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288
287화
-적은 더 가까이하라(1)
던전과 스카라반 행성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아니, 정확히는 던전이 위치한 지구와 스카라반 행성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현도 기억이 봉인된 티타니아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원인은 무척 고차원적인 데에 있었다.
스카라반 행성이 주성으로 삼은 항성의 중력과 상대성 이론에 의한 시간의 다른 흐름.
까딱 잘못했으면 던전에서의 시간 1년이 7년이 되는 게 아니라 유명한 SF 영화에 나온 행성처럼 1시간이 7년이 됐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현은 다시 자신 전용의 골렘 기체, 갓파더 Mk.2를 착용하면서 일행들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사도를 [워터게이트]를 통해서 던전으로 끌고 갈 거야. 거기서 하루만 버티면, 여기에서의 일주일을 벌 수 있어.”
던전과 스카라반 행성 간의 시간 흐름 차이를 이용해 트롤 주술사들이 대주술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것.
“이현아, 그건…….”
“알고 있어요.”
이현의 설명을 듣던 나진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에 사도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만약 이현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지금 뉴가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현의 던전에서도 벌어질 터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다른 수단이 없었다.
이현은 걱정스러워하는 나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구 구역에서는 싸우지 않을 거니까.”
결투로 얻어낸 크라쉬의 던전 구역은 몹시 넓었지만, 대부분이 숲이나 초원으로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이현은 그곳에서 사도와의 전투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그것보다 현은 괜찮겠어?”
이아코스의 걱정은 사도와 하루 내내 싸우겠다는 이현의 안위에 가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이번에도 역시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건 알지만, 지지도 않을 거야. 너도 알잖아? 던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
이현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 보면 히드라나 크라쉬 등 지금껏 만났던 강적과의 싸움은 모두 던전 밖에서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던전 보스는 자신의 던전 안에서 제일 강해지는 법.
[초기화]와 넘쳐나는 사념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던전 안은 이현의 홈구장이었다.그리고 이현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싸울 예정이었다.
“하루 정도는 너끈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거야.”
철컥.
갓파더의 착용을 완료한 이현은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사도를 향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진심으로 각오한 내가 얼마나 지독한지 보여줘야지, 안 그래?”
* * *
“리코스, 조심해.”
리코스는 말없이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꼬리로 마주 감았다.
“그리고 페르세우스를 잘 부탁해.”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이 된 디르케를 보며 리코스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페르세우스를 지켜낼 테니까.”
“으스러지면 안 되지.”
“뭐, 보스가 다시 살려주시지 않겠어?”
오로지 언데드라서 할 수 있는 말을 하며 리코스가 웃었다.
“당신도 몸조심해.”
“나도 죽으면 보스가 살려주실지도 모르지.”
“부모가 전부 언데드라면 페르세우스가 싫어하지 않을까?”
리코스가 안아 들 때마다 ‘아빠 차가워!’라며 진저리를 치는 페르세우스를 떠올리곤 부부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도와의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벌어지는 부부의 시시콜콜한 대화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내용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리코스! 준비해!”
“예! 보스!”
이현의 호출에 우렁차게 대답한 리코스는 디르케를 한 번 안아주었다.
“다녀올게.”
“……그래도 으스러지지는 마. 격 떨어지니까.”
“명령 받들겠습니다. 백인대장님.”
리코스가 가슴을 쿵쿵 두드려 경례하고는 이현의 뒤를 따라 떠났다.
그 모습이 사라지자 디르케의 얼굴에서 남편을 사지로 보내는 아내의 표정 역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군세를 이끄는 지휘관의 냉철하고 굳은 표정뿐이었다.
“부부간의 시간은 잘 보내셨나?”
“……부끄럽습니다.”
결혼한 지 꽤 되었고 아이까지 있는데, 갓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부끄러워하는 리코스를 보며 이현이 키득댔다.
하지만 곧 표정을 바로 하고 던전 보스로서 지시를 내렸다.
“리코스, 너는 먼저 가서 준비해.”
작전의 첫 번째는 시간 끌기였다.
이현은 리코스를 던전으로 먼저 보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사도와 싸울 무대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정확히 2시간. 그 이상은 벌기 힘들다.’
이곳에서의 120분은 시간의 흐름이 차이가 나는 탓에 던전에서는 17분이 조금 넘는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준비하기에 촉박한 시간이겠지만, 유능한 던전 도우미 티타니아의 능력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전장의 위치는 화이트 캐슬 동편의 초원이야. 기억하지?”
“예.”
이현은 리코스를 먼저 게이트로 보내고는 사도를 쳐다보았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던전 게이트로 유인하느냐겠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도 벌레 신의 사도는 시청 주변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현의 군세와 맞붙는 역할도 모두 권속 누에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가만히 있는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움직인 것은 이현이 수류탄이 달린 창을 투척했을 때 주변을 꼬리로 짓뭉갠 것이었다.
‘그것도 제자리에서만 꼬리를 휘두른 것이 다였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고통과 상처를 주면 사도를 유인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현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웠다.
“어이! 나방도 아니고 지네도 아닌 벌레 새끼야!”
이현은 사도에게 잘 보일만 한 위치의 건물 지붕 위에서 목소리를 높여 도발을 시도했다.
사도를 유인하려면 우선 관심부터 끌어야 했다.
‘분명히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었으니 내 말도 알아듣겠지.’
하지만 사도는 마치 벌레가 운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벌레한테 벌레 취급을 받으니 이거 자존심 상하네.’
물론, 크기로 따지자면 이현 쪽이 벌레에 더 가까웠겠지만, 그렇다고 이현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냐, 내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마!”
이현이 골렘의 손에 들려 있는 거대한 [판타소스의 꿈]을 창의 형태로 변형시켰다.
