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89
88화
-대비(4)
사촌 오빠가 아닌 스트라테고스의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착실히 대답하는 그녀의 어깨에 파이오스의 손이 척, 올라왔다.
“……너는 네 몸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우다이오스 가문의 가주란 자가 어떻게 널 대했든, 넌 충분히 중요한 사우레노르다.”
그는 얼마 전 아타마스가 헬레에게 지껄인 소리를 하인들에게 전해 들었었다.
그때의 파이오스는 길길이 날뛰며 우다이오스 가문으로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설령 그가 장군직을 박탈당하더라도 그의 꼬리를 떼어 버리겠다는 아들을 말리며 아탈란테는 말했었다.
‘내 자식이지만 참 멍청하구나. 그러면 누가 제일 곤란해지겠니?’
‘꼬리 떨어진 그 자식이겠지요!’
‘쯧쯧쯧, 저게 어떻게 스트라테고스까지 해 먹었을까. 네 녀석이 그러지 않아도 헬레는 이미 충분히 힘들 테니까 가서 위로나 해주어라.’
한 번도 들어서 잘못되었던 적 없었던 어머니의 조언대로, 파이오스는 헬레를 위로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위로해놓고선 먼 산을 보며 멋쩍어하는 파이오스를 보며 헬레는 그만 풋 웃어 버렸다.
“풋, 아, 큼, 흠. 죄송합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큼큼, 아니, 뭘……. 야! 너! 그렇게 마무리가 어설프면 어쩔 거야!”
그 때문에 더 쑥스러워진 파이오스가 진지 공사를 마무리하던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후다닥 병사에게 다가가 트집을 잡는 파이오스를 보며 헬레는 진심으로 병사가 불쌍해졌다.
‘장군한테 지적받는 말단 병사라니…….’
아니나 다를까 지적받는 병사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빨리 사라져야 저 트집이 끝나리란 것을 아는 헬레는 웃음을 참으며 서둘러 자신의 막사로 떠났다.
“야! 보급관으로서 소중하다는 거야! 오해하지 마! 진짜거든?!”
뒤늦은 부끄러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헬레는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 * *
던전 게이트 밖에서 한창 적군의 진지가 세워지고 있을 무렵, 던전 안도 분주했다.
“어, 자네 왔어?”
상류에 도착하자 모든 작업을 총괄하고 있던 춘식이 이현을 반겨주었다.
“진행은 어때요?”
“나쁘진 않어. 처음에는 손발도 잘 안 맞고 무서워하기 바빴는데, 이젠 다들 괜찮아 보이네.”
춘식이 가리키는 작업장에는 놀랍게도 언데드와 공원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한창 작업 중이었다.
진호의 아이디어에서 이현이 떠올려 낸 대형 함정을 설치하는 공사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손이 모자라서 누구도 빼기 힘들었거든요.”
사우레노르 군대의 침공까지 고작해야 2주도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 함정을 완성하려면 언데드, 인간 할 것 없이 모두 공사에 매달려야 했다.
그들이 짓고 있는 것은 수공을 위한 인공 댐이었다.
진호의 말에서 수공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현은 우선 계곡의 상류를 막을 임시 댐을 건설하기로 했었다.
“댐은 어떻게 만들려고? 쎄멘 하나 없는데.”
처음 이현의 아이디어를 들은 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멘트나 건설 장비가 있더라도 아마추어들이 건설할 만큼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다.
“영구적으로 물을 막을 댐이 아니에요. 잠시 물을 가두었다가 터뜨릴 거니까요.”
그 정도면 던전 내의 물자와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건설이 가능한 댐이었다.
이현이 숭덩숭덩 베어놓은 나무 기둥들을 언데드 부대가 계곡 상류의 목이 좁은 구간에 빼곡하게 박아 물길을 막았다.
거기에 이현은 캠핑용 테이블 다리를 뜯어낸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나무 기둥 사이에 끼워 넣어 물길을 내주었다.
“기껏 막았는데 왜 구멍을 내는 거예요?”
“이런 물길을 터주지 않으면 수압으로 댐이 무너질 거야.”
진호가 과학 캠프에서 비버 댐을 만들 때 꼭 물길을 내주라는 것을 배웠다며 가르쳐준 사실이었다.
