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Target RAW novel - Chapter 7
“이제 곧 하계휴간데 우리 며칠만이라도 여행 가자.”
준희는 자신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리듯 매달리는 나영를 보며 웃었다.
“휴가 때?”
“응. 긴긴 휴가 동안에 집에서만 지내는 건 문제가 있지 않니? 이제 사관학교 생도 3학년이나 됐으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놀기도 해야지. 그리고 이번이 아니면 언제 놀겠냐? 내년이면 4학년이고 그러면 바로 해군장교로 임관해서 자대배치 받을 텐데. 이번 하계휴가 때는 제복이고 뭐고 다 벗어 던지고 계곡으로 놀러 갔다 오는 거지. 어때?”
군인과 전혀 다른 이미지의 나영은 애교 있는 웃음에 자그마한 몸집과 성격까지 섬세해 해군이 되기에는 너무나 여성스러운 사관생도였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첫 날 자신의 옆에서 연신 웃음을 날리며 처음 본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걸로 그날부터 둘은 단짝이 되고 말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남자생도보다 여자생도 수가 훨씬 적은 탓인지 두 사람은 같은 기숙사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생도 3학년이 된 지금까지 가장 친한 동기였다.
“글쎄, 잘 모르겠어.”
“왜? 강욱이 반대할 것 같아?”
“아니. 걘 그런 거 반대 안 해.”
“그렇겠지. 반대 안 하고 네가 놀러 간다면 아무 말 없이 자기도 따라 나설걸? 야. 근데 좀 으스스 하지 않니? 네가 가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 강욱이 옆에 서 있는 거야. 네가 자각하지도 못한 새 귀신처럼……”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몸까지 떠는 나영의 행동에 준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네가 저더러 귀신이라면 강욱이 어떤 표정 지을지 상상이 안 간다.”
“야. 걔가 내말에 표정이나 변하겠니? 아마 내가 무슨 우스게 소리를 해도 걘 아마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다. 걔가 유일하게 반응하는 건 너 뿐이야. 대장이든 선배든 누가 뭐래도 저 할 일만 하는 애잖아. 하긴 누가 시비 걸만한 게 있어야 시비를 걸지. 칼같이 지키는 규칙, 규율에 성적이 나쁘길 해, 그렇다고 못하는 운동이 있어. 거기다 걔가 한 카리스마 하잖아. 그러니 아무리 선배고 대장이라 하더라도 걜 누가 함부로 건드리니? 하긴 개념 없는 놈이 하나 있긴 하지.”
준희는 나영의 마지막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누구더러 개념 없는 놈이라 욕하는지 알고 있었다. 희준.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 현재 사관생도 4학년인 그는 아버지가 해병대 장교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선배에게는 갖은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고 후배에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걸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비열함의 극치인 인간이었다.
준희는 그의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첫 입학식 때부터 그 자식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슨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준희가 아버지의 딸임을 알고 더욱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곁에 있는 강욱을 향해서도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욱의 존재조차 모르던 그가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즈음 학교전체에 엄청난 놈이 하나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준희의 내무반을 찾은 것은 해군사관학교에서 맞는 첫 번째 하계휴가를 하루 앞 둔 어느 날이었다.
강욱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준희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나영에게 몸을 기울인 채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 연신 웃으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강욱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다시 고개를 숙여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아주 큰 놈이 하나 들어왔다고 학교 내에 소문이 쫙 났대. 오죽했으면 대대장님이 중대장님 불러다가 이번 1학년에 들어온 최강욱이 누구냐고 묻더란다.”
“정말?”
준희는 놀란 숨을 들이키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하는 나영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니까. 우등장, 군기장, 체력장까지 한 학기에 모두 휩쓴 놈은 해군사관학교가 생긴 이래 첫 번째래. 그것도 1학년생이.”
준희는 나영의 말에 새삼스럽게 다시 자신의 뒤에서 책을 보고 있는 강욱을 힐끗 노려보았다. 독한 놈. 매학기 우수한 생도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는데 그 세 가지 종류의 표창장을 해사 1학년 첫 학기에 모두 휩쓸었다……내일이면 하계휴가를 가는데도 여전히 책만 쳐다보고 있었다. 괜스레 심술이 난 준희는 몸은 나영에게 기댄 채 팔만 뻗어 강욱이 보고 있는 책을 확 덮어버렸다.
