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44
43화
-또 다른 보스(5)
“그럼 선배님, 무례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이걸 드리고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우렁찬 쇼구즈의 인사와 함께 그들은 다시 던전의 벽을 뚫고 떠나 버렸다.
구더기가 피부를 뚫고 나오는 기묘한 느낌도, 그들이 남기고 간 적갈색 보석도 무시한 채 이현이 티타니아에게 소리쳤다.
“그걸 덥석 받아들이면 어떡해?!”
던전 도우미는 담당한 보스가 사망, 혹은 타 던전에 흡수될 때, 총관이 있는 본사로 돌아간다.
그런데 결투 조건으로 크라쉬는 티타니아의 종속을 내걸었고, 티타니아는 그걸 승낙해 버렸다.
만약, 이현이 결투에서 지게 되면 티타니아는 크라쉬의 밑에서 노예처럼 살게 될 터였다.
“괜찮아요.”
“괜찮긴 뭘! 지면 그냥 노예가 되는 거잖아!”
노예가 되어 버리면, 크라쉬가 죽을 때까지 던전 도우미 자격을 박탈당한 채 살게 된다.
“이기면 되죠! 제가 보기엔 주인님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승산은 무슨, 아까 보니 오금부터 달달 떨리더만.”
이현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신체조건만 해도 이길 엄두가 나질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목책을 부수던 모습을 보면 근력 자체도 인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현이 던전 보스가 되면서 얻었던 여러 능력이 크라쉬에게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더 뛰어날 터였다.
이현은 F급이고 그는 D급이었으니.
“강해지면 되죠! 주인님은 규격 외 던전보스니까요!”
항상 얄밉기만 하던 티타니아의 미소가 환했다.
이현을 깊게 신뢰하고 있는 미소였다.
그걸 본 이현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더 화를 내지도 못하고 뒷머리만 긁적였다.
“에휴. 일단 뒷정리부터 하자. 꼭 태풍이 지나간 것 같네.”
이현은 [부분 초기화]로 목책을 복구하고 나진에게 무전을 넣어 비상사태가 끝났음을 알렸다.
“민아야, 이리 와서 쉬어.”
민아가 비척대며 이현의 곁으로 오자 이현은 민아를 안고 텐트 안에 눕혀주었다.
“힘들었지?”
“아빠, 지킬 거야.”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한 민아는 머리가 닿자마자 곧 색색 숨을 내쉬며 잠에 빠졌다.
구울은 수면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크라쉬 같은 격 높은 상대를 맞닥뜨리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상당했을 터였다.
“격의 보호를 받는 나도 힘들었는데 민아는 더 힘들었겠지.”
기특하게도 마혈소총을 놓지 않고 품에 꼭 안은 채 자는 민아를 둔 채 이현은 다시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이현의 손안에는 그들이 사죄의 의미로 두고 간 보석이 있었다.
자수정처럼 반투명하면서도 은은히 적갈색 빛을 띠는 보석이었다.
“이 보석은 대체 뭐지?”
* * *
“왜지?”
크라쉬의 고향 땅과 닮은 새하얀 백악 해안 절벽의 꼭대기 위에 그의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궁전 깊숙한 곳의 옥좌에 육중한 자신의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의 옥좌는 여태껏 쓰러뜨린 자들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져 있었다.
“말해. 왜 준 거지?”
그를 고전케 했던 상아종의 거대한 엄니로 만들어진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크라쉬가 으르렁댔다.
그의 말은 엉성했지만, 두뇌까지 엉성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크라쉬는 적에게 도움을 준 쇼구즈를 문책했다.
슬러그 스톤.
말 그대로 격의 찌꺼기가 뭉쳐서 굳은 보석이었다.
크라쉬의 목적은 던전에서 다시 나가 왕의 목을 꺾는 것이었다.
때문에, 격을 올릴 수 있다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급이 낮은 던전들을 약탈하고, 자신의 던전에 들어오는 헌터들을 남김없이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거기에 영약, 아티팩트, 업적 등 격을 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욕을 부렸다.
심지어 그것이 다른 던전의 보스를 잡아먹는 것이라 할지라도.
때문에, 그의 격은 언제나 탁했다.
“뭐 어때서요. 어차피 남아도는 거잖아요?”
격의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항상 격 안에 섞여 있는 불순물을 한데 모아 배출했다.