일단 물길이 막히자 댐 하류는 금세 물이 줄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현은 나무 댐의 뒤로 계곡의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댐을 보강하도록 했다.
나무 댐의 앞으로는 방수 재질의 텐트를 잘라 설치해 새어나가는 물길이 없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물길을 다 막네요?”
“물이 새는 틈이 커지면 댐이라는 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거든.”
여유가 있으면 진흙까지 발라 더 튼튼하게 만들고 싶었던 이현이었지만, 손이 너무 가는 작업이었다.
‘애초에 터뜨릴 댐이기도 하고. 단 한 번 함정을 작동시킬 때까지만 버텨주면 돼.’
첫 번째 댐이 완성되기까지 2주 가까이 걸렸다.
계곡 상류의 빠른 물살 속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것도 난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댐이 완성되고 물을 단단히 틀어막자, 다음 작업은 훨씬 수월해졌다.
그렇게 계곡 하류로 가면서 두 번째, 세 번째 댐을 만들었다.
수공에 적당한 물의 양과 혹시라도 도중에 댐이 터져 나갈 걸 방비하는 차원에서 만든 추가조치였다.
3개의 임시 댐이 건설되면, 계곡 상류는 지형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
졸졸거리며 물이 흐르던 기존의 모습이 아닌, 작은 저수지 3개가 생겨날 거고 적들을 쓸어버릴 물이 가득 담기게 될 터였다.
쿵!
아름드리 통나무를 좀비 둘이서 힘을 합쳐 꽂아 넣었다.
좀비들이 물러나면 공원 사람들이 섬세한 작업을 담당해 마무리 지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바윗돌과 통나무를 옮기고 있는 좀비 무리가 보였다.
‘정말 다들 잘해주고 있네.’
처음에는 시체의 모습만 봐도 기겁하던 공원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농담도 건넬 정도로 익숙해 보였다.
언데드들이 대답은 못 하지만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의 한가운데에는 혜인이 있었다.
“혜인이가 노력을 많이 했어. 민수라고 하는 친구랑 붙어 다니면서 먼저 말도 걸고 그러더라고.”
지금도 혜인은 공원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면서도 매니저 좀비 아니, 민수의 옆에 붙어 있었다.
나진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이끄는 그녀가 솔선수범해서 언데드들과 가깝게 지내니 사람들도 점차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야! 그건 나중에 다 같이 먹을 거야! 얼른 내려놔!”
“싫어! 배고파!”
던전 내의 유일한 아이들인 진호와 민아도 어느새 친해졌는지 잘 어울리고 있었다.
‘저걸 친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육포를 입에 잔뜩 물고 또 한 손에는 한 움큼 들고 도망치는 민아를 진호가 쫓고 있었다.
물론 과학 영재 소년이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구울 소녀를 뜀박질로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씨, 쟤는 왜 저렇게 빠른 거야.”
뛰다 말고 숨이 찬 진호가 바닥에 엎드려 쌕쌕 숨을 내쉬었다.
“냠냠.”
민아가 그런 진호를 빼꼼 돌려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물론 그동안 손에 쥐고 있던 육포마저 어느새 민아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악! 그걸 결국 다 먹었어!”
“메롱, 메롱~.”
민아가 혀를 쏙 내밀자 약이 오른 진호가 다시 민아를 쫓기 시작했다.
민아는 잡혀줄 듯 안 잡힐 듯 약 올리며 도망치는 것이 같이 놀 사람이 있어서 신난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들이 싸우며 노는 것처럼 귀엽고 흐뭇했다.
“어이쿠, 애들끼리 같이 노니 참 보기 좋아. 벌써 정분나는 거 아닌가 몰러.”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춘식의 농담에 이현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민아는 저랑 노는 걸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동안 친구가 없던 두 아이가 함께 노는 모습이 전에 없이 활기차고 좋아 보였지만, 이현은 은근히 속이 쓰려왔다.
이현의 볼멘소리에 춘식이 껄껄 웃어댔고, 티타니아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쯧, 누가 보면 진짜 아빠인 줄? 왜 주인님이 질투하고 그래요?”