강욱이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이냐는 듯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준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나영에게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독한 놈……”
나영은 준희의 돌발행동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준희의 입에서 나오는 나직한 말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하는 표정으로 준희를 쳐다보는 강욱을 돌아보았다.
“네가 준희랑 안 놀아주니까 준희가 삐졌어.”
나영의 장난스러운 말에 강욱은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띠우다가 다시 자신의 책을 펴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옆 눈으로 흘겨보던 준희는 다시 나영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그래서 중대장님이 뭐라 그러셨는데?”
“중대장님 왈 ‘네. 현재 1학년에 최강욱이라는 별종 한 놈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했대.”
“풋. 별종?”
“그래. 사실 별종은 별종이지. 아니 표창을 받아도 어떻게 싹쓸이를 하냐? 1학년에 벌써 왕창 쓸어버리면 4학년 졸업 때까지 제복에 그놈의 표창표식이 얼마나 붙겠니? 아마 제복에 도배가 될 거다.”
눈알을 굴리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나영의 말에 준희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푸후훗.”
준희는 강욱을 흘낏 바라보며 그의 티끌 하나 없이 하얀 제복이 표창 때마다 받은 표식으로 채워져 볼썽사납게 변한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항상 완벽함을 추구하는 놈인데 자신의 제복이 그런 꼴이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준희의 웃음이 터지자 나영도 함께 웃으며 둘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의실의 앞문이 세게 열리며 준희로서는 반갑지 않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이반에 최강욱이라고 있나?”
준희는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표정이 굳어졌는데 그의 입에서 강욱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앉아있는 강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강욱도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의문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최강욱입니다.”
희준은 자신이 최강욱이라고 하며 일어서는 놈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훨씬 잘난 놈인 듯싶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은 날카로웠고 자신이 최강욱이라고 밝히는 목소리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왠지 모를 적개심이 느껴졌다. 분명 저 눈빛은 적개심이었다. 희준은 갑자기 그를 만나러 온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대대장급 이하 선배들이 최강욱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입학성적도 해군사관학교가 들어선 이래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지혁 선배와 같은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했다고 들었다. 그런 놈이 현재 1학년 1학기를 종료하는 시점에서 각종 표창을 모두 휩쓸고 성적까지 1학년 전체를 통틀어 최우수였다. 그런 놈이니 자연스럽게 해군의 윗선까지 그의 존재가 알려졌고 해군본부에서 장교로 있는 아버지가 최강욱의 존재를 아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희준은 어젯밤 아버지와의 통화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강욱이란 놈을 네 편으로 만들어. 해군본부에서조차 최강욱이란 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시절부터 본부의 관심을 끈 놈은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지혁과 최강욱이라는 그 놈 뿐이야. 정지혁이야 배경이 좋은 놈이고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선배이니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최강욱은 네 후배고 이제 갓 1학년이다. 그러니 그런 놈을 네 심복으로 만들어두면 차후에 너도 그놈의 덕을 볼 수 있을 거야. 네가 실력이 안 되면 곁다리에 붙어서라도 줄을 제대로 타야지. 분명 최강욱은 무언가 될 놈이야.’
희준은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아버지에게 주눅 들어 말대답 한번 하지 못하고 알았다는 대답만을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께 인정받으려 무엇이든 했었다. 하지만 번번히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만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일까 희준은 매사 자신감이 없어지고 비틀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를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은 내키지 않지만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최강욱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희준은 강욱의 앞자리에 앉아 자신을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준희를 보았다. 자신이 강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가 저 아이 때문이었다. 입학식 때도 그렇고 분명 준희 저 아이가 가는 곳에는 최강욱이 있었다. 그땐 최강욱이라는 존재를 몰랐고 또 관심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 준희 옆에 항상 붙어 다니던 남학생이 분명 저 놈이었다.
서준희……아버지의 버려진 딸. 희준은 준희의 눈길을 외면하며 무시한 채 강욱을 쳐다보았다.
“수업종료하고 자율시간에 좀 봤으면 하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강욱은 자신을 봤으면 한다는 희준의 말에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별로 달갑지 않은 놈이었다. 단지 준희 아버지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입학식 때 준희에게 보내는 적의와 비열함에 자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부류 중 1순위로 생각하던 놈이었다.
“아. 별 건 아니고 친목 좀 다져보자는 거지. 선후배 간에 서로 챙겨주는 뭐 그런 의미지.”
“전 선배님과 개인적으로 친목을 다질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선후배간에 교류가 있어야한다면 제 개인이 아닌 1학년 전체이거나 저희 내무반 전체이어야 할 것입니다.”
