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59
57화. 난 그 사실을 몰랐어
“결국, 당신 눈에는 내가 환자로 보인다고…….”
하성은 마른세수를 했다. 이후에는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기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감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실례했습니다.”
“아, 정하성 헌터…….”
하성은 근처에 있던 협회 직원에게 꾸벅 묵례하고 자리를 떴다.
F급을 향한 인사는 없었다.
당장은 생각이 너무 복잡해서,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후에 다시 연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쪽이 남의 속내를 알 턱이 있나.
‘내 얼굴은 보기도 싫은가 봐.’
기려는 그저 정하성이 화가 나서 가버렸겠거니 여겼다.
‘어쨌거나 처맞진 않았으니 작전은 성공이네?’
안윤승 만세!
아무튼 진짜 허세는 잘 통했다. 이건 대단한 발견 아닌가.
지구의 마법사들은 참 허술했다. 하여간 적의 기량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할 줄이야.
‘정하성은 자기보다 세 보이는 놈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는 습성이 있구나.’
큭큭큭.
김기려는 다짐했다. 그 S급 헌터가 허튼 마음을 먹지 못하게, 앞으로도 확실히 찍어눌러 두자고 말이다.
강한 척이라는 게 뭐 별건가?
자신은 이미 대마법사라는 진짜 강자로 살아봤으니 과거의 행동을 모방하기만 하면 될 터.
‘뭐, 어차피 곧 힘도 되찾을 거니까 딱히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순간.
기려에게 어떤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서, 선우연이 심각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선우연 씨?”
선우연은 기려가 다가오자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입막음할 생각이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 일은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예에?”
“약속할게요.”
확실히 S급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나 봤자 좋을 건 없겠지. 기려는 선우연의 배려심에 감동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물론 이 모습이 선우연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논쟁이 끝난 뒤.
오후 12시 10분. 협회 인근 식당.
‘밥이 안 넘어가.’
선우연은 현재 죽을 맛이었다.
랭킹 1위와 등급 위장자의 살벌한 분쟁을 겨우 넘기나 싶더니, 곧바로 다음 시련이 찾아들었으니까.
“여긴 겉절이가 맛있네요.”
이어서 그녀의 옆에 누군가 털썩 자리를 잡는다.
쌍꺼풀 없는 긴 눈매에 작은 눈동자.
그 등급 위장자다.
“그건 미역국이에요?”
“네…….”
“소고기 들어있어요?”
하여간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설마하니 이 남자가 정하성과 맞먹는 정도의 실력자인 줄은 몰랐지……!
“아, 아마도요.”
불편하다.
하지만 지금의 동행은 어쩔 수가 없었다.
김기려는 아까부터 자신에게 어떤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설명해주기 위해서는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빨랐으니까.
“큼. 어쨌든, 공원에서 만났던 그 살인미수범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시다는 거죠.”
“네!”
선우연은 어렵사리 본론을 꺼냈다.
이후는 그녀의 일방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아마 곧 경찰에서 연락이 올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검거가 어렵습니다.”
“흠.”
“신원파악이 제대로 안 됐고. 임시방편으로 그 각성자가 가진 희귀 아이템을 추적해봤지만요.”
“같은 아이템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았겠죠.”
“예, 뭐. 사실 이 방법은 불안정한 요소가 많아서…….”
달그락.
김기려는 조용히 식기를 놀린다.
“경찰도 결국 용의자의 주소를 특정하는 데 실패했어요.”
“아하.”
“죄송합니다.”
“당신이 죄송할 건 아니죠.”
선우연은 잠깐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기려는 국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좋은 소식?
“얼마 전에 정하성 헌터와 함께 게이트에 갇히셨었죠?”
“알고 계시네요.”
“적어도 그 사건의 배후는 밝혀졌어요. 최근에 테러리스트의 꼬리를 잡았거든요.”
선우연은 그렇게 전하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무언가 열심히 적었다.
“갑자기 왜…….”
말을 멈추시냐.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
띠링. 김기려의 휴대폰이 울린다.
그녀가 보낸 문자에는 이 한 마디가 적혀있었다.
[나찰사원이란 말 들어보셨어요?]나찰사원.
기려는 그 단어를 조용히 훑었다.
***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정확히는 8월의 대규모 테러와 사이비의 자폭 테러가 시행되기까지 약 48시간을 남겨둔 어느 과거의 시점.
표나길의 아지트.
