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Target RAW novel - Chapter 17
성환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있는 강욱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라마카루마의 근황을 살피러 나갔던 용병 중 한 명이 서준희라는 이름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기억했다. 용병을 붙잡고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물을 때는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흥분했다. 그리고 그녀가 묵고 있다는 모텔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서린 물기를 자신은 똑똑히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보고 또 다시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서 그에게 아직도 서준희라는 여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해군사관학교를 다닐 때도 그녀를 바라보는 강욱의 눈길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흩어짐이 없이 곧장 서준희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했었다. 최강욱처럼 이런 사랑을 하는 남자도 있구나 했었다. 자신은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어 강욱과 준희의 헤어짐을 몰랐지만 나중에 해사를 졸업했던 동기를 통해 들었었다. 강욱이 준희를 떠났다고……그때는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강욱이 그녀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었다. 자신이 아는 최강욱은 서준희를 완전히 떠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준희의 태도는 무언가 이상했다.
강욱에 대한 분노……그래, 그것은 분노였다. 원망과 분노가 뒤섞여 지독한 증오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강욱이 정말 서준희를 떠났다는 말인가……?
성환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서있는 강욱을 쳐다보았다.
“서준희, 많이 변했더군.”
성환의 말에 강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환을 바라보았다.
“……”
“예전의 준희는 밝고 웃음이 넘치는 아이였는데 지금의 서준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냉기가 흘러……너 때문이냐?”
강욱은 성환의 말에 비릿한 냉소를 흘렸다.
“그래……변했지. 많이……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강욱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희미한 갈등이 배어있었다.
“만약……만약에 내가 그 아이를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행복하기만 했을까…?”
강욱은 질문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다른 누구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5년 전 그때 무사히 준희가 풀려나고 그가 옆에 있었다면 그들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했을까……알 수 없었다. 준희는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했고 그 아버지는 준희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서희준……그 자식은 준희를 향해 적개심과 악의를 가지고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자신처럼 뒷 배경 하나 없는 천애 고아가 준희의 아버지나 서희준을 넘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한이 된 준희를 이름만 아버지인 서남일 대령과 야비함으로 무장한 그의 의붓아들 서희준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그들이 내치는 어떤 칼날에도 준희의 든든한 방패가 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그대로 남았더라면 자신의 힘으로가 아닌 누군가에게 의지한 채 준희를 지켜야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없는 5년의 세월동안은 여병순 중장에게 준희를 맡겼지만 이제 자신이 돌아가면 누구의 도움 없이도 준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무관심의 극치였던 그녀의 아버지든, 그녀를 헤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서희준이든 누구라도 이젠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지난 5년간 특수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우수한 대원이 되었고 그런 그를 무시할 수 있는 군인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번 작전만 무사히 마친다면 그는 예정된 대로 해군작전사령관의 직접 지휘를 받는 직할 부대의 장교로 갈 것이다. 그 순간만을 바라며 살아왔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심장이 찢기듯 괴로워도, 그가 없는 삶을 살며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그녀를 걱정하며 보낸 세월이었어도, 오직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순간을 꿈꾸며 험난하고 고된 시간을 참아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섬에서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기만 하면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데……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이 위험한 상황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남으로써 혼란에 빠졌다. 빌어먹을. 이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강욱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를 설득해야 해. 준희의 통행증이 언제까지 유효하지?”
“아마도 2,3일의 여유밖에 없을 거야.”
강욱은 심각한 표정으로 성환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 무사히 섬을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쉽지 않겠던데…조금 전에 너도 봤잖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아. 우선 내 생각에는 그녀가 어떤 임무를 띠고 이곳에 들어왔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다. 준희를 여기로 보낼 때는 해군도 무슨 계획이 있었겠지. 우선 그 계획부터 들어보고 준희를 설득하는 게 어때?”
강욱은 성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 계획한대로 캔디 축제에 라마카루마가 참석하는지 여부부터 파악해. 그리고 2시간 후에 나머지 요원들을 집합시켜. 빌어먹을 로버트 대령과 여병순 중장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들어보자고.”
