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34
34화
원래 한 번이 어렵다고 하지를 않았나. 일단 물꼬를 트면 그 뒤로 드나드는 것이 한결 쉬워진다는 뜻이었다. 남녀 사이의 일이라고 무어가 그렇게 크게 다를까.
한번 길을 열면 쏟아지는 물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기는 것이 마음이었다. 주인어른처럼 지내던 사내가 근처에 있으면 마음이 술렁거리는 상대로 변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망 다니다가 잡힌 후부터 희사는 산영을 옆에 붙여두고 수련을 시켰다. 구름을 모아두고 산영의 울적한 감정을 담도록 지켜보는데, 하면 산영은 울적하기보다 신이 나버리는 것이었다.
산영은 집중이 흐트러지는 자신을 질책하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으나, 어쩌다 마주친 희사의 눈이 웃고 있으면 머리가 어질거렸다.
방금도 산영은 수련을 하기 위해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고, 희사는 옆으로 누워 산영을 바라보았다. 애써 따라나온 흑둥이에게로 시선을 돌린 산영은 그의 관심을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
“보지 마시라니깐.”
“네 집중의 문제인 듯한데.”
“자꾸 보시면 어떻게 울적해지라고…….”
“왜. 내가 네 기쁨이라도 돼?”
산영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엄지로 매만졌다. 다급히 깜깜한 머릿속에 상상을 집어넣었다. 옥룡산이 불타올랐을 때의 적적함, 막막함, 그리고 하늘을 헤매는 미아 같은 감정. 하나 끝에 다다라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자 끌어모았던 울적함은 날아가고 말았다.
이 음탕한 상상력은 끝을 모르고 입맞춤의 기억까지 끌어가니, 자신이 좋은 산신령이 되려면 우선은 희사부터 없애야 할 노릇이었다.
“허어…….”
산영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희사의 얼굴에 생전 느껴보지 못한 짜증이 일었다. 똑같이 먹고 자고 하는데 저쪽 상판은 하늘에서도 손꼽을 만하고, 이쪽은 잠을 설쳐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한 몰골이었다. 산영이 심란한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훑자, 팔을 베고 누워 있던 희사가 웃으며 물었다.
“벌써 그 애달픈 수련이 끝났나?”
“희사 님.”
“응.”
“요즘따라 왜 이리 자주 웃으시는지요?”
예전에는 귀한 웃음 한 번 보기가 어렵더니 이제 와서는 매양 웃고 다니는 얼굴이었다. 물론 남이 보기에는 저것이 웃는 것인가 마는 것인가 하지만, 산영은 퍽 쌀쌀맞던 그를 뚜렷이 기억하는 터였다. 이렇게 따스한 미소는 천 냥짜리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입술을 비빌 것을, 무엇하러 호박씨를 깠는지 모를 일이었다. 산영은 올라오는 미소를 억누르며 다스렸다.
아무래도 저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산영은 빨개진 뺨을 가릴 수 없으므로 당당히 내버려두었다. 어쩐지 저번부터 자꾸만 저를 괭이처럼 쓰다듬는 게 수상쩍다 싶었다.
언제였을까. 하기야 매일 같이 붙어 있었으니 제게 마음을 주지 않기가 어려웠을 게다. 그래도 그렇지 사내가 연정을 고백하는 것보다 입술이 먼저 나가는 게 말이 되는가. 산영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희사를 흘기듯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민망함을 섞은 듯 내리깔았다.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집중하려고 하였다. 한데 감긴 눈은 못내 그를 그리워했다. 산영은 흘깃 눈을 떠 햇볕을 받고 있는 희사의 머리칼을 보고, 흘깃 눈을 떠 그의 콧잔등에 내려앉은 그늘을 탐하였다.
남의 고민이야 많이 들어줬다고 하지만 산영은 사내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숙맥이었다. 희사처럼 입술부터 들이민 사내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을뿐더러, 가볍게 그럴 이가 아니라는 확신에 더욱 마음이 가는 중이었다.
그때 산영의 음탕한 생각의 꼬리를 자르듯 희사가 눈을 떴다. 그는 기지개 켜듯 팔을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해야 해?”
산영의 앞으로 다가온 희사가 무릎을 굽혔다.
“아니, 그것이.”
“나 들어갈 것인데.”
“그럴 만도 하지. 저기에 계속 말린 콩처럼 누워계셨으니. 제법 더우시지요?”
산영은 걱정이 들었다. 손부채질로 그의 얼굴에 미약한 바람이나마 불어주다가, 문득 바람을 부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고 말았지만. 정성을 아는지 부채질하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산영의 손을 희사가 부드럽게 잡아채었다.
“이런 것으로 더위가 가실 리가.”
“아무래도 그렇지요……. 아! 찬물에 몸을 씻는 것이 어떠십니까?”
“도와줄 터지?”
“제가요?”
“다른 종이 내 몸을 보아도 괜찮겠어?”
“아니 그것을 그렇게 대놓고.”
다른 이에게는 보여주기 부끄러우나 마음을 준 자신만은 괜찮다는 소리 아닌가. 아무리 아니다, 아니다 해도 이건 보면 볼수록 중증이었다.