희준은 그의 딱딱 부러지듯 명확한 말에 얼굴이 벌개지고 말았다. 이젠 강의실에 있던 모든 생도들이 자신과 강욱의 대화를 노골적으로 듣고 있었다. 어떤 구석진 자리에 있는 생도들은 서로 키득거리며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뭐야! 최강욱. 선배가 부르면 네하고 즉각 대답할 것이지. 뭐가 어째? 넌 사관생도 1학년이 배우는 복종심도 배우지 못했나!”
“그렇다면 선배님도 2학년이 배우는 모범정신을 배우지 못하신 것 같군요. 학과 수업 시작 5분전에 무작정 찾아오셔서 아무 이유도 없이 후배 한명에게만 개인적인 친분을 쌓자고 하시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범정신입니다.”
“뭐? 뭐!”
강욱의 나직하고 날카로운 말에 희준은 흥분한 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준희를 쳐다보았다.
“아하. 그래 이제 이해가 가는군. 저 계집애와 항상 붙어 다니더니 내가 자네 혼자만 부르니까 저 계집애를 떼놓지 못 하시겠다? 이런. 이런. 1학년 최고 우수 사관생도 최강욱께서 여자 하나가 없으면 뭣도 아닌 존재로군. 엉? 그럼 좋아. 서준희. 너도 함께 와라. 내 특별히 너도 끼워주마.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야.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널 불쌍히 여기는 네 친구 최강욱이 원해서 끼워주는 거지.”
!!
부모에게 버림받은……그 말만이 준희의 귓가에 윙윙거렸다. 준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가 어째? 네 놈 따위가 아무리 발광을 해도 난 너 같은 놈과 어울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너같이 비열하고 비겁한 인간하고 과연 어울릴 생도가 있기나 하니?”
“뭐!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리고 희준은 단 몇 걸음 만에 준희의 앞에 서 그녀의 얼굴로 손바닥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목적하던 대로 그녀의 얼굴을 치는 대신 그의 손목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힘에 잡혀 등 뒤로 꺾이고 말았다.
“다시 한번 서준희에게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테다. 명심해. 개자식아.”
희준은 자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내뱉는 그의 말에 섬짓함을 느꼈다. 살짝 몸을 비틀며 자신의 잡힌 팔을 빼보려 했지만 강욱에게 단단히 잡힌 그의 팔은 빠지기는커녕 더욱 옥죄어지고 있었다.
“으윽!”
강욱은 다시 한번 희준의 팔을 살짝 꺾어 고통스럽게 한 뒤 풀어주었다.
“이……이……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당하고 곱게 물러설 거라는 생각을 한다면 오산이야. 최강욱, 서준희. 너희들은 이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졸업 후 해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내내 삶이 괴로울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거야!”
그리고는 돌아서 험한 욕설을 내뱉으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저거 순 미친놈 아냐? 아니 가만있는 니들을 왜 건드리고 가는 거야? 도대체 목적이 뭐야?”
나영은 지금껏 돌아가는 사태를 지켜보다 희준이 꽁지 빠진 새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준희의 손을 잡아당겨 앉혔다.
“야. 준희야. 쟤 도대체 뭐야?”
“……”
강욱은 나영의 질문에도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준희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그 개자식이 한 말이었다. 강욱은 준희가 어떤 심정일지 알고 있었다. 비록 보기에는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지만 그녀의 심장은 새까만 연기를 피어 올리며 불타오를 것이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난 생채기는 검은 빛 피를 철철 흘리며 끔찍한 아픔을 호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3학년이 된 지금까지 아버지의 아들 희준은 사사건건 강욱과 준희를 트집 잡았다. 어디에서 마주치던 선배라는 이유로 별 의미 없는 명령과 기합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니까 휴가 시작되자마자 여행 가는 건 그렇고 내가 따로 연락할게. 집에서 좀 쉬다가 2,3일 여행 가는 거야. 나야 집이 서울이니까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면 되겠다. 아니면 아예 여행을 동해바다로 가든가. 그럼 내가 너희 집이 있는 강원도 쪽으로 가면 되잖아.”
“음……우선 집에 가보고 결정하자. 혹시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다른 일이 생길게 뭐 있니? 어쨌든 여행 가려면 집에 허락은 받아야 하니까 내가 연락할게.”
“그래.”