준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어두웠다. 눈을 두어번 깜박인 준희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났다. 최강욱, 그를 만났던 기억도, 그리고 이 방으로 들어온 것도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긴장이 풀렸었나보다. 섬으로 들어와서 제대로 눈을 붙여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찾지 못할까하는 불안감과 낯선 이국땅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이 섬의 묘한 긴장감까지 겹쳐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다 그를 만나고 그가 자던 방에서 그의 체취가 서린 베개를 베고 있으려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었나보다.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얼마나 잔 것일까……? 순간 방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작은 인기척에 준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인기척의 주인이 강욱임을 확인했다. 얼마나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에 묻혀 소리도 없이 그가 그렇게 서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한동안 그렇게 미동도 없이 서있던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작은 생수병 하나를 내밀었다.
“마셔. 깨끗한 물이다.”
준희는 그가 내민 생수병을 바라보다 눈길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변했다. 그에게서 위험하고 거친 기가 느껴졌다. 자신을 향하던 부드러운 눈빛은 날카로운 빛으로 변해있었고 이제는 눈을 씻고 봐도 순수했던 앳된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이 강인한 남자로 변해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그의 굵은 목에 생긴 흉터에 머물렀다. 꽤 큰 상처였던 듯 흉터는 몹시 길고 날카롭게 보였다. 가슴과 이어지는 목 언저리에서부터 시작된 흉터가 가슴으로 이어져 그가 입고 있는 셔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준희는 손을 내밀어 그가 건네준 생수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상쾌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마실만했다. 그녀는 생수병의 뚜껑을 닫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람들은 누구야?”
준희는 강욱의 눈길을 피한 채 낮에 보았던 남자들에 대해 물었다.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 용병.”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용병? 아까 임성환도 그러더니, 용병이라니 무슨 용병? 무슨 목적으로? 누가?”
그녀의 쏟아지는 질문에 강욱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많은 것이 변해있었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것. 그 옛날 준희도 그랬었다. 그의 과묵함에 툭하면 짜증을 내고 답답해했었다. 지금 이 먼 타국 땅에서 그녀의 변하지 않은 작은 한 가지를 보았는데도 강욱은 기뻤다. 그 작은 한 가지가 왜 자신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믿었던 그녀의 일부를 다시 본 것에 강욱은 조금이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건 조금 있으면 다 알게 돼. 우선 저녁부터 먹어.”
준희는 자신이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문으로 가는 그를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어차피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니까.
허름한 식당이었다. 낡은 나무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한쪽 편에 마련된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겨우 겨우 끼니때마다 한 번씩 간단히 해먹을 수 있도록 마련된 간소한 식기들이었다.
준희는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강욱을 쳐다보았다. 벌써 숟가락으로 음식을 한 입 퍼 올리는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준희는 다시 거무스름한 색깔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모텔에서 제공되는 음식도 너무 맵고 싱거웠다. 너무 진한 향신료 또한 그녀가 이곳의 음식에 적응할 수 없는 커다란 이유였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음식은 그 색깔부터가 커다란 거부감을 주고 있었다. 있던 식욕마저도 날릴 정도인데 하물며 그를 만난 충격으로 입맛까지 달아난 그녀는 도저히 음식을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형편없진 않아. 먹어둬.”
자신의 그릇을 거의 비워낸 그가 아직도 여전히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준희를 쳐다보았다.
“됐어. 다른 사람들은 어딨지?”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밀어내며 주위를 살폈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둬야 해. 다른 먹을 것이 없으니까. 우선 오늘은 이걸로 먹고 내일 아침 일찍 다른 음식을 구해 올테니……”
“최강욱. 지난 5년 동안 변했구나. 웬 말이 그렇게 많아졌어? 훗. 우습게도 넌 말하는 것이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난 이제 말 하는 것이 싫어. 그러니 묻는 말에 대답만 해. 그도 싫거든 입 다물고 있던지.”
강욱은 냉소가 섞인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 마른 몸으로 식사까지 제때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곧 이리로 올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식당의 문이 열리며 임성환과 한국사람 한명, 그리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한명이 들어왔다.
“식사 끝났어? 어. 왜 안 먹었어?”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을 쳐다보던 성환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입맛이 없어.”
임성환과 함께 들어온 한국남자는 오늘 오후 강욱을 만나던 그때 강욱을 부르던 그 남자였고 나머지 현지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준희는 자신의 그릇까지 함께 치우며 일어서는 강욱을 쳐다보았다.
