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36
36화
“고원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제정신이야?”
천제의 두 번째 조각은 이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물을 가진 이는 영물이 적응될 때까지 영화의 궁에 있는 게 최선이었다. 한데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의 형제가 어깃장을 놓다니. 영물을 막 가진 산신령을 제 품에 끼고 다니겠다는 것 아닌가.
아까 전 욕탕에서 보았을 때도 내심 질겁했지만 잔소리하지 않았는데, 이거 갈수록 눈 뜨고 못 봐줄 기분이었다.
늘어져서 다과를 먹던 둘째가 체할 것 같아 일어섰다. 첫째는 조심스레 여기에 두고 우리끼리만 갔다 오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그의 아우는 의견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침의를 걸치고 입가에 담뱃대를 문 희사는 느긋해 보였다. 그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지만 예전과 다르게 흐릿해진 것이 보였다.
목적 없이 태어난 이 땅의 모든 것과 다르게 형제들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정하여도, 태만하여도, 무심하여도 목적을 잃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나 둘째의 감은 자꾸만 다른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가장 목적을 잃지 않을 것 같던 이의 끈이 얇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목적을 잃고 끊어진 연이 어디로 날아갈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안 돼. 두고 가.”
그저 일을 위해서 홀리는 것이라기에는 욕탕의 문을 열기 전까지 제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혼을 다해 열중한 입맞춤, 문을 열고 들어온 형제를 서걱거리며 썰 듯이 보던 시선.
아우의 계획이 치밀한 것인지, 제 감이 뛰어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산영이 사사건건 엮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 산신령은 아우가 계획적으로 친 거미줄에 우연히 걸려든 나비였다. 하나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먹지 않고 날려 보내야 하거늘, 어째 거미는 갈수록 그 나비를 맛보는 데에 골몰하는 것만 같았다.
희사는 데려가겠다는 의견을 반대한 형제를 눈앞에 두고도 덥석 화를 내지 않았다. 회색의 연기를 한차례 뱉고서 그의 입술이 미소로 열렸다.
“네 의견을 구한 게 아니야.”
“하면. 우리의 허락 없이 데려가겠다고?”
“골칫거리라며 그 신령을 맡으라고 그렇게 성화더니. 이제 와 선심 쓰듯 주는 허락은 필요 없어.”
치열한 두 형제의 중심을 잡기 위해 첫째가 끼어들었으나 그의 눈은 둘째와 다른 의미로 빛나고 있었다.
“저 아이가 네게 특별하니?”
첫째의 따듯한 마음은 언제나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랐다. 아마 가장 헛된 꿈을 꾸는 이가 있다면 그일 것이다. 온 세상이 눈물 흘리지 않기를 바랐고, 죽거나 다치는 이가 없기를 바랐고, 아우가 조금이나마 온기를 갖기를 바랐다. 희망의 싹을 본 첫째의 만면은 기대로 가득 차 있으나, 담뱃대를 내려놓은 희사의 눈은 그 기대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특이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신령. 귀여운 구석은 있으나 그뿐이야.”
목욕을 하고 와 나른해진 희사는 다리를 탁상에 올려두고 등받이를 젖혔다. 희사는 계속해서 주입하듯이 말했다. 그뿐이라고, 제 목적을 위해 견고하고 치밀한 가면을 썼을 뿐이라고. 그것은 그의 계획이 조금도 수정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바였다.
하나 분명히 해둘 것은, 희사는 왜 굳이 고원으로 산영을 데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형제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욕탕을 나가는 산영의 등에 대고 얌전히 이 영화의 궁에 처박혀 있으라고 말할 참이었다. 한데 뜨거운 목욕물 때문인지, 혹은 그와의 입맞춤 때문인지, 홍시 같은 뺨을 가진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산영이 제 겉옷을 이불처럼 감싸고 돌아보았을 때.
희사는 손쓸 수 없는 충동에 갇혔다. 이곳에 남겨두기보다 챙겨가기로 변질했다. 산영을 안 순간부터 혼자이지 않았던 날이 긴 탓일까. 희사는 습관처럼 산영이 있을 침방을 보며 매끄러운 입 안을 훑었다.
사람은 목적지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두고도 쉽사리 다른 유혹에 빠지곤 한다. 분명 저 길로 나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색다른 길이 주는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또한 거창한 이름이 붙었으나 결국은 사람이란 소리였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은 지름길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한 번쯤은 색다른 길을 택해보고 싶은 충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작이 선뜻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긴 삶을 살아왔다. 하나 장담컨대 요즘만큼 재미가 솔솔 부는 때는 없었다.
잠시 정도를 비껴가서 쉬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희사는 뒤로 고인 길을 택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목적지는 잊지 않았다고, 정도를 잊지는 않았다고, 형제의 기우는 기우라고, 그렇게 확고히 생각했다.
