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376
375화
-현녀강림(3)
다음 날 아침.
서호의 표면에 자욱한 운무가 구름처럼 드리워졌다.
그곳에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작은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
“에취!”
늙은 거지이자 개방의 방주인 주팔공이 재채기를 크게 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낡은 누더기옷이 싸늘한 안개에 다 젖어 버렸군. 고뿔에 걸리겠어.”
“방주의 누더기보단 낫지만, 내 도복도 축축하게 젖은 지 오래이외다.”
물을 먹어 차가워진 도복의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던 태허자가 배가 향하는 방향을 보며 투덜거렸다.
“대체 왜 이 아침부터 호수 한가운데로 오라는 겐지.”
“아미타불. 무소식이 희소식보다 나은 법입니다, 장문인.”
“그렇긴 합니다만. 거참.”
아예 부르지도 않고 무시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불러내는 게 낫다는 현당의 말에 태허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섬이 보이는구려.”
주팔공의 말대로 나룻배는 곧 서호 한가운데의 섬에 닿았다.
처음 그들이 은미환과 회담을 나눴던 장소이기도 해서, 삼인방은 흐린 시야에도 척척 길을 찾아갔다.
“어서들 오시지요.”
“벌써 와 계셨습니까.”
미리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은미환에게 현당이 놀라워하며 반장을 했다.
은미환도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주인 된 자가 불러놓고 객들을 기다리게 할 수야 있나요. 자, 몸이 식으셨을 테니 데운 술을 한 잔씩 하시지요.”
“술이라니! 은 맹주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술 이야기가 나오자 주팔공이 희희낙락하며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차도 있으니 방장께서도 앉으시지요.”
현당은 말없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끝까지 앉지 않는 이도 있었다.
“배려심이 넘치시는군. 기왕 그럴 거면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부르시는 게 낫지 않았겠소?”
“태허자!”
벌써 따뜻한 술 한 잔을 다 마신 주팔공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태허자는 콧방귀를 뀔 뿐 전혀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찬 바람 부는 얼굴로 은미환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당장은 아쉬운 처지긴 하오만 언제까지 은 맹주의 콧대가 높을지 모르겠소이다.”
“어머, 감히 무당의 장문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사과드리지요.”
태허자의 도발에도 은미환은 고운 얼굴에 한점 분노의 기색 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태허자만 한층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흥!”
“이 말코가 어제부터 계속 사고만 치는구먼! 이쯤하고 그만 앉으시오.”
주팔공이 은미환에게 이를 갈고 있는 태허자를 서둘러 자리에 앉혔다.
잠시 소란이 지나가고 모두가 착석하자 현당이 입을 열었다.
“은 맹주께선 어이하여 이런 아침부터 본인들을 초대하셨는지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랍니다.”
은미환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삼인방 모두 놀라 움찔했다.
“그, 그게 참이요? 그러니까….”
주팔공이 술잔도 놓칠 정도로 당황해서 말을 이었다.
“내공심법을……?”
주팔공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은미환은 미소만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재라, 선재. 은 맹주께서 큰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현당도 크게 기뻐하며 은미환에게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직 태허자만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흥! 기왕 해줄 거면 진즉에 해줄 것이지!”
조용히 속삭였다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무림 고수.
그중에서도 은미환은 내공을 가진 고수였다.
그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장문인!”
그 온화한 현당마저 낯빛을 굳히고 태허자에게 한소리를 할 정도였다.
“괜찮아요, 방장. 제 우유부단함 때문에 여러분의 심화가 깊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은미환은 얼굴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부드럽게 현당을 말렸다.
상황이 어색해지자, 주팔공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은 맹주. 마음을 바꾸신 건 감사한 일이다만, 어떤 바람이 불었기에 어제와 달라지신 게요?”
주팔공의 물음에 현당은 물론이고 태허자도 궁금하다는 듯 은미환을 바라보았다.
삼인방의 시선을 받는 그녀의 두 눈이 잠시 먼 곳을 바라보듯 아득해졌다.
“간밤에 몽중현녀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
“뭐요?”
“아미타불.”
삼인방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미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10년 전, 간악한 마교의 앞잡이 범소백의 손에서 우리 월녀검문을 구해주신 몽중현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은미환의 아득한 눈빛을 본 주팔공과 현당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은 맹주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 아니오?’
‘아미타불, 은 맹주에게 심마가 깃든 게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그사이에도 은미환의 말은 이어졌다.
몽롱한 듯, 기이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졌다.
“10년 전에는 월녀검문 만이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은 중원 전체가 사기에 침범당할 것이니라. 그러니 내가 하계로 내려갈 것이다.”
“헛소리!”
쾅!
탁자를 내려치며 태허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보자 보자 하니까 더는 못 봐주겠군!”
태허자는 소매를 바람 소리가 나게 홱 떨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제 보니 은 맹주께서도 저 사특한 마교 잡배들과 다를 것이 없소이다. 몽중현녀? 보나 마나 맹주께서 지어낸 허무맹랑한 잡신일 거외다. 그런 이름으로 우리를 농락하려 들다니!”
분노로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을 삿대질하는 태허자에게 은미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분은 정말 계십니다.”
“이제 그만하시오! 지금까진 같은 정파이자 무림 동도로서 참고 넘어갔지만, 한 번만 더 우릴 속이려 했다간….”
“태허자!”
“조용히 하시오, 방주! 지금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해둬야….”
