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255
254화
-두 번째 조우(2)
“어이! 그거 조심해서 옮겨!”
“거기 비켜, 지나가잖아!”
창고 안은 분주했다.
덩치 큰 오크들이 자신들만큼 커다란 나무 상자를 어딘가로 열심히 나르는 중이었다.
“이거 바나나 냄새 아냐? 제길, 나는 맛도 못 봤는데.”
“맛은 무슨, 나는 구경도 못 해봤다.”
그들이 나르는 나무 상자 안에는 각종 보존 식품과 과일, 기타 식재료들이 그득했다.
그 외에도 옷가지나 생필품이 담겨 있는 상자들도 있었다.
“바나나, 아나나스, 오렌지군. 좋아, 넘어가.”
오크답지 않게 안경을 쓴, 지적으로 보이는 늙은 오크가 상자 안의 품목을 체크한 다음 고갯짓을 했다.
오크들은 그의 검사를 받은 상자를 검붉은 소용돌이 즉, 게이트로 들고 날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오크도 트롤도 아닌 인간 여자, 성이경이었다.
“최고급 홍차입니다. 따라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성이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잘 차려입은 트롤 집사 하나가 고급 찻잔에 우아한 향이 일품인 홍차를 따랐다.
먼지가 날리고 지저분한 창고 안이지만 성이경이 앉아 있는 테이블보와 식기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 고급진 물건이었다.
“나쁘지 않네.”
성이경이 홍차를 다 마실 때쯤엔 던전으로 들어갔던 오크들이 낑낑거리며 육중한 짐을 들고 다시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국방색 철제 상자에 담긴 K2 소총이었다.
K2가 창고 한구석에 차곡차곡 모두 쌓였을 무렵, 성이경이 손짓으로 안경을 쓴 늙은 오크를 불렀다.
“모두 나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돈께서는 카포 디투티 카피의 곁에서 잘 모시라고 제게 당부를 했습니다만…….”
“두 번 말 안 할 거니깐 당장 꺼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경의 태도에 늙은 오크의 미간이 꿈틀댔다.
패밀리의 보스인 돈 모렐로도 조직의 상담역인 콘실리에리인 그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콘실리에리이기에 그는 그녀가 가진 힘과 무기를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불쾌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다간 뉴가텀 타자기에 벌집이 된 에이랜드 고블린들이 부러워질 정도의 처지가 될 테니까.
“그럼 창고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이경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했고 그 역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기에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철수한다.”
늙은 오크가 부하들을 이끌고 창고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너도 준비한 거 차려놓고 꺼져.”
유일하게 남아 있던 트롤 집사도 테이블 위에 4명분의 다과를 차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넓은 창고 안에서 홀로 남은 이경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심지어 이경은 통역기를 켜지도 않은 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텅텅 빈 창고 안을 울리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지?”
세 명의 고블린 아니, 가면을 벗고 인간으로 돌아온 이현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어떻게 알아챈 걸까?
이현은 성이경이 몰래 창고로 들어와 숨어 있던 자신들을 눈치챈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성이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티를 냈으면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봐?”
“티를 냈다고?”
이현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성이경이 비웃음을 흘렸다.
“놀랐어? 뭐, 잘 숨긴 하더라. 그건 인정.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되지.”
키득거리며 거들먹대는 이경의 모습을 보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실수는 없었을 텐데.’
나진이 가진 아티팩트의 능력을 빌어 하늘을 날아 지붕으로 창고로 들어왔다.
물건을 나르느라 바빴던 오크들은 당연히 이현 일행을 눈치채지 못했을 터.
거기다 이경의 시선은 한 번도 그들이 숨어 있던 곳으로 향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경은 이현 일행의 침입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뭔가 다른 수단이 있다.’
감지 계열의 스킬이라든가 아티팩트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현은 분석안으로 성이경의 위로 떠 오르는 정보에 집중했다.
「이름 : 성이경
직업 : 던전 보스, E급
종족 : 현대 인류(인종)
격 : 130/700 (???)
스킬 : [영웅화(C)], [히로익 에이지(E)], -분석실패-
업적 : [홀로 우뚝 선 자]」
“허…….”
이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E급 던전 보스. 그리고 일부 스킬의 분석실패, 처음 보는 업적이야 그럴 수 있었다.
예전의 이현, 그리고 지금의 나진처럼 3번이나 승격한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현은 운이 조금 좋은 편이었지만, 그런 운이 이경에게도 없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현이 놀란 점은 이경의 격의 등급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저건 대체 뭐지? 해골?’
이현은 던전의 심상 공간에서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별을 보았다.
나진은 던전수에 흐드러지게 핀 이화 즉, 배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해골이라니.
던전의 심상 공간에서 나타나는 격의 등급 단위는 보스의 마음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졌다.
‘저 여자는 해골 무더기라도 본 걸까?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정신 상태인 건지.’
이현은 본능적으로 이경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
“뭐야?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불만 있어?”
“……아무것도.”