제 매력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희사가 가여웠다. 후텁지근해진 산영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무리 제게 마음을 표현해도 벌써부터 몸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무슨 사내가 저렇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인가. 제가 단호히 거절하면 용기를 낸 그의 마음이 어떨까. 산영은 하는 수 없다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과 없는 맹탕 같은 수련을 마치고 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숙맥 중 숙맥이라 도망 다녔지만, 볼수록 그는 여인의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콩깍지가 쓰인 산영은 사내의 애간장을 태우지 말고 봐주자며 킥킥거렸다.
희사가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데 문득 그의 빈손이 보였다. 자신이 먼저 잡아주면 좋아서 껌뻑 죽지 않으려나. 산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손 근처에서 뭉그적거렸다. 누가 보면 자신이 먼저 몸이 단 줄 알겠다고 혀를 찼다. 하나 산영의 눈은 희고 곱다란 손을 수차례 훑었다.
“참 날이 더우면서도.”
산영은 희사의 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강아지풀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을 잡고 싶어서 침을 삼켰다가 갑자기 기개를 잃고 물리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그렇게 곁에서 얼쩡거렸는지, 눈치를 챈 희사가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잡고 싶어?”
“예에? 아이고 무슨.”
쥐뿔 관심 없다고 펄펄 뛴 산영은 일부러 희사가 저 멀리 갈 때까지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하나 희사는 산영이 멈추어 서자 똑같이 멈추어, 욕심 난 산영에게 고운 손을 내주었다.
“잡으려면 잡아.”
말 참 이상하게 한다. 정작 잡고 싶은 것은 그가 아니었던가. 산영은 마지못해 잡아준다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나 솔직한 산영의 손은 솔개가 먹이를 낚듯 그의 손을 낚았다. 잡은 그의 손을 잠시 조몰락거리다가 산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하나 산영의 귀 끝이 붉은 것은 굳이 오래 보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다.
잡기는 잡았으나 천천히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걷는, 산영이 꿈꾸는 그림처럼 되지는 않았다. 희사의 다리와 산영의 다리는 길이의 차이가 있어, 아무리 그녀가 빨리 걸어도 희사의 한 걸음만 못할 때가 많았다.
손을 엮은 채로 희사가 앞서 걸으니, 산영은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하나 산영은 그것만으로 이미 얹힌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홍시보다 붉게 익은 산영을 보고 밥그릇을 닦던 종 하나가 놀란 얼굴을 했다. 하나 희사를 알아본 종은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게 주어진 몫을 다하듯 시선을 그릇에 박아둘 뿐이었다.
* * *
산영이 노동력을 바친다고 하였으나 그간 희사가 요긴하게 부린 적은 없었다. 되레 궁에서 놀고먹어도 제지하지 않는, 괴상한 나무의 주인이었다.
도둑을 붙잡아두고 살을 찌우고 앉은 주인이라. 은근히 마음이 불편하였는데 이유가 다 있었다. 제게 마음이 있어서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못한 것이리라. 산영은 히죽 웃으며 따끈하게 덥힌 물을 바가지에 펐다.
목욕하겠다는 그의 말에 종 하나가 더운물을 가져다주었다. 찬물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산영의 말에 ‘따듯한 물로 하셔도 충분히 시원하실 겁니다.’ 하며 빌 듯이 매달리는 종이었다. 하는 수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탕으로 간 산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바가지만 놀리는 중이었다.
퍼런 서슬처럼 날카롭던 희사는 마음이 정해지면 밀고 나가는 성품인가 보다. 좋아하는 여인의 앞에서 훌렁훌렁 허리끈을 끄르질 않나, 맨 살결이 보이도록 욕탕에 팔을 올려두질 않나.
덕분에 멀쩡한 산영만 눈을 바짝 감고서 목욕 시중을 들게 생겼다. 당장 불똥처럼 튀어버리고 싶었으나 산영은 처음으로 주어진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할 처지가 아닌가. 산영은 떨리는 마음을 자기 빚듯이 다듬었다.
“머리에 물을 묻혀드릴까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가지를 잡고 물었다. 그런 산영의 등 뒤에서 웃음기 담은 목소리가 넘실거렸다.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데.”
“대보시지요.”
그의 웃음소리가 한결 더 커졌다. 산영은 민망스러워 바가지를 힘없이 놓았는데, 부쩍 가까워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내 손을 잡을 때는 그리 당당하더니. 단둘이 있다고 내외하는 건가?”
“아유, 희사 님이 먼저 잡아달라고 그러셨으면서.”
“내가 그리 말했어?”
“아니, 말은 한 것이 아니라…….”
산영은 후끈한 욕탕의 온기도, 끈끈하게 달라붙는 그의 목소리도 어지러웠다. 가쁘게 숨 쉬는 산영은 오가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망상하던 내용을 술술 불게 되자 당황한 것은 산영이었다.
산영은 입술을 패대기치고 싶었으나 두고 보았다가는 밑천까지 다 드러나게 생겼다. 산영이 막 자리를 박차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나타난 손이 산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씻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