옥좌 주변에는 그가 배출한 슬러그 스톤들이 수북하게 언덕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그래도 맘에 안 들어. 배신이다.”
쿵!
얼마 전에 그와 맞붙었던 사우레노르 영웅의 두개골이 화난 크라쉬의 주먹에 뭉개졌다.
지금 크라쉬의 던전은 이현과 같은 사우레노르의 행성에 열려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현의 던전에 침입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배신이라뇨, 주인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쇼구즈가 꾸물렁대며 그의 어깨에서 내려와 부서진 두개골을 녹여 흡수했다.
깨끗해진 옥좌 위에서 말랑대며 쇼구즈가 대답했다.
“저는 독을 푼 거예요.”
“독?”
“네. 아주 달콤해 보이는 독이요.”
슬러그 스톤은 특수한 스킬을 써서 재처리하면 훌륭한 던전수의 비료가 된다.
그 때문에 던전 보스들 간의 거래에선 화폐 대용으로 쓰일 때도 있었다.
물론 쇼구즈의 대선배인 티타니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분명 그걸 어떻게든 쓰려고 할 터였다.
“슬러그 스톤을 재처리하지 않고 바로 쓰면 그 미개한 인간의 던전수는 금방 주인님의 격으로 오염될 거예요.”
슬러그 스톤은 그 효용성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그걸 배출한 크라쉬의 격으로 만들어진 물질이었다.
재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현의 던전수는 그대로 크라쉬의 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효과는 뛰어날 거예요.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주인님의 슬러그 스톤은 보통 독한 게 아니잖아요?”
난잡하게 격을 쌓은 탓에 불순한 찌꺼기가 과다하게 많은 그의 슬러그 스톤은 재처리가 힘들었다.
크라쉬가 슬러그 스톤을 수없이 쌓아놓고도 유용하게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단점이 치명적인 독으로 이현에게 작용하리라.
“과연 선배님이 그걸 알 정도로 던전 지식 스킬의 봉인을 풀어냈을까 궁금하네요.”
쇼구즈가 꾸물렁대며 키득댔다.
분명 존경스러운 선배였지만, 동시에 봉인이라는 치욕적인 일로도 유명한 선배기도 했다.
“만약 멍청하게 그걸 그대로 비료로 쓴다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그 던전을 먹을 수 있게 될 거예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사죄의 선물로 쓰지도 못할 쓸모없는 돌덩어리를 받은 거니 열 받겠죠.”
“흠. 좋군.”
잘 안 되어도 이득, 잘되면 대박인 선택지였다.
쇼구즈의 설명에 만족했는지 크라쉬가 쇼구즈의 몸을 탁탁 두들겨댔다.
‘자, 그럼 선배님은 어떻게 나오실 건가요?’
* * *
“우와, 인심 쓰듯 주고 가더니 완전히 쓰레기를 주고 갔네.”
물론 티타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던전 지식이 D급으로 오른 덕분도 있었지만, 쇼구즈가 칭찬했듯이 그녀는 한때 도우미 계의 전설이었다.
즉, 짬밥이 남다르다는 소리였다.
“걔는 설마 제가 이걸 주인님께 쓰라고 부추길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그렇게 쓰레기야?”
“네. 쓸 곳 따위 전혀 없는 똥 덩어리예요.”
티타니아는 이현에게 슬러그 스톤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격의 찌꺼기를 모아서 배출하는 일종의 배설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에 이현이 질색했다.
“그러고 보니 색도 딱 그 색이네.”
이현은 바닥에 내려놓은 보석을 보며 서둘러 손을 물티슈로 닦았다.
아까까지 자수정처럼 신비하고 오묘한 색처럼 느껴지던 보석의 적갈색이 이제는 코를 막고 싶어지는 색으로 보였다.
“가지고 있다가 화폐로 쓰면 되지 않을까?”
“우리 같은 F급이랑은 어떤 보스도 거래하려 들지 않을걸요?”
그만큼 격의 차이가 크게 나면 거래로 이득을 볼 일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현의 던전이 승격해서 격의 차이를 줄여나갈 수도 없었다.
“크라쉬가 기다려주기로 한 건 E급 승격까지였지?”
“네. 던전을 승급시켜도 다른 보스들과 거래를 하기도 전에 크라쉬와 싸우게 될 거예요.”