준희는 나영과 여행을 가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하자 갑자기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어디론가 여유롭게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준희와 나영은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야. 서준희.”
준희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이름을 부른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네. 선배님.”
준희는 옆에 있는 나영 또한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자신을 부른 희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너한테 할 말 있으니까 잠깐 따라와.”
준희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선배였고 선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준희가 돌아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나영이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도 함께 갈까?”
“아니. 괜찮아. 별일이야 있겠니? 혼자 갈게.”
“하필 이런 때 강욱이 교수님께 불려갔으니 이를 어쩌니?”
“괜찮대도. 걱정 말고 너 먼저 숙소로 돌아가.”
그리고 준희는 한참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희준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강욱은 교수님이 시킨 일을 모두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기다리고 있던 나영으로부터 준희가 희준을 따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욱은 급히 돌아서 준희가 희준을 따라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빌어먹을. 서희준. 준희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널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게 해줄 테다.
강욱은 강의실이 있는 건물을 한바퀴 빙 돌아본 후 연병장과 학과 사무실, 강의실을 하나 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도 없었다. 점점 초초해진 강욱은 더욱 빠른 속도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숙소 쪽으로 뛰어갔다. 이미 돌아와 있을 수도 있었다. 제발 별일 없이 돌아와 있기를……
강욱은 거의 그녀의 숙소가 가까워졌을 때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준희를 발견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뛰어가 생각에 잠겨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준희의 팔을 낚아챘다.
“젠장. 무슨 일이야?”
준희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
“어디 다쳤어?”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이 널 왜 부른 거야?”
“아……별일 아니야.”
강욱은 별일 아니라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강욱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언제 한번 집으로 와서 식사 한번 하재.”
“!”
순간 강욱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집?‘
준희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집.”
“서희준이?”
“아니. 아버지가 그러자고 하셨대.”
강욱은 그녀의 눈빛에 보일 듯 말듯 비치는 작은 설렘을 보았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욱은 그 사실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기회가 있었고 보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는데도 이제껏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가 왜 이제 와서……
“그래서?”
준희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어. 솔직히 반반이야. 왜 갑자기 날더러 식사라도 하자는 건지 궁금하고 또 이제 와서 밥 먹자는 게 우스워 무시하고 싶기도 해.”
“가지마.”
준희는 간단하게 상황을 종료시키는 강욱을 쳐다보았다.
“아직 결정된 건 없어. 언제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실행이 될 계획인지도 몰라. 정말 연락이 온다면 그때 생각할래.”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준희를 바라보며 강욱은 알 수 있었다. 만약 정말 그녀의 아버지가 준희를 부른다면 그녀는 분명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강욱과 준희는 하계휴가를 맞아 집으로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타기위해 정류장에 서 있었다. 하얀색 해군 제복을 입고 나란히 붙어 서있는 그들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뿜어내고 있는 숲과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강욱은 별 말 없이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준희를 쳐다보았다. 강욱은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빼앗았다.
준희는 자신대신 가방을 들어주는 강욱을 돌아보았다.
“안 무거워.”
“알아.”
그리고는 침묵……준희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언제나처럼 단답형으로 하는 그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준희의 심술 섞인 질문에 강욱이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준희를 쳐다보았다.
“……?”
“안 무거운 거 알면서 왜 들어 주냐고?”
강욱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로 시비를 거는 준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식으로 마음이 비틀려있다면 집에 계신 할머니와 선생님께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이 되었다.
“……그 자식 말에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어.”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준희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그 의미를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반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목소리 높일 것 없어. 말 그대로니까. 네가 서희준이 저녁초대 이야기를 꺼낸 이후 계속 기분이 저조한 이유는 너와 나 둘 다 아는 사실이야.”
“……”
또 시작이었다. 뭐든 다 안다는 듯. 준희 자신의 마음속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긴 세월 함께 붙어 다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면 말이나 않는다. 저 자식은 자신을 처음 본 그때부터 자신을 모두 아는 것처럼 혼자 단정 짓고 해결하려 들었었다. 그 어린 시절부터……그리고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저 자식이 짐작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지금 강욱의 말대로 희준이 아버지의 저녁초대 이야기를 꺼낸 이후 그녀는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으로 기분이 저조해 있었다.
