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74
73화
-전쟁의 조짐(3)
“이곳으로 100명이 넘게 온다고?”
“100명의 병사뿐만이 아니야. 보급과 지원을 할 200명이 함께 올 거다.”
디르케가 전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도합 300명의 사우레노르가 던전 공략 원정을 온다는 말에 이현도, 리코스도 말을 잊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사태야?”
이현의 질문에 리코스가 턱 뿔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준전쟁. 아니, 소규모 전쟁에 필적한다고 봐야겠군요.”
“전쟁?”
이현이 어이가 없어져 입을 쩍 벌렸다.
“보통 던전 공략에 병사들이 파견되는 일도 드뭅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파견된 병사들을 그냥 물리친 것도 아니고 전멸시켰다면, 이스메이아 지도부가 그리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하급 던전이랑 붙겠다는 거잖아.”
이현의 입장에선 억울해서 펄쩍 뛸 판이었다.
먼저 침입한 건 헌터들인데, 실패하니까 군대를 끌고 와서 전쟁이라니.
리코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결정입니다. 5대 가문의 수장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코스가 그들 중 하나의 딸인 디르케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그도 잘 알고 있듯이, 디르케는 신경 쓰기는커녕 ‘생각 따위를 할 리가’라며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로코스가 움직이기로 결정된 이상 취소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들은 오로지 이스메이아의 적을 멸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니까요.”
디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코스, 즉 백인대가 특별한 집단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100명 이상의 병력이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전쟁을 의미했다.
“빌어 처먹을.”
이현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싸울 수 있는 인원이 30도 안 되는 던전에서 그 열 배의 병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으아악! 총관님, 이거 난이도 똥망이잖아요!!”
이현이 하고 싶은 말을 티타니아가 머리를 잡아 뜯으며 대신해주었다.
디르케가 수심이 깊어진 리코스의 성한 손을 잡아 왔다.
“디르케?”
“원래라면 이런 군사 기밀을 밝히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이 사실을 말한 것이 잘한 것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리코스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까 네 주인이 육신이 달라졌을 뿐 바뀐 건 없다고 했지.”
디르케가 너덜거리는 리코스의 상처 난 팔을 쓰다듬었다.
드러난 근육과 혈관에서는 차가운 피마저 흐르지 않고 있었다.
정상적인 생명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네가 나중에 다시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디르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리코스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디르케는 다시는 그를 잃게 놔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리코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도시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모두 죽이겠지.”
군인이자 백인 대장인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꺾어가면서도 이현과 리코스에게 그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절망하고 있는 이현과 티타니아를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서 너희의 의견을 전달하겠어.”
그녀의 말에 이현과 티타니아가 절규를 멈추고 디르케를 보았다.
“그리고 원정이 취소될 수 있게 그들을 설득해보지.”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리코스가 다시 죽는 일도 견딜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동료들이 던전에서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볼 수도 없었다.
“어려울 거야.”
“최선을 다할게.”
리코스가 만류했지만, 디르케는 이미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왔던 것처럼,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그와 결혼했던 것처럼.
디르케는 한시가 급하다며 날이 밝기도 전에 던전을 나갔다.
이현은 부부의 이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따라가지 않았다.
“로맨틱하긴 하네요.”
하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티타니아가 진단 스킬로 부부의 이별 장면을 지켜보며 히죽 웃었다.
이현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네가 로맨틱한 것도 알아?”
“아뇨, 로맨스 소설에서 봤어요. 제가 남녀상열지사를 알 리가 없죠.”
티타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티타니아의 종족에는 성별이 없나?’
이현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것을 묻는 것이 실례가 될 수도 있기에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걸 궁금해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제길, 300명이라니, 열 배나 되는 병력 차를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이현이 머리털을 잡아 뜯었다.
돌로 쌓은 성벽이면 3배의 병력 차를 메꿔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설픈 목책으로는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으아, 왜 여긴 군부대가 아니었던 거지?”
만약 캠핑장이 아니라 군부대였다면, 던전으로 바뀔 때부터 현대화기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인력도 있었을 터였다.
즉, 그런 전력이 아니라면 열 배나 되는 적을 막기는 글렀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없는 걸 고민해서 뭐 하겠어요. 아, 저기 리코스 양반이 오네요.”
디르케를 배웅한 리코스가 돌아오고 있었다.
“……주인.”
착잡해 보이는 그를 보며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너도 다쳤으니 망자의 땅으로 가서 쉬어.”
다른 얘기는 그다음에 들어도 되었다.
이현의 배려에 감사하며 망자의 땅으로 향했다.
“팔이 완전히 잘린 것도 아니니 하루면 다 치료될 거예요. 주인님이 마지막에 힘을 빼서 다행이네요.”