“앉아. 우린 다 먹었어.”
그리고 그릇들을 모두 방 한구석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생수병 두 개를 가지고 와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준희는 그가 내미는 생수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어때? 좀 진정이 됐어?”
“……”
성환의 물음에도 준희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오직 강욱 외의 인물들과 성환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만 궁금할 뿐이었다.
“훗. 말하기 싫은가 보군. 그래. 둘 사이의 일은 둘이 알아서 하고 서준희. 네가 온 이유나 들어보자.”
준희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묻는 성환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내게 부여된 임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야? 네가 누군 줄 알고?”
“응? 아……미안. 나에 대해서 궁금하겠군. 최강욱. 아직 얘기 안했어?”
“아직.”
강욱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성환의 말에 대답했다.
“으이그. 잘났다.”
그리고는 곧장 눈길을 돌려 준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 용병이라고 한 건 기억나지?”
“그래.”
“한 달 전 쯤 내가 소속된 프랑스 용병부대로 카얀섬에 억류되어 있는 한 남자를 구해달라는 요청이 접수되었어. 그 억류되어 있다는 남자가 최강욱이었지. 어차피 돈 받고 일하는 용병이니 요청대로 용병들이 파견됐어. 그땐 내가 포함되지 않았었고. 하지만 섬으로 침투했던 첫번째 용병들은 일주일 만에 최강욱을 찾는데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어. 그러다 최강욱과 내가 같은 해군사관학교 동기란 사실을 안 내 상사가 나를 포함한 용병 5명을 다시 이 섬으로 보냈고 우린 우여곡절 끝에 최강욱을 만나게 된 거야.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고.”
“5명?”
그녀는 성환과 나머지 두 명의 남자를 쳐다보며 가장 대답하기 쉬운 질문부터 했다.
“음. 나머지 두 명은 임무수행 중이야. 처음 이 섬으로 들어온 목적은 최강욱을 섬에서 빼내려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목적에다가 최강욱이 하려는 일을 돕는 일까지 덤으로 생겼지.”
눈을 찡긋거리며 성환은 강욱을 쳐다보았다.
“누가?”
준희는 아까부터 가장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도대체 누가 용병을 요청해 최강욱을 구하도록 했단 말인가? 자신도 용병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돈을 받고 전쟁터나 분쟁지역에 파견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만 움직이려고 해도 적지 않은 돈이 들것이다. 그런데 5명씩이나. 게다가 성환을 보건데 보통의 용병이 아닌 조직적인 부대의 대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개인으로 움직이는 용병이 아닌 팀 단위로 움직이는 용병부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돈 정도가 아니라 꽤 많은 액수의 돈이 들 터였다. 그런 돈을 누가?
준희는 강욱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무심한 듯, 그런 이유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저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흠흠. 이건 사적인 이야기라……”
그리고는 허락을 구하듯 성환이 강욱을 쳐다보자 강욱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환이 다시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강욱이 고아라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거고……강욱에게 친할아버지가 계셨어.”
“할아버지?”
성환의 말에 준희는 강욱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할아버지? 그에게 할아버지가?
“그래. 할아버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된 모양이야. 그 손자가 최강욱이고 강욱의 거취를 추적하던 중에 섬에 억류되어있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할아버지가 손자를 구하려 우리 용병을 요청하신 거지.”
할아버지라니……준희는 첫 번째 떠오른 감정이 기쁨이었다. 세상에 혈육하나 없이 그저 혼자이던 그에게 혈육이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외로웠던 그의 삶을 위로해주는 듯해 순간 저도 모르게 기쁨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혈육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 자신에게도 없는 것보다 못한 혈육이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처럼 없느니만 못한 혈육은 아닌 듯했다. 여기까지 큰 돈 들여 용병까지 보내는 것을 보면 갑자기 존재를 알게 된 손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준희는 왠지 모르게 몰려드는 안도감에 입술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그에게 든든한 혈육이 있다는 사실이 왜 자신에게 안도감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고 떠난 증오하는 남자일 뿐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안도감과 함께 드는 기쁨이라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외롭게 자라온 아이였다. 비록 그녀의 이모와 할머니가 그를 아끼고 정성으로 키워주셨지만 아마도 친 혈육보다는 못했으리라.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그도 인간인데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자신처럼 혈육에 매여 쓸데도 없는 정을 뚝뚝 흘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의 속에도 자신처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 그에게 늦게나마 친할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도 순수한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준희의 마음 또 한편에서는 왠지 모를 질투와 비틀린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에게 친할아버지가 생겼으니 자신의 이모나 할머니는 뒤로 밀리는 기분, 이모나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기분. 그런 기분이 얼토당토않은 비꼬는 말을 내뱉게 하고 있었다.