“짜증 나네, 너. 아, 언니는 아니에요.”
이경은 이현에게는 얼굴 가득 경멸의 빛을 띠더니 나진을 보는 순간 표정을 싹 바꾸었다.
“얼른 앉아요, 언니.”
이경이 자신의 맞은편으로 나진을 안내했지만, 나진은 이현의 뒤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보스는 이현이기에 그가 앉지 않는다면 자신도 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경이 다시 얼굴을 구겼다.
“띠껍게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래?”
전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이현 역시 굳이 그녀를 반갑게 대할 생각은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가 하필 나진이 앉길 바랐던 이경의 맞은편이라 그녀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대놓고 싫어하네.’
보스와 보스끼리 대화를 나누는 자리인데 나진이 이경의 맞은편에 앉는다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현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아코스와 나진까지 착석하자 이경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반갑다고 해둘게. 두 번이나 만나니 없던 정도 들겠어.”
차갑게 비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진심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와는 한 번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어.”
“몰래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기어들어 와서? 매너가 좋네.”
이경의 날 선 비아냥에 나진과 이아코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저번에 말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니?”
“어머, 언니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나진의 차가운 경고에 이경이 난처한 듯 미소를 지으며 사과해왔다.
물론 그 사과는 이현을 향한 것이 아니었지만.
“자자, 화 푸세요. 기껏 준비한 차가 다 식겠어요.”
아직 찻잔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이경이 나진에게 아양을 부리며 차를 권했다.
“너를 어떻게 믿고 차를 마시겠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상처 받아요. 너무 슬프다.”
진심으로 상처를 받았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진이었다.
“미, 미안.”
“아니에요. 당연히 그럴 수 있죠. 같은 지구인이지만,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이경이 가슴 앞에 양손을 꼭 모아쥐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진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더 알아가면 충분한걸요. 그렇죠, 언니?”
“그, 그런가?”
이경의 적극적인 공세에 나진이 당황하고 있자 이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안중에도 없나 보네.’
던전 보스끼리의 대화를 생각했는데, 이경은 나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나진 외에는 온통 신경을 끄고 있었다.
이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따뜻한 홍차를 마셨다.
나진이 그런 이현의 무모한 행위에 놀라 소리쳤다.
“이현아?”
“괜찮아요. 맛도 좋네.”
독이 들어가 있었다면 분석안으로 보았을 때 티가 났을 터였다.
홍차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등품이었고 맛도 좋았다.
“오, 이건 좀 챙겨가고 싶다.”
술의 신이었던 이아코스의 입맛에도 맞았는지 이아코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홍차를 음미했다.
하지만 나진은 여전히 불안한 듯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런 나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요, 누나. 독 같은 건 안 들어있어요.”
이현의 확인이 있자 그제야 나진도 홍차를 입에다 댔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지 많이 마시지는 않고 입술만 적시는 수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경의 표정이 혼난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언니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슬프다.”
“…….”
순간 정적 속에 이경이 젓는 티스푼이 찻잔을 건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네? 뭐가요?”
“우리가 너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어보는 나진의 물음에 이경이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못 믿을 게 어딨어요? 우리가 적은 아니잖아요. 아니에요?”
“적이 아니라고?”
“물론 첫 만남이 좋지 않았다는 거는 인정. 그렇지만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고블린이든 오크든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면 그만이고.”
이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
이경이 건네준 K2 소총으로 많은 고블린들이 죽어 나갔다.
물론 암흑가 조직원들의 목숨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는 건 나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허가 된 상점들과 전쟁에 휘말려 피 흘리며 죽어간 평범한 고블린 시민들은 죄가 없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적은 아니지.”
이현이 찻잔을 내려놓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테이블 밑으로 이현의 손이 나진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에요.’
다행히 이현의 눈빛을 읽은 나진은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이경의 미간이 구겨졌다.
“나 지금 언니랑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둘이 이야기하라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바쁘니깐 서로 필요한 이야기만 하자고.”
이현이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꺼내자 이경 역시 이현 못지않게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이야기?”
“왜 오크들을 돕는 거지?”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설마 너희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그런 논리야?”
이경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네 말대로 우리도 고블린을 돕는 건 마찬가지야.”
신형 골렘을 제작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K2 소총에 대항할 수 있는 스팀건의 개발 역시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우린 그만한 대가를 얻고 있어.”
신형 골렘, 그리고 새로 개발된 스팀건은 이현의 던전에도 보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너는 딱히 저들에게서 얻을 만한 게 보이지가 않는단 말이지.”
고블린에게는 증기 엔진 기술이 있었다.
그 기술이 바로 덩치 큰 오크나 오거, 트롤과 상대해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자, 이현이 고블린과 거래하기로 한 이유였다.
하지만 반대로 오크나 트롤은 그런 기술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경 쪽에서 현대 무기를 공급해주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네가 얻는 게 뭐지?”
이현의 눈이 차갑게 성이경을 바라보았다.
“글쎄…….”
이경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