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산 넘어 산이다. 산영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고전하는 중이었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째려보아도 상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사라진 희사의 걱정에, 여물은 제때 먹었을지 모를 흑둥이 걱정에, 산영은 곡기 끊은 것처럼 말라가거늘. 덧돈 먹은 약발이 그새 떨어졌는지 이 여관의 종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아닌가.
“글쎄, 나는 댁 같은 분을 모른다니까요.”
“하. 내가 여기 묵었던 게 일 년이 됐소, 삼 년이 됐소? 손가락 다섯 개가 접히기도 전이요!”
“안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락 말락 하니 흉흉한데…….”
떡을 드실래요, 차는 너무 뜨겁지 않으세요. 홍홍거리며 물어대던 게 어제오늘의 일이었다. 푸대접받으며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산영은 갑갑했다.
그래저래 박대하더라도 흑둥이는 무조건 돌려받아야만 했다. 산영은 문지방에 올려둔 발끝을 들이밀었다. 하나 여인 또한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서고 있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며 문짝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찰나였다. 신경질 난 산영은 한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내 영물이 여기에 없으면 깔끔하게 물러날 것이오.”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손님의 얼굴을 하루아침에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새빨간 거짓말일 게 분명하지만 돈 한 푼 없는 산영은 한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여관의 종은 만만하게 물러갈 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외양간 지기에게 손짓했다.
“아유, 한번 살펴보거라. 까만색 말 같은 게 있는지, 없는지.”
“까만색 말이 아니고. 영물.”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이 일어났다. 산영은 팔짱을 끼고 안을 노려보고 여관의 종은 영물이 없으면 두고 보자는 눈빛이었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노려보고 있을 때 종의 입에서 기어이 몹쓸 말이 나왔다.
“혹 전쟁이 일어날까 봐 도망치는 중입니까? 한 번 떼써서 묵어보려고?”
“어허…….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시오?”
잠자리 판다는 사람이 수치를 모른다. 희사가 떠나가자마자 눈꼴실 만큼 푸대접을 하다니. 사람대접할 줄 모르는 여관은 필시 망하는 길로 들어설 것이었다.
“대체 저희가 언제 그쪽을 모셨다고 이렇게 난리십니까?”
“불과 몇 시진 전까지 이름 없는 그분, 이름 없는 그분 하면서 허리를 이렇게 구부리지 않으셨소?”
잘만 나불거리던 종의 입술이 아교를 바른 것처럼 딱 붙어버렸다.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안색이 새파래졌다. 고소해진 산영은 때마침 여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흑둥이를 보고 손뼉을 쳤다.
“흑둥아!”
여관의 주인이 발뺌할 수도 없게 흑둥이가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죽어도 모신 적 없다고 눈을 홉뜨더니 실지 영물이 뒤에서 나타나자 까무러칠 눈치였다.
산영은 기세등등하게 흑둥이의 목을 끌어안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여관의 종은 할 말이 없어진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참 그러는 거 아니오, 사람이. 뭐 그분에게 잘 말해달라는 둥, 부족해서 송구하다는 둥 그러더니. 열 개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중요한 법이오.”
이러나저러나 귀한 추억이 담긴 여관이었다. 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충고 한 번 던져 주었더니만 여관 종의 표정이 이상하였다.
산영은 흑둥이를 데리고 다시 윤사의 강 하류 쪽으로 가볼 참이었다. 전쟁이 난다느니 만다느니 하는 판에 몸소 시끄러운 곳으로 간 희사를 어찌 속 편하게 기다리겠는가. 오랜만에 만난 흑둥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서두르려던 때였다. 갑자기 고운 손이 나타나 산영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저, 저기.”
나는 댁 같은 사람 모른다고 딱 잡아떼더니 인제서 기억이 돌아온 얼굴이었다. 산영은 의기양양하게 기억이 나셨냐고 물었지만 상대는 의심을 풀지 않는 눈이었다.
“참말 저희 여관에서 묵으셨습니까?”
“답답시러라.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손님 머릿수랑 받은 돈이랑 계산해 보면 알 것 아니오. 두둑이 받아 챙긴 것으로 아는데…….”
“참말로 이름 없는 그분이랑 함께 오셨다고요?”
듣자 듣자 하니 참말로 까먹은 얼굴이었다. 시치미 뚝 떼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날아가 버린 게 억울하다는 듯했다. 산영은 긴가민가하다가 이참에 묻어둔 질문이나 하자 싶었다.
“한데 이름 없는 그분이 대체 무업니까?”
“예에?”
“어디에 있는 천신이랍니까?”
혓바늘 돋도록 궁금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좋아한다고 물고 빨기 전에 그것부터 알아두어야 했거늘.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어쩐지 속상한 참이었다. 알아내면 희사에게 달려가야지. 그런 분이셨냐고 놀려줄 것을 생각하자 함박웃음이 났다. 하나 여관의 종은 그럴 줄 알았다며 산영을 훠이훠이 내쫓았다.
“그분의 이름을 팔아 겁박하다니. 그러다가 천벌 받습니다. 예? 아유,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
소금 가져오라며 소리치는 종의 말을 듣고 산영은 속이 답답해졌다.
“대관절 누구이기에 그럽니까.”
자신을 딱하게 바라보는 여관의 종이 옜다 선심 썼다 하며 다가왔다. 여관의 종은 노인처럼 허리를 굽히고 소곤소곤 귀엣말했다.