“이 개같은 새끼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범죄 조직의 젊은 리더는 씩씩거리며 창고로 들어선다.
그는 방금 막 한 S급의 암살 작전을 실행하고 온 참이었다.
“그나저나 정하성은 어떻게 됐…….”
“보면 몰라? 그을음 하나 없이 돌아왔는데 내가 그거하고 진짜 붙고 왔겠냐?”
표나길은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정하성 옆에 웬 의문의 F급이 붙어있어서 계획이 어긋났다.
이것도 확실히 짜증 나는 일이긴 하지만, 현재 분노의 원흉은 그게 아니었지.
“야, 수예휘 이 X새끼 당장 불러.”
“예?”
“그 사이비 끄나풀 데려오라고! 암살은 성공했다고 전하면서 말이야. 알았어?”
표나길은 은신처로 돌아오자마자 어느 인물을 찾았다.
자신과 협력 관계에 있는 자금줄. 나찰사원의 신도.
“하여간 수예휘라는 그 웃겨 먹은 가명부터 알아봤지. 믿을 새끼가 아니었는데!”
표나길은 조금 전 있던 상황을 되뇌었다.
게이트 안에서 S급을 만나면 쓰시라.
당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붕괴 입자] 아이템을 건넸다.
[붕괴 입자]는 매물도 잘 나오지 않는 희귀한 아이템이라 선뜻 받았는데 말이다.‘S급과 나를 게이트 안에 가둬버릴 생각이었군!’
아이템의 효과를 확인한 표나길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인위적인 조작으로 통로가 사라져버린 별세계에 고립되고 싶어 하는 헌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형님, 연락했습니다. 곧 온답니다.”
“그래.”
표나길은 칼을 갈았다.
이렇게 당하고는 못 산다.
자신을 물 먹일 뻔한 그 미친 사이비들에게 모든 걸 되갚아줘야 한다.
특히 수예휘라는 그 운반책은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얼굴과 이름은 갈아치우면 그만이야.’
신도를 난도질한 뒤에는 뭐, 대충 거점을 버리면 될 터.
지금까지도 항상 그렇게 잘 해왔다.
S급이라는 거물을 죽이려 했으니 일이 잠시 안 풀렸을 뿐이지. 자신은 대인전의 최정상이었으니까.
“오기만 해봐라.”
표나길은 아지트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고 조용히 숨죽였다.
그리고 잠시 뒤. 노크 소리가 울렸다.
-퉁퉁퉁, 퉁퉁퉁.
“왔나 봅니다.”
“열어.”
잠시 기다리니 육중한 철문 너머에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준태 님! 연락 잘 받았어요! 암살에 성공하셨다며요?”
예쁘장한 외모와 얇은 뼈대. 옷 위에 걸친 반투명한 흰 우비.
예의 신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으로 들어선다. 그 순간이었다.
“악!”
누군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수예휘라는 이름의 그 인물이 낸 소리였다.
눈 깜짝할 새에 다가온 표나길이 자신의 발목을 베어버렸으니 말이다.
“가, 가, 갑자기 왜……?”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해.”
“힉.”
“그 빌어먹을 파괴 아이템. 대체 무슨 의도로 넘긴 거였지?”
“파괴 아이템? 어, 으, 빨간 구슬이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
그는 바닥에 쓰러진 수예휘의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표나길의 각성 스킬이 다시 한번 발동했다.
서걱.
“아악!”
베인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흐르니 나찰사원의 신도는 바르르 떨며 말했다.
“의도라니요. 전 그냥 교주님의 뜻으로……!”
“게이트 입구를 없애버리는 아이템이라니. 미리 알았더라면 그딴 물건 절대 쓰지 않았어!”
“그, 그래도 도움은 되지 않았나요?”
“뭐?”
“힉! 아, 아니. 그게. 어쨌든 표적은 절대 놓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암살에 성공하신 거 아닌가요?”
게이트에 가둬버리면 어지간한 헌터는 도주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암살에 유용할 아이템이긴 한데.
“반대로 말하면 나도 도망칠 수 없게 되는 셈이지. 그것도 S급과 단둘이 게이트 안에서 말이야!”
표나길은 싸늘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준태 님…….”
“그래도 걱정 마. 적어도 너희 수장은 기뻐할 테니까.”
“네?”
“임무는 완수했다고 했잖아? 정하성이 게이트에 들어간 틈을 타서, 내가 밖에서 통로를 없앴어.”
