 곤란해지실 게 아닙니까.”
“곤란하지 않다면. 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리든, 말든. 내가 관여하지 않는다면.”
“곤란하실 텐데요.”
“왜?”
집요하게 파고드는 희사의 물음에 준비해 둔 답안이 떨어졌는지 입술을 앙다문다. 하나 희사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초라하게 포기할 신령이 아니었다. 저 신령은 환영에 불과한 새 둥지까지 챙기는 신령이었다.
어리석고 나쁜 이들은 다루기 쉽지만 어리석고 다정한 이들은 다루기 어려웠다. 제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뒷일을 생각지 않고 덤벼들기 때문이었다. 희사는 이참에 산영의 이상스러운 마음을 꺾어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