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69
67화. 하동 (3)
그로부터 이틀 뒤.
선우연과 김기려는 정말로 하동에 도착했다.
‘괜히 부탁했나.’
하지만 이 B급 헌터는 고향 땅을 밟자마자 얕은 후회에 잠겼다.
“게이트는 제가 적당히 잡을까요?”
“네…….”
밖에서 훈련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지금부터 던전에 들어가야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달갑지 않았다.
전화 한 통 쓸 수 없는 미지의 별세계를 각성치를 숨긴 위장 등록자와 단둘이 들어가야 한다니.
이게 과연 맞는 일일까?
‘으으…….’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 사람 말이 옳아. 행인이 스킬에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그들은 이어서 근처 F급 게이트에 당도했다.
게이트 내부는 훈련하기 딱 좋은 드넓은 평야였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과연, 정말로 스킬을 3일 만에 쓰게 해줄는지.’
아직은 모든 게 반신반의한데…….
“잠깐만요.”
김기려는 긴장한 선우연을 흘긋 보다가, 재킷 품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다.
의외의 구성이었다.
“알코올 솜이랑, 사혈기?”
약국에서나 팔법한 것들이 왜 여기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혈 침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뒤이은 문장이 다소 섬뜩했다.
“손목 소독해요.”
“네?”
“이 부분 잘 소독하고, 스스로 찌르라고요. 지금.”
시작하자마자 대뜸 피를 뽑으라니.
“왜, 왜요?”
선우연의 눈이 커졌다.
김기려는 이를 보고도 무미건조하게 말할 뿐이었다.
“당신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요?”
“문제?”
“마력 운용이에요. 단순히 서투른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갈피를 못 잡고 있거든요.”
“어…….”
“그러니 가장 빠른 방법을 쓸 거예요.”
이때까지만 해도 선우연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해요? 어서 안 하고.”
하지만 별수 있나.
선우연은 결국 지시대로 피를 뽑기 시작했다.
동시에 김기려는 무언가 포션 같은 것을 마시는 듯싶었지만, 사혈기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보진 못했고.
“이러면 됐나요?”
달칵!
사혈기를 누르자 피부에 바늘이 꽂힌다.
선우연은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손목을 드러냈다.
“예. 잘하셨어요. 그럼 일단 마력을 다루는 감을 잡아야겠는데…….”
그런데 김기려는 이 와중에 본인 손을 왜 소독하나 했더니.
그는 이어서 선우연의 상처 부위를 턱! 움켜쥐었다.
“잘 보세요. 지금부터 딱 한 번만 시범을 보일 거니까.”
손목이 붙잡힌 선우연은 깜짝 놀라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어진 감각에 입이 딱 다물렸다.
“으윽!”
후욱.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가듯, 몸 안의 마나가 거칠게 휘돈다.
혈액과는 명백히 다른 그 이질적인 물질.
게다가 심장에 머무른 마나가 폐를 거쳐 나가는 이 예리한 자극은 분명 이전에도 느껴본 바 있다.
‘B급 게이트에서, 처음으로 스킬을 썼을 때의…….’
선우연은 무서우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력 흐름에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수 초 뒤.
모든 감각이 돌연 뚝 끊겼다.
김기려가 손을 놓아준 것이다.
“괜찮아요?”
“헉!”
그 말 한마디를 듣자 식은땀이 둑 터지듯 흘러나왔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이 헌터가 내 마력을 뜻대로 쥐고 흔든 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 다시 스킬 써봐요.”
“네?”
“방금 감각을 되뇐다는 느낌으로. 자, 얼른.”
스킬을 써보라는 그 남자의 말투는 워낙 가벼웠기에 그다지 신빙성은 없었다.
그래도 선우연은 속는 셈 치고 그의 조언을 따랐다.
‘아까 느낀 감각을 따라 하는 거라면.’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없던 맑은 날씨에 불현듯 돌풍이 분다.
휘이잉.
앞머리가 까뒤집힌 B급 헌터는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이건.
“스킬이!”
각성 스킬이다.
지금까지 그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를 찾아가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이렇게 단숨에 차도를 보일 줄이야!
“보셨어요? 스킬이 나왔어요!”