* * *
산영은 햇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덧단 차양을 바라보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하였다. 하나 동시에 깨어난 머리는 어제의 일을 재빠르게 되짚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도 그렇지.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숙맥이거늘, 저쪽은 놀대로 논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좋아하면 다 이러는 건가 싶다가도, 마음이 통하면 손을 잡을까 말까 한 땅의 사람들 생각이 났다. 곰곰이 따져도 희사의 태도가 남다른 것이었다.
눈뜨자마자 희사를 생각하니 입맛이 싹 달아났다. 산영은 물릴 것 같아 식사를 미뤄두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바람이 들게 문을 열었다. 한데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세숫물을 들고 선 종이 있는 게 아닌가. 산영은 보고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오셨으면 말을 하시지.”
“기침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예에.”
산영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종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저것은 나가라는 신호가 아닌가. 바리바리 싸놓은 짐들은 언제 꺼내놓았는지 모르지만 모두 제 것이었다.
산영이 희사의 궁에서 챙겨온 참빗이나 자그마한 바늘과 실 같은 꾸러미, 혹시 몰라 이곳에서 얻어둔 여분의 옷까지 죄 싸여 있었다.
산영이 제 발을 보는 것을 알았는지 종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산수 고원으로 가신다고 들어서요.”
“누구 말씀이신지.”
“신령께서.”
“여기 신령이 저 말고 또 있습니까?”
산영은 자신의 물음이 얼마나 바보같이 들렸을지를 알았다. 딱 보아도 이 영화의 궁에 머무는 신령은 자신밖에 없었다. 기가 차게도 산수 고원인지로 떠나는 신령이 자신이었다.
난생처음 듣는 곳으로 쫓겨나는 게 기가 차서 밖을 내다보니, 종의 뒤로 짐보따리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작 저 하나 떠나는데 무슨 짐을 저리 챙기는가 했더니만. 곧 재수 없는 희사의 형제 하나가 불퉁한 표정으로 휘적거리며 걸어왔다.
종은 산영과 말을 하다가 말고 고개를 숙였고, 산영도 마지 못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간밤에 안녕히…….”
“뭘 꾸물거려?”
“꾸물이라니요?”
“나오라고.”
그 말에 종이 손수 방문까지 열어주었다. 일견 친절해 보이지만 결론은 저 말을 따르라는 뜻이었다. 옳다구나 들어주고 싶지 않은 산영은 일부러 하품하며 느릿느릿하니 발을 떼었다.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눈빛과 산영의 두루뭉술한 반항이 대치하고 있을 때.
그 재수 없는 사내의 뒤에서 산영의 임이 절도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당장 억지로 벌린 입을 다물고, 헝클어진 머리를 곱게 빗은 산영이었다. 그런 산영의 모습을 보고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하나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희사가 산영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굳이 내려오라고 말하지 않아도 산영은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아까 굼뜨게 꿈질거리던 것과 달리 신을 던지듯 신고 내려오는 산영을 보고 안 그래도 기가 찼던 사내는 더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대단한 인물이야.”
산영은 젖은 의복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 위에 입고 있던 희사의 겉옷도 그대로 입고 나온 셈이었다. 세수도 하지 못한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희사의 곁으로 온 산영은 언제 하품을 했냐는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제가 산우 고원에 간다지 뭡니까?”
산영의 신이 난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희사의 형제였다.
“멍청한 것. 산우가 아니고 산수.”
“그리 말했는데요.”
“너 방금, 산우라고 하였거든?”
“산수라고 하였는데요.”
두 사람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여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차였다. 오기가 생긴 희사의 형제가 말을 씹듯이 물었다.
“야. 아우야. 너도 들었지. 저것이 산우 고원이라고 하는 것.”
“아니요, 아니요. 저는 분명 산수라고 했읍지요.”
두 사람의 유치한 말장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희사였다. 혀를 내민 산영을 끌어다가 폭 안아버렸다. 졸지에 따듯한 품에 안기게 된 산영은 고개를 내밀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기로 우기고는 있는데, 이 사내가 과연 제 편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다.
하나 산영은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희사의 눈앞에서 더는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혀를 꼭 깨물고 얌전히 안겨 있자 승리의 미소를 지은 사내가 보였다. 생억지로 얻어낸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형제였으나 희사는 거기서 산통을 깨는 발언을 했다.
“널 싫어하는 이와 왜 말을 섞지?”
“절 싫어하십니까?”
“그렇다던데.”
맹세코 둘째는 제 입으로 산영을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경계했을 뿐이었지. 저 갓 태어난 것같이 천지 구별 못 하는 신령을 미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나 희사의 간악한 혀는 실망 어린 눈을 한 산영의 귓가에 날름거렸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누구의 말에 대답해야 하는지, 누구의 품에 안겨야 하는지, 이쯤이면 알 때도 됐는데.”
“희사 님의 말만 잘 들으라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