준희는 잘나고 싶었다. 훌륭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런 딸을 둔 것이 자랑스럽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식을 버린 것을 후회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은 강욱처럼 성적도 좋지 못했고 운동도 잘하지 못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도 여전히 붙어 다니는 그들을 같은 동기뿐 아니라 선배들까지 모두 연인으로 보고 있었다. 둘을 연인으로 보는 것이 불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친구 사이지만 둘 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은 명확했고 언젠간 사람들이 말하는 연인이 될 것이라는데 아무 의심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항상 붙어 다니는 그들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눈이었다.
‘야. 준희야. 넌 좋겠다. 최강욱 같은 멋진 남자친구가 있어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벌써 해군본부에서도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앞길이 창창하게 열린 거지. 그럼 너도 덩달아 인생 피는 거야. 그냥 힘든 해군 하지 말고 강욱한테 시집이나 가.’
준희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었다. 사람들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른다면 그녀의 능력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그런 이유이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을 해도 강욱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항상 그녀의 이름 옆에 붙는 것은 최강욱이었으며 이제는 강욱이라는 존재 옆에 붙어있는 부록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잘난 강욱의 탓만 같았다.
한동안 입술을 꼭 붙이고 아무 말이 없던 준희는 버스가 나타날 길 끝을 한번 쳐다본 후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가 뭐니?”
준희는 강욱의 눈빛이 의문을 나타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지만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준희는 며칠 전 나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준희야. 그런데 너희들은 사귀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연인이야. 분명히 서로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뭔가가 빠진 것 같단 말이야.’
‘뭐가?’
‘너희들은 너무 스킨십이 없어.’
‘스킨십?’
‘그래. 자고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서로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게 자연의 이친데 너희들은 기껏해야 둘이 붙어 다니는 것 외에 손을 잡기를 하나 그렇다고 안고 다니기를 하나…혹시 아무도 몰래 어디 으슥한데 가서 키스하고 안고 그러냐?’
준희는 장난처럼 내뱉는 나영의 말을 들은 이후 강욱과 자신의 사이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영의 말대로 너무 멀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아버지의 저녁초대와 강욱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요즈음 준희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준희는 도대체 강욱과 자신의 사이가 무엇인지 한번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언젠가 그랬지? 중학교 땐가? 우린 아직 어리니까 우리를 무엇으로도 정의하지 말자고 나중에 무언가를 책임지고 명확한 눈을 가지게 될 때 그때 알아보자고. 그리고 우린 이제 성인이 됐어. 도대체 너와 난 뭐니?”
강욱은 자신은 보지도 않고 바닥만 바라보며 말을 하는 준희를 내려다보았다.
“그걸 꼭 정의해야 돼?”
준희는 그의 말에 고개를 홱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난 꼭 알고 싶어. 사람들은 우리더러 연인 사이라고 해. 하지만 우리가 연인이야? 키스 한번 안한 연인이 어딨어!”
키스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준희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
‘미쳤어. 서준희. 지금 쟤한테 키스 해달라고 조르는 거야? 뭐야? 으이그. 이놈의 성질머리. 내 언젠가 일낼 줄 알았다. 젠장. 젠장.’
준희는 아무 말이 없이 조용한 강욱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욱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웃음을 본 순간 급히 버스가 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씨. 이놈의 버스는 왜 또 안 오는 거야? 이러다가 또 걸어가는 거 아냐?”
그리고 또 침묵……
준희가 더 이상의 침묵은 견딜 수 없다고 느낄 즈음 저 멀리서 버스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시골길을 달리며 털털 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버스다!”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서자마자 서둘러 올라타는 준희의 뒤로 강욱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그녀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버스의 맨 뒷좌석의 창가 끝에 자리를 잡은 준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준희는 여전히 강욱의 시선을 피한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욱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잠시 그녀가 힘을 주며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려는 시늉을 했지만 그도 얼마가지 않아 단념한 채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맡겨두고 있었다. 버스 안은 맨 앞자리 두 곳에 앉아있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준희와 강욱 뿐이었다.
강욱은 여전히 시선은 창밖에 고정한 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준희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널 좋아해.”
“……”
알아. 안다구. 너와 난 서로 좋아해. 없으면 허전하고 서로가 없는 시간들은 의미가 없을 만큼 깊이 좋아해. 하지만, 하지만 이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해.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준희는 자신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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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첫 출간의 기쁨도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고 너무나 고민이 되었던 이벤트 당첨자도 뽑았으니(작가공지방 참고 하세요.) 지금부터는 표적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되도록 잠수 하는 일만큼은 피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수영은 좀 하는데 잠수는 별로 안 좋아해서…ㅎㅎㅎ
오늘 하루도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