“질투는 무슨!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발끈하면서도 이현은 마음에 찔려 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런 이현을 보며 춘식이 이현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럴 만두 혀. 나도 손녀가 처음 남자 친구라고 웬 사내 놈팽이를 손잡고 데려왔을 때, 그 손을 분질러 놓을 뻔했다니까.”
“……네?”
이현은 자신이 손녀의 남자 친구 손목을 부러뜨릴 생각을 했던 춘식과 동급은 아니길 빌었다.
티타니아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지만.
“언제쯤 끝날까요?”
공사 현장을 쭉 둘러본 이현이 춘식에게 물었다.
“자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한 일주일쯤? 비슷한 걸 두 개는 더 만들어야 하니까 조금 더 걸릴 거야.”
“아슬아슬하겠네요.”
이현이 입술을 비죽 당기며 초조해했다.
과연 적의 침공에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이현을 춘식이 걱정하지 말라며 달랬다.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 않아 오래 걸렸으니까, 지금부터는 시간을 더 당길 수 있것지.”
춘식은 쉬지도 않고 일하고 있는 언데드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 친구들 덕분이여.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 일꾼이 세상 어딨겠어?”
언데드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다.
그 덕분에 모두가 잠든 밤 중에도 언데드들은 공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것 참, 악덕 사장이 따로 없네요.”
“암, 노조가 있었으면 자네는 이미 끝이여, 끝.”
춘식의 농담에 이현이 쓰게 웃었다.
급했기 때문에 어쩔 순 없었지만, 24시간 내내 노동을 시키고 있자니 양심에 찔려 왔던 탓이었다.
“그래도 저 친구들이 쉬지 않고 일하니 우리 사람들도 더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 원체 심심해하기도 했고.”
던전에 언제 헌터들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공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함정 공사로 할 일이 생기자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일을 돕고 있었다.
“다들 무리하지 않게 잘 감독해주세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초인이 아닌 이상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해야 했다.
이현은 잘게 쪼갠 마스티하의 눈물 조각을 춘식에게 건넸다.
춘식이 그것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뭣이여?”
“피로회복제 같은 거예요. 근육통에도 효과가 있을 테니 힘들어하시는 분께 드리세요.”
내상을 말끔하게 치료해주는 약이니 근육통 정도는 문제도 안 될 터였다.
“단, 많이 먹으면 부작용이 있으니 한 조각씩만 드세요.”
이현과 나진이 그간 먹어본 결과 한 알을 전부 먹으면 미량이긴 하지만 각성효과가 있어서 불면증이라는 부작용이 있었다.
“큼, 저기 혹시 이거…….”
몸에 좋다는 소리에 눈이 돌아간 춘식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춘식의 생각을 눈치챈 이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효과는 없어요. 기대하지 마세요.”
“그래? 와하하. 그렇구먼. 아이고, 거기 무리하지 마셔!”
속셈을 들킨 춘식이 괜히 더 크게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춘식을 보며 이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나이 든 남자들의 한결같은 취향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저도 작업에 들어가 볼게요.”
“지금부터 하려고?”
이현이 하는 작업이란, 강화 스킬을 걸어주는 것이었다.
언데드의 몸은 강화 스킬을 받아들이는 데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유리했다.
한 번에 30분씩 연속으로 4~6번의 강화도 가능했다.
그래서 최소 2시간은 강화된 힘으로 공사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현이 준비를 마치자 춘식이 공원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강화 스킬까지 걸린 언데드의 주변에 있다가 다칠 수도 있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 정 여사. 이거 먹어 봐.”
“이게 뭔데요?”
“몸에 좋은 거래. 어여 먹어.”
언데드들에게 다가가는 이현의 등 뒤에서 춘식과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던전에 갇혀 서로에 의존하며 살아온 덕분일까?
골드 미스로 지내던 정 여사와 오래전에 아내와 사별한 춘식은 어느새 마음이 맞는 짝이 되어 있었다.
“오빠, 육포 먹을래?”
“됐거든?”
“민수 오빠! 파이팅! 꺅! 멋지다!”
그 옆에선 진호와 민아도 꽁냥대고 있었고, 혜인은 멀리서 민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들 짝이 있는데 주인님만 없네요.”
“닥쳐줄래?”
하나둘 강화 스킬을 걸면서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던전은 사시사철 한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현의 옆구리가 몹시도 쌀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