“하늘에서 가장 높으신 분을 그렇게 부릅니다. 앞으로 어디 가서 이렇게 그분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 몰매를 맞을 거고요.”
여관의 종은 소금을 한차례 뿌리더니 문을 탁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흑둥이와 산영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재수 옴 붙었다며 여관의 앞을 지나친 산영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종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오뚝 멈추어 선 산영은 찜찜한 의문을 하나씩 꺼내어보았다. 보배로운 구왕 나무를 가진 주인이고, 종 하나 없는 천신이면서 신력은 으뜸이고, 이름 없는 그분이 하늘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면.
천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놀란 산영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 벼락이 내리쳤다. 하늘 전역에 퍼진 천둥소리는 형제 산 쪽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저쪽에 희사가 있을 것 같다. 오들오들 떠는 흑둥이가 산영의 품으로 숨어들었다. 형제 산에 내리는 벼락이 산영의 마음에 불안을 주었다. 하늘을 깨무는 천둥소리가 온 땅을 흔들고 있음이었다.
천제일까. 그 까마득히 높은 천제. 설마설마 싶지만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산영은 까맣게 물든 형제 산의 하늘을 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괜스럽게 넘겨짚지 말자. 희사의 무사한 귀환을 바라는 게 먼저였다. 그가 지렁이든 천제이든, 우선은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돌아왔으면.
한데 산영의 기도는 매사 발아래로 보는지, 하늘은 새까만 구름을 바삐 거두고 있었다.
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 * *
흑색으로 바뀌는 하늘을 보며 솔개의 주인인 시왕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용의 주인인 녹원은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 비명 한 점 없이 수모를 견뎌내던 녹원이 아첨 떨 듯 자지러지는 것 보아라.
그들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중 시왕은 한시라도 빨리 천제가 나서주기를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쯤 하면 오겠거니 했는데 하도 소식이 없어 무시한 줄로만 알았다.
솔개에는 시왕의 신력 전부가, 용에게는 녹원의 신력 전부가 녹아들어 있었다. 만일 영물이 죽으면 주인도 죽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승부였다.
하나 장담컨대 녹원도, 시왕도 죽을 각오를 하지는 않았을 터다. 천제가 나타날 낌새가 보이자 곧바로 일름보처럼 변한 것이 그 증거였다. 승기를 잡은 시왕은 자신이 승자임을 보이기 위해 발톱을 세우고, 쓰라린 패배를 맛보던 녹원은 엄살 부리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둘 다 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시왕은 승기를 잡은 것이 자신이니 저 종을 자신에게 달라고 할 셈이었고, 녹원은 이처럼 행패를 부리는 것은 저쪽이니 종을 자신에게 달라고 할 셈이었다. 한데 벼락 치며 나타난 먹구름은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기다리다가 초조해진 시왕은 먼저 선수 치며 고래고래 외쳤다.
“저는 억울합니다! 어서 오셔서 제 억울함을 풀어주십쇼!”
하나 시왕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녹원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이 파렴치한 솔개를 죽여주십시오, 이 모든 일은 이자의 욕심이 부른 것입니다!”
저마다 억울하다며 서로를 겨누는 발톱, 엄니를 절대 거두지 않았다. 천제가 나타났음에도 자신의 사정만 보아달라며 우는 그들은 패배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심상이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둘 다 만족스러운 보상을 내려달라는 것이렷다.
이때까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워대던 게 모두 거짓이라는 듯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 것이었다. 상대를 죽여달라며 외치기 시작한 그들에게 내려오는 것은 수려한 사내였다. 보상인가. 아니면 드디어 승자를 정해주려나.
시왕은 뛰어난 솔개의 눈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내를 보았다. 하늘이 내리는 보상인가 싶었지만 사내는 턱을 거만하게 쳐든 채였다. 용은 솔개가 누르고 있어 위를 보지 못했다. 사태를 파악한 솔개가 후다닥 날아오르자마자 사내는 칼을 바로 잡았다.
사내는 어깨 위로 칼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용의 머리에 떨어진다. 솔개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이해했다. 세 형제는 군림하고부터 상식선의 방식만 고집하였다. 적절한 보상을 던져 주거나 정확하게 패자와 승자를 갈라주거나였지, 직접 나서서 칼을 빼 든 건 죄인을 처단할 때 빼고는 없었다. 하나 심판의 칼은 명확하게 용의 목으로 떨어졌다.
끼아아아아악. 칼이 꽂히자마자 용의 비명이 산 전체에 울렸다. 윤사의 강에 날붙이를 든 사람들조차 다 같이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솔개는 저만치 멀리 날아가 있고, 용은 몸부림치며 꼬리로 산을 부수고 있었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부서진 잔해들이 산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죽어가며 떨어지는 용의 비늘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한 번 칼을 꽂은 이는 무정히 용의 목을 칼질했다.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고 외쳐도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용은 자신의 목을 한 번에 썰어가는 자의 눈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안타까움도, 분노도 없는 눈이 용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목의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갔을 때 용의 혼은 영혼의 강으로 떠나가버렸다. 하나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칼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 용의 목을 몸뚱이에서 떨어트렸다. 죽은 용의 머리가 산밑으로 굴러떨어지자마자 검은 피가 산을 덮었다.
솔개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용의 피를 보며 구르듯이 산에 착지했다. 다급하게 기듯이 걸어가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 일을 마친 이는 옷 여기저기에 검은 피를 묻히고 말았다. 그는 한숨 쉬며 칼을 내려놓더니 솔개의 앞으로 곧게 걸어왔다.
“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