“그럼, 우리도 일단 쉬자. 대책은 그다음에 논의하기로 하고.”
이미 먼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 * *
던전 원정이 20일도 남지 않은 지금, 군사 행정관인 헬레는 몹시 바빴다.
당장, 오늘만 해도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화로에 불을 피워 억지로 몸을 덥혀가며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만물이 밝아오는 아침이 되어 있었다.
똑똑
헬레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불현듯 실종된 동생이 찾아왔던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
그때와 마찬가지로 문 건너편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혹시?’라는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헬레는 호신용 검을 꺼내 들지도, 하인을 부르지도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엔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정체를 가린, 그녀의 예상대로의 사우레노르가 서 있었다,
“디르케!”
“……언니.”
초라하고 몹시 지친 행색의 동생을 와락 껴안으며 헬레는 모든 신들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두 자매는 말없이 깊은 포옹으로 감격의 해후를 나누었다.
헬레는 피곤해 보이는 디르케를 방 안으로 들이고 긴 의자에 누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눕는 순간 그대로 잠에 빠질 것 같다며 디르케는 거절하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였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빛이 반짝이고 있다는 걸, 헬레는 알 수 있었다.
“설마…… 찾은 거야?”
마음이 맞는 자매라서 그런 걸까.
디르케는 전후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헬레가 신기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께 감사의 제물을 올려야겠어. 너도, 리코스도 무사히 돌아오다니! 이건 신들의 보살핌이야.”
기쁜 소식에 들뜬 헬레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귀한 제물인 소를 바치고 싶었지만, 도시 차원의 제사가 아닌 이상 그건 무리였다.
“훌륭하고 살이 통통한 돼지를 하나 구해야겠어.”
“언니.”
디르케가 쓴웃음을 지으며 헬레를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리코스는? 치료 중인가? 몸은 괜찮은 거야?”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만약 리코스가 다쳤다면 디르케가 그의 곁에서 떨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둘은 그 정도로 금실이 좋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디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던전에 있어.”
“뭐?”
헬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던전에 있다는 소리는 디르케 혼자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해 봐.”
디르케는 황당해하는 자신의 언니에게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자잘하고 복잡한 일은 제외하고 간결하게 줄여 요지만 전달했음에도 헬레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던전의 우두머리가 리코스를 죽이고 네크로트로모스로 만들었다고?”
“정확히는 네크로파고스야.”
리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디르케도 무의식적으로 정정했다.
“네크로파고스?”
시체를 먹는다는 뜻의 그 명칭에 헬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레스여,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기억과 정신이 대부분 온전하지만, 그 우두머리를 따른다는 거잖아?”
“맞아.”
디르케의 대답에 헬레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그 던전의 우두머리는 너에게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전하라고 했고?”
“응. 이스메이아의 지도층에게 전하라고 했어.”
자신은 기막혀하고 있는데 담담히 대답하는 동생을 보며 헬레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너 꿈꾼 거 아니니?”
디르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오죽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으면 언니의 입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올까?
헬레는 동생이 남편을 찾기 위해 심신이 너무 고생해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뭐가?”
동생의 반문에 헬레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열거했다.
“최하급 던전의 우두머리가 널 이길 정도로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뛰어난 지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정신이 온전한 네크로트로모스 아니, 네크로파고스란 존재. 그리고 내가 재산을 털어서 산 약을 몽땅 그놈에게 주고 온 너까지 전부.”
“약은 미안하게 됐어.”
“……너.”
언니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었기에, 디르케는 아무 말 없이 헬레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생을 노려보기만 하던 헬레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구나.”
자신의 동생이 이런 식의 거짓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
“뭐가? 같이 꿈꿔줘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자신의 말 말을 믿어주는 헬레를 보며 디르케가 웃었다.
“지도층에게 알리는 건 언니에게 맡길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지금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봐.”
“원정을 멈춰야 해.”
“뭐?”
헬레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나 알고 하는 거야?”
“알고 있어.”
준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로코스의 출정이 결정된 시점부터 이 전쟁의 취소는 오로지 왕만이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왕마저도 명분이 있고 시민들이 원하는 전쟁을 취소하는 것은 큰 부담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지금 그걸 백인 대장에 불과한 디르케가 입에 담는 것이었다.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나는 이제 눈을 좀 붙여야겠어.”
아버지에게 알을 맡긴 뒤, 바로 던전에 들어갔고, 던전에서 밤새 많은 일을 겪었다.
던전에서 나온 뒤 쉬지 않고 키타이론산에서 이스메이아까지 걸어온 그녀의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디르케는 자신의 목적인 전언을 전달하는 것까지 마치고 나서야 언니가 권해준 긴 의자에 누웠다.
리코스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그녀는, 불편한 긴 의자 위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