선우연은 기쁜 마음에 외쳤다.
정작 상대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거야 당연히 나오겠죠. 솔직히 당신처럼 스펙 좋은 각성자가 여태 스킬을 못 썼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던 건데.”
“그런가요?”
김기려가 냉철히 말하니 선우연은 들떴던 것이 가라앉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무튼 이쪽으로 와봐요. 이제부터는 스킬 조작법을 가르쳐줄게요.”
그러나 이 발언에는 다시 고개가 번쩍 들렸다.
“더 도와주시는 건가요?”
“돕는다기보다는, 어차피 감을 굳히려면 스킬을 많이 써야 하니까…….”
이왕 마나를 소모하는 김에 겸사겸사?
기려는 별거 아니라는 양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어진 교습은 절대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선우연 헌터, 숨 쉬어요 숨. 스킬 쓸 때 호흡 참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기려는 한눈에 선우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맞은 조언을 해주었다.
추상적이던 개념도 그의 설명을 거치면 금세 명확해지고는 했다.
이것으로 기려가 가진 지식의 깊이가 얼추 느껴진다.
왜 이런 말도 있잖은가.
자기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남에게 가르칠 수도 없다는 말이.
‘굉장해.’
이쯤 되면 김기려를 신봉하는 안윤승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확실히 그는 일반적인 각성자와 수준이 달랐다.
“숨차죠?”
“네. 마나가 고갈됐나 봐요.”
“오늘은 이만합시다. 연습에 몇백만 원짜리 포션을 들이부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드는 의문인데 말이다.
“저기, 잠시만…….”
그녀는 나갈 준비를 하던 김기려를 멈춰 세웠다.
게이트 안은 두 사람밖에 없으니 마침 좋은 기회다.
“김기려 헌터. 질문드릴 게 있는데요.”
“아, 네.”
선우연은 잠깐 말을 고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당신 같은 사람이 왜 F급인 척을 하는 거죠?”
기려는 침묵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텐데.”
“…….”
“왜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서 능력을 숨기는 거예요?”
각성 등급을 조작했다는 것은 곧 협회를 속였다는 뜻.
이것은 선우연이라는 인물이 김기려를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사유로 작용했다.
그래서 선우연은 정확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어째서 실력을 감추고 있느냐.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나.
나는, 당신을 신뢰해도 되는가.
“말해주실 수 없나요?”
선우연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질문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들은 당사자는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헌터 업계에서는 드문 취급을 받는 모발 염색. 그리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 남자는 차분히 두 눈을 감았다.
‘어, 뭔 소리지…….’
솔직히 이쪽 입장에서는…….
선우연이 왜 저러나 싶을 뿐인데.
‘지구인들 사고방식은 알 수가 없네. 뜬금없이 웬 등급 이야기?’
그는 상대의 진지한 태도를 고려하여 어떻게든 답은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굳이 그 답이 진실일 필요가 있을까?
‘흠.’
김기려는 환생 이후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었다.
개중에는 안윤승처럼 좋은 지구인도 있었지만.
역시 뇌리에 남는 것은 납치나 테러 등의 강력 범죄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치를 당한 것도, 강도를 당할 뻔한 것도 전부 자신이 힘없는 F급이기 때문이었다.
‘지구인들에게 얕보여서 좋을 거 없어.’
그렇다면 이젠 살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허세를 부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이미 유용한 핑곗거리가 있으니까.
‘좋아. 그 A급 헌터에게 둘러댔던 대로만 하면 되겠지.’
실로 뻔뻔하게도.
기려는 안윤승에게 써먹었던 레퍼토리를 통째로 재탕했다.
“선우연 씨는 각성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해요?”
각성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저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이 힘이 껄끄럽다.
이유 없이 생겼으면,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을 테니.
자신은 평소 각성 능력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기타 등등. 기려가 천연덕스럽게 지껄이자 선우연은 놀란 눈치를 했다.
‘이런 이유로 각성 능력을 쓰지 않는 거였다니.’
요즘 같은 스킬 만능주의 시대에는 상당히 보기 드문 사상 아닌가.
“그럼 저와 B급 게이트에 떨어졌을 때도 그래서 능력을 감췄던 건가요?”