조금 전 사도의 겉껍데기를 뚫었던 투창처럼 나선 형태의 날을 한 창이었다.
‘여기에 [부여]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판타소스의 꿈처럼 상급 아티팩트에 [부여]를 하기엔 이현의 능력이 모자랐다.
“이걸로도 충분해!”
이현은 골렘의 발을 강하게 구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발 구름이 어찌나 강했던지, 그 반동으로 건물의 지붕 전체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골렘에는 [부여-경량화]를 시켜놓은 터라 훌쩍 뛰어오를 수 있었다.
“나한테 집중하라고!”
이현이 고함과 함께 나선 창날을 그대로 사도의 등허리에 내리꽂았다.
콰직!
사도의 겉껍데기가 부서져 나가면서 창날이 사도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부여]는 힘들었지만, 대신 [강화]로 창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현과 골렘의 힘이 합쳐진 결과였다.하지만 이현의 그런 강력한 일격도 사도에게는 따끔한 수준에 불과한 듯 사도의 몸이 움찔하는 정도였다.
“이 정도는 안 통한다 이거지?”
그럼 통하게 해야지.
이현은 창날의 형태를 나선형에서 미늘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창을 미친 듯이 쑤셔대며 사도의 겉껍데기를 헤집어놓았다.
푹! 푹!
“크큇?”
가지처럼 돋아난 미늘에 걸려 겉껍데기가 뜯어지고 찢어져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나서야 사도가 반응을 보였다.
“귀찮은 것이 달라붙었구나.”
등을 헤집는 고통, 그래 봤자 바늘로 여러 번 찔린 듯한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이현의 시도는 성공했다.
고개를 돌린 사도와 이현의 눈이 마주쳤다.
“오냐, 이제야 관심을 좀 주는구나.”
하지만 사도의 겹눈 속에 떠오른 것은 분노도 고통도 아닌 귀찮음이었다.
“네가 감히 누구의 몸 위에 올라와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미물.”
“벌레 새끼가 누구보고 미물이래?”
“작은 것을 보고 미물이라 했을 뿐인데 틀렸더냐? 네 공격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따끔한 정도구나. 크큇큇큇.”
사도가 소리 내어 이현을 비웃었다.
심지어 날개까지 퍼덕여가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현이 골렘 안에서 얼굴을 구겼다.
“아, 열 받네.”
이현은 연이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도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선물을 준비했다.
“이건 따끔 수준이 아닐걸?”
이현은 재빨리 창을 뽑아낸 뒤 골렘 전용 스팀건의 총구를 상처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아까 수류탄만으로도 그 난리를 쳤는데, 이건 얼마나 아플까?”
이현이 히죽 웃으며 스팀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크퀴에에에엑!”
사도의 몸속에서 스팀건이 격발됨과 동시에 고통의 비명이 주변에 널리 퍼졌다.
사도의 지네 몸 역시 고통으로 인해 구불대며 요동치고 있었다.
‘와, 이거 로데오하는 기분이네.’
이현은 요동치는 사도의 몸에 다시금 창을 겉껍데기에 꽂아 넣어 골렘을 고정했다.
“한 번만 아프면 섭섭하지 않겠어?”
쾅! 쾅! 콰앙!
연이은 격발에 사도의 몸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키에에에에엑!”
등 속을 쑤셔대는 스팀건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도 덕분에 주변에 있던 권속 누에들이 모조리 으깨져 나갔다.
“이게 바로 이이제이인가?”
권속 누에들의 잔해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이현이 스팀건의 탄약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이런, 총알 아껴야지.”
이현은 스팀건을 사도의 몸속에서 빼내었다.
골렘 전용 스팀건은 크기가 큰 덕분에 소모하는 탄약 즉, 넥타르와 암브로시아가 섞인 용액의 소모가 일반 스팀건보다 더 컸다.
이곳에서야 릭이 만들어 놓은 용액이 있었으니 쉽게 재장전이 가능했지만, 던전으로 돌아가면 재장전은 힘들었다.
‘[부분 초기화]로 복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남겨야 수월하지.’
이현은 스팀건의 탄약 잔량을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사도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어때? 이것도 따끔했냐?”
“이 하찮은 놈이!!”
이현이 퍼부은 총격에 사도의 등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권속 누에들이 달라붙어 치료하는 중이었기에 금세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현이 이를 갈았다.
‘진짜 어지간히 격이 높은 것들은 다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히드라는 이아코스의 회심의 일격으로 회복할 새도 없이 전신을 날려 버렸지만, 사도는 그게 힘들었다.
그래서 트롤들의 대주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끌어야 하고.’
분통이 터져 난동을 피우는 사도에게 이현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다시금 도발을 시전했다.
“열 받으면 와서 잡아보시든가?”
“오냐! 주제를 모르는 네 영혼에 벌레 신의 공포를 똑똑히 새겨주도록 하마.”
골렘의 엉덩이를 두드리면서까지 보이는 유치한 이현의 도발에 넘어온 사도가 드디어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이네. 어휴, 저 둔한 몸뚱……. 어?”
이현이 막 움직이기 시작한 사도를 보며 비웃으려는 찰나였다.
파드득!
장식처럼 보였던 나방 날개가 초고속으로 날갯짓을 하기 시작하자 거대한 사도의 몸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날아? 저 몸으로?”
이현은 잠시 멍하니 허공으로 떠오르는 사도를 보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길, 앞에 다 피해!!”
콰르르르르!
마치 압도적인 크기의 해일이 밀려오듯이 사도가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도가 목표로 하는 건 바로 이현이었다.
“저 몸뚱이로 나는 게 말이 되냐!”
하지만 더 불평할 새도 없었다. 이현이 이를 악물고 골렘의 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그가 도망치는 방향은 던전 게이트가 있는 언덕 위의 저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