그러자 신도가 벌벌 떠는 것을 뚝 멈추고 고개를 치들었다.
“직접 죽이신 게 아니라요?”
“뭐?”
“그냥 게이트만 파괴하고 돌아오신 건가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왜? 설마 영영 갇히는 게 아니라, 따로 빠져나올 방법이 있는 거야?”
“예, 예. 보스를 죽이면 출구가 생긴다. 그건 어떤 방식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전제였거든요.”
우비를 입고 있는 그 사이비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표나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 그럼 아쉽겠지만 S급 암살 건은 포기해.”
“예? 부, 분명 당신이 책임진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놓고!”
“나라고 이러고 싶겠어? 정하성 옆에 그 F급이 붙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툭툭.
범죄 조직의 리더는 연락책의 머리 위에 다시금 손을 얹는다.
“이게 다 옆에서 재촉하고 징징거린 너희 탓이야. 이 사이비 새끼들!”
그러자 연락책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사이비 아닙니다….”
“….”
“저는 그런 가짜 종교들과 달리 실존하는 하늘님을 받드는 거라고요! 던전 쇼크가 정말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믿으세요? 모두 나차녀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시험하시려고….”
이런 순간에도 헛소리라니. 이 종교쟁이는 겁도 없는 건가.
“어쨌든, 이번 건은 정말 실망입니다. 암살이 또 실패라니.”
“허.”
“게이트에 가둬놓아 봤자 S급 정도면 알아서 보스를 죽이고 나오겠죠. 실패는 확실해요. 우린 마지막 기회를 드렸는데.”
나찰사원의 신도는 냉혹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표나길은 코웃음 쳤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네 목숨줄이 누구 손에 달렸는지 모르겠어?”
연락책의 머리통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A급 상위 각성자의 힘이라면 두개골을 악력으로 부수는 것쯤이야.
“…역시 믿음도 없는 종자는 함부로 써먹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때.
어쩐지 신도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왜 해내야 하는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니 절박하질 않고, 책임감도 없군.”
“뭐?”
“돈으로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계획은…. 이만 철회해야겠어.”
지나치리만큼 당당하다.
표나길은 상대의 말이 묘하게 거슬려, 신도를 손끝부터 잘라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제야 이상한 걸 깨달으셨나?”
커팅 스킬이 발동되는 일은 없었다.
표나길은 그저 자리에 굳어서, 신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목을 잘라 죽였을 거야. 그편이 빠르고 안전하니까.”
표나길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당신은 발목 따위를 베었을까. 나를 쉽게 죽이지 않고, 천천히 고문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알겠지. 그 머리통에 수예휘를 절대 죽여선 안 된다는 무의식이 깔렸다는 걸.”
하얀 우비를 쓴 인물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인 발목 때문에 절뚝거리면서도 입가에 여유로움이 머물러 있었다.
“쓸만한 능력자라 눈여겨봤는데 아쉽군.”
“큭, 윽!”
“나는 나차녀님과 이어져 있는 대리인이다. 이 귀한 몸에 상처를 내고 뻔뻔이 연명할 생각은 아니렷다.”
표나길은 포켓에 들어있던 독 묻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부들부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던 유니크 아이템. 그것의 칼날이 서서히 본인의 목덜미로 향했다.
“실패의 대가를 치러라.”
“끄으, 으으으!”
“너희 모두, 죄인이다.”
이건 세뇌 스킬……!
드디어 이쪽도 수예휘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한발 늦었다.
푹.
이어서 창고 곳곳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표나길이 이끌던 범죄 조직의 수뇌부가 집단 자결한 것이다.
“하아.”
수예휘는 우비에 튄 피를 덤덤히 내려다봤다.
나찰사원의 교조(敎祖)로서 한두 번 본 풍경도 아니었으니까.
“나 원. 문어발식 운영보단 있는 신도나 잘 챙기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터벅, 터벅, 터벅.
수예휘는 조용해진 창고를 홀로 돌아다녔다. 쌓여있는 상자를 뒤지고, 구석의 서랍도 괜히 열어보고.
“어째 일이 잘 풀리지 않는데.”
그러던 중 철제 서류함 세 번째 칸에서 이런 서류를 발견했다.
[헌터 프로필] [김기려]“그래, 참…….”
흐릿한 흑백 사진 너머로 누군가의 상이 보인다. 수예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하게 일이 안 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