“계륵이네. 그냥 원시인이 신용카드를 들고 있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화폐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이지만, 당장 필요한 지금 쓸 수가 없었다.
이현은 허탈한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이거 비료로도 쓴다고 했지? 그냥 던전수에 흡수시키면 안 될까?”
“재처리하지 않으면 큰일 나요.”
티타니아는 재처리하지 않은 슬러그 스톤을 던전수에 흡수시켰을 때의 위험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거기다 순도가 너무 낮아요. 왜 우리 같은 최하급 던전을 털러 왔나 했더니, 격을 올리려고 아무거나 막 먹어댔나 봐요.”
“먹어댔다니, 윽.”
이현은 크라쉬가 자신을 뜯어먹는 상상을 하곤 몸서리를 쳤다.
어쨌든, 그 때문에 슬러그 스톤은 불순물이 다량 섞인 고약한 배설물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아마 그대로 던전수에게 줬다간 말라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그냥 똥 덩어리라며 티타니아가 슬러그 스톤을 발로 차버렸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슬러그 스톤을 보며 이현은 분석의 안약을 꺼내 들었다.
‘일단 이것도 던전 밖의 물건이니 티타니아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이현은 분석안이 슬러그 스톤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것을 기대하며 안약을 눈에 넣었다.
「크라쉬의 슬러그 스톤」
‘색이 꼭 그놈 같더라니, 크라쉬 본인의 격 찌꺼기였네.’
보스가 가진 찌꺼기라면 그래도 가치가 높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이현은 다시 슬러그 스톤을 주워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설명이 슬러그 스톤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 추출 가능 요소
– 거인족 인자 추출(20)
– 잔류 격 추출(20)
– 던전수의 양분화(40)」
이현은 눈을 크게 떴다.
특수한 스킬이 있어야 재처리할 수 있다는 슬러그 스톤을 규격 외의 격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아마 옆에 있는 숫자는 처리하는 데 드는 규격 외의 격의 수치겠지.’
생각보다 많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이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티타니아.”
“네?”
“그 후배님, 다음에 만나면 잘해드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주 고마운 분이시네. 복덩이야 복덩이.”
구린내 나는 똥도 누군가에겐 약이 되는 법.
이현은 슬러그 스톤이 황금 덩어리라도 되는 듯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규격 외가 또 규격 외 해버렸다. 으히히히.”
갑자기 낄낄대는 이현을 티타니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 *
[그렇게 됐습니다. 이런 소식 전해줘서 미안합니다.]“아니에요. 전해줘서 고마워요. 이현 씨도 다치는 일 없이 끝났다니 다행이에요.”
나진은 이현에게 푹 쉬라는 인사를 하고 무전을 끊었다.
“에휴.”
맘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고 사고만 쳐댔던 고재성이었지만, 막상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나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함께 듣고 있던 혜인과 춘식의 얼굴도 어두웠다.
“나진 씨, 너무 상심허지 말어.”
하지만 정작 나진을 위로하는 춘식의 얼굴이 더 무거웠다.
아마 방송국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니, 오히려 그 사람들보다 춘식이 더 재성과 가까웠으리라.
“언니, 우리도 언젠간 재성 오빠처럼 죽는 걸까요?”
공포에 질린 혜인이 울먹거렸다.
헌터라는 괴물들이 아니라 다른 던전의 보스가 와서 사람을 죽였다.
이젠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와 그들의 목숨을 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진은 아닐 거라고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녀도 장담하지 못하는 말로 위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혹시 이현 씨한테 들은 거 없으세요? 우리가 던전에 휘말리기 전 이야기요.”
“그 친구가 그때 일은 잘 이야기하려 들질 않아서…….”
재성 생각에 눈가를 훔치던 춘식이 고개를 저었다.
캠핑장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던 당시의 일은 이현에게 괴로운 과거였다.
때문에, 이현은 그때 일을 잘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그 헌터란 놈 중 하나를 죽였을 때 많은 게 바뀌었다는 소리를 하긴 했어.”
“우리도 그래야 할까 싶어요.”
“설마… 언니……?”
혜인이 경악했지만, 나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도 힘을 길러야지. 이현 씨를 돕기 위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나진의 눈이 결연히 빛났다.
“설령 그게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되더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