“태허자!”
태허자의 분노에도 주팔공은 다시금 그의 말을 끊었다.
“방주!”
“아니, 이 말코 도사야. 저기를 봐!”
“뭐?”
태허자의 고개가 주팔공이 가리킨 곳을 향해 돌아갔다.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의 온기에 운무가 옅어지는 호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이 늙은 거지야!”
“거기가 아니라, 위! 위를 보란 말이다!”
주팔공의 외침에 태허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곤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저, 저, 저게 뭐야!”
옅게 남아 있던 운무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아침 햇살이 길이라도 되는 듯, 그 위를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몽중현녀십니다.”
은미환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태상노군이시여…….”
얼이 빠진 태허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 *
치직-.
[누나, 들려요?]무전기 소리와 함께 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탈라리아를 신고 공중에 떠서 호수의 운무 속에 숨어 있던 나진 역시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응. 잘 들려. 후후.”
오랜만에 쓰는 무전기에 나진은 던전 초창기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음? 무슨 일 있어요? 왜 웃어요?]“안 가르쳐줌.”
나진은 혀를 쏙 내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현은 영문을 몰랐지만, 나진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작게 웃었다.
[밑에 놈들 떠드는 거 보니 곧 내려오면 될 거 같아요. 신호하면 내려오세요.]“응, 알았어.”
[내공은 적당히만 써요. 알겠죠?]“걱정하지 마.”
나진이 피식 웃고는 무전을 끊고 무전기를 품에 넣었다.
이제 곧 내려가 몽중현녀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저들에게 무전기를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나진은 자신의 볼을 짝짝 두드리며 자기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몽중현녀다. 나는 신비롭다. 나는 대사부가 될 사람이다.”
그녀가 지금 몽중현녀를 연기하는 이유는 이현의 작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저 늙은 도사 할아버지 때문이지.’
현당과 주팔공은 내공심법이 간절했기에 몽중현녀의 실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지만, 도사인 태허자는 달랐다.
은미환은 그가 끈질기게 트집을 잡는 바람에 회담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었다.
‘저들이 몽중현녀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진짜 보여주면 되죠.’
나진이 진짜 여신은 아니지만, 저들에게 진짜처럼 보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현 일행에게는 그렇게 보이게 만들 방법이 존재했다.
‘자, 그러면 준비를 해볼까?’
나진은 부러진 애각창 아니, 티타니아가 빙의해 업그레이드된 [수복된 애각창(B)]을 들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세차게 앞을 향해 내질렀다.
“[화예소휘창-화류낙월(花流落月)]!”
란나찰의 창법으로 강한 회전을 담아 내찔러진 애각창이 나진의 앞쪽 운무를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양단했다.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아침 햇살이 운무가 갈라진 사이로 빛의 길을 만들어냈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이현이가 이런 것도 계산했나? 에이, 설마.’
나진은 놀람 반, 감탄 반으로 빛의 길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애각창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티타니아, 부탁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티타니아가 빙의된 애각창은 하늘로 솟구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우. 떨린다.”
나진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입과 얼굴 근육을 풀었다.
“난 몽중현녀야. 신비롭고 아름다운 몽중현녀.”
나진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이참, 연기도 몇 번 안 해봤는데.”
연기라곤 드라마의 카메오나 예능 재연 배우로 몇 번 출연해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히 몽중현녀가 되어야 했다.
나진이 심호흡을 크게 하는 동안, 그녀의 품속에서 치직, 무전기 소리가 울렸다.
[누나, 지금이에요.]“자, 가자.”
나진이 큰마음 먹고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현녀가 강림할 시간이었다.
* * *
“히꾹!”
허공에서 내려오는 나진의 모습에 삼인방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니, 딸꾹질을 시작했다.
“허, 허공답보?”
“저게 무슨 허공답보야! 네가 그러고도 도사냐!”
주팔공이 체면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선녀다! 선녀가 내려오시는 게야!”
선녀라니. 거지가 아침부터 술에 취했나?
하지만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며 내려오는 나진의 모습에 태허자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옷에 분홍 꽃이 자수된 아름다운 옷을 입은, 그 옷보다도 아름다운 미태를 가진 여인.
호수의 운무를 가르며 빛의 길을 따라 허공에서 내려오는 그녀는 누가 봐도 선녀의 모습이었다.
태허자가 입을 쩍 벌리고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은미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분이 바로 여러분께 내공심법을 전해주실 몽중현녀십니다.”
저 여인이 몽중현녀라고? 태허자가 눈만 끔뻑이고 있을 때 주팔공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녀가 여신이셨군. 어쩐지 성스럽기까지 하더라.”
“아미타불.”
현당마저도 부동심을 잃고 조용히 합장하는 사이 몽중현녀가 부드럽게 섬에 내려왔다.
“오셨습니까, 몽중현녀 님.”
은미환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나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인도했다.
나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아직도 놀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삼인방을 바라보았다.
“너희로구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삼인방은 항거할 수 없는 격의 차이를 느꼈다.
그녀가 일부러 목소리에 격을 섞은 탓이었지만, 무공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인 그들이 알아챌 리가 없었다.
‘지, 진짜다!’
태허자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몽중현녀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무당의 태허자가 몽중현녀를 뵙고 삼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홍복을 내리소서.”
누구보다도 몽중현녀를 강하게 부정했던 태허자의 완전 항복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