“훗. 기쁘겠구나. 최강욱. 할아버지가 존재하는지 모를 때도 내 이모와 할머니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는데 이젠 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으니 한국에 있는 널 키워준 내 이모나 할머니는 네 의식 속에 들어있지도 않는 한낱 먼지 같은 존재겠지.”
순간 강욱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무슨 뜻이야?”
잇새로 내뱉듯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준희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5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넌 분명이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너의 소식이 어떻게 전해질지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너는 말 한마디, 인사 한번 없이 떠났지. 널 친자식처럼 키운 이모와 친손녀인 나보다 널 더 의지하며 믿었던 할머니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 알면서도 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어. 그게 헌신짝처럼 버린 게 아니고 뭐지? 네가 떠난 후 네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이모가 어땠는지 알아? 할머니가 어땠는지 알아? 이모는 미친 듯이 해군본부며 외교부, 군대 민원실을 들락거렸어. 나중에는 청와대 민원실에까지 편지를 써댔지. 네 행방을 알고 싶다고, 외국에서 없어진 군인을 어디서 찾느냐고……그리고 피가 섞이지 않은 친인척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으며 무너지고 또 무너졌어. 할머니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말을 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머니는 강욱의 행방불명 통지에 그길로 쓰러져 한동안 거동도 못하셨다. 그분에겐 강욱은 친손주나 다름없었다.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서도 그저 ‘우리 욱이, 우리 욱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의 한스러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었다. 그해 겨울은 그녀와 그녀의 이모, 그리고 할머니까지 모두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밝고 환한 웃음은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그로 인한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면서도 떠났다. 남은 그들에게 자신이 행방불명이나 사망이라는 소식으로 전해질지 알면서도 떠났다. 그리고 그 기나긴 5년 동안 단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고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상관없었다. 오직 그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그들에게 기나긴 5년간의 악몽을 주었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강욱은 그녀의 말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래. 알면서도 떠났다. 선생님과 할머니에게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알면서도 떠났다. 그땐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과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아 외면했다. 그때의 그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자신에 대한 환멸과 자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도 외면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준희의 안위, 그녀의 절망, 그것만으로도……준희를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버거웠다.
지금껏 외면하고 살았다. 선생님과 할머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외면하고 살았다. 준희에 대한 그리움으로, 현재의 힘든 고통으로 선생님과 할머님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었다. 그 사실이 지금 현재 강욱에게는 커다란 비수로 돌아와 자신의 심장을 비참하게 갈라내고 있었다.
강욱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끄러웠다.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자신이, 이렇게 몸 건강히 멀쩡히 살아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강욱은 순간 몸을 돌려 식당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최강욱.”
성환의 부름에 강욱이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식당문을 벗어났다.
성환은 강욱이 앉았던 자리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는 준희를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어?”
“……”
준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강욱의 아픈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의 상처 입은 모습에 자신도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쁠 줄 알았다. 통쾌할 줄 알았다. 그가 상처를 입고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지난 고통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왜? 왜 그의 상처 입은 모습에 자신의 심장도 피를 흘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희는 강욱이 나간 문으로 그를 쫒아 나가는 성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인연을 끊어내고 그에게 남아있는 추억과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버리려던 각오를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에 대한 증오가 약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그에게 상처주려면 멀었는데, 자신이 받은 고통만큼 되돌려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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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준희와 강욱의 입장 모두 이해한다는 분과 준희만, 강욱만 이해하는 분들이 많으시네요….ㅎㅎ
준희와 강욱이 서서히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아마도 회가 거듭될 수록 성숙해지는 준희와 강욱을 만나실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