선우연은 그의 말을 곱씹다 이내 질문했다.
그러자 기려는 바쁘게 머리를 굴린다.
“아, 그 일은 어차피 제가 나섰더라도 큰 도움은 안 됐을… 겁니다.”
“어째서요?”
“제 능력은 사람이 있는 곳에선 좀……. 쓰기가 어렵다고 해야 하나……?”
다짜고짜 강하다고 허풍만 쳐두면 나중에 귀찮은 사건을 떠맡을지도 모르는 일.
기려는 위기감에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하지만 선우연은 이 문장을 꽤 다르게 해석했다.
‘사람 앞에선 쓸 수 없다고? 이렇게 뛰어난 헌터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강한 스킬이 있다는 거야?’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 김기려는 마탑의 길드장처럼 주변에 광범위한 여파를 남기는 타입인가.
그렇다면 자진해서 능력을 자제할 만도 하지.
일단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헌터 협회를 속이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요?”
선우연은 협회 직원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유했다.
이제라도 진짜 등급을 밝히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자 김기려는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네요.”
“네?”
“상급 각성자로 한 번 찍히고 나면 원하지 않아도 능력을 써야만 하는 순간이 늘어날 텐데.”
후우.
“전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되도록 조용히 살고 싶어요.”
자신이 너무 잘났으니 세상이 귀찮게 굴까 봐 숨어지낸다는 설정.
진부하지만 허풍을 칠 때에는 또 이만한 게 없다.
“그렇군요.”
실제로 효과도 대단했다.
일단 선우연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갔으니까.
‘협회의 간섭이 염려되어 능력을 감추는 거라던 안윤승의 추측이 맞았어.’
하긴.
김기려 같은 능력자가 세상에 드러났다간 협회뿐만이 아니라 온갖 길드가 난리를 피울 터.
‘저런 힘으로 사고를 칠 바에야 차라리 조용히 지내주는 게 고맙지.’
선우연은 한결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게다가 마냥 세상일에 방관적인 태도라고 치기에는, 최근 들어 보여주는 행동도 있고…….’
그래. 비로소 저 헌터를 믿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우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제안했다.
“아 참, 슬슬 배고프실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좋은 가게라도 아세요?”
“어릴 때부터 다니던 식당이 있긴 한데…….”
그녀는 알까. 사실 김기려가 대화 내내 공갈을 쳤다는 걸.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결국 이번 대화로 인해 가장 손해를 볼 인물은 이 헌터니까.
“사주신다면 뭐든 고맙죠. 잘 먹겠습니다.”
김기려는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선우연의 말에 기쁜 기색을 보였다.
미래의 처형식.
문제의 기자회견이 실시간으로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으악, 시끄러!”
하동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요란한 알림 소리와 함께 기상한 나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도 일정이 잡혀 있으니까.
“훗.”
하동은 공기도 맑고.
이렇게 멀리 오니 왠지 스토커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군.
어쨌든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 들어.
‘순탄하네.’
준비를 마친 나는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익숙한 이름의 팻말이 걸려있었다.
[앞으로 15m → 살인벌의 둥지(C)]그렇다. 오늘은 바로 마력증폭제의 재료를 채취하는 날이다.
그리고 거슬리는 몬스터를 치워줄 요원은 바로 이분.
“선우연 헌터, 준비는 다 되셨죠?”
“어, 음. 일단은요.”
나는 쭈뼛거리는 B급을 향해 당당히 말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세요.”
이것이 오늘의 과제였다.
어제 배운 스킬 사용법을 몸에 익힌다는 명목으로 선우연에게 게이트 솔로 클리어를 맡긴 것이다.
“정말 저 혼자 해야 해요? 괜찮을까요?”
하여간 선우연은 대기조작 술사치고 자신감이 너무 없다.
저 능력이면 자기보다 상급인 헌터도 찜쪄먹을 수 있을 텐데 왜 저리 빌빌대는지.
“게이트 다 깨면 꼭 살인벌의 침은 다 챙겨와요. 그걸로 몬스터 몇 마리 잡았나 검사할 거예요.”
“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나는 턱짓으로 게이트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고작 C급 게이트인데 설마 별일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