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98
97화
-각성(2)
“안 돼!”
나진이 급하게 창을 휘둘러 공격해온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이 치명타였는지 스켈레톤 워리어의 뼈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한때 사람이었던 그리고 앞으로 민아처럼 생전의 기억과 지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가 방금 그 생명을 다했다.
“으아아!”
나진이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창기가 서린 창날을 뿌려댔다.
“뒤로 물러나라!”
분노에 사로잡힌 나진의 창은 강력했지만, 흥분한 탓인지 그 기세에 비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병사들은 신중히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나진의 창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러다 지친다. 그때까지 기다려.”
흥분한 야생 들소를 울타리 안에 몰아넣으면 제풀에 지치게 마련이다.
나진의 스킬은 흥분한 들소의 뿔만큼이나 위험했지만,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미숙했다.
병사들은 들소의 숨을 끊듯이 나진이 지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푸욱,
뒤에서 창날이 후열의 병사의 등을 꿰뚫었다.
“크아악!”
어느새 병사들의 뒤로 돌아간 디르케의 공격이었다.
“아니, 언제 뒤로 온 거지?”
“전투 중에 대상을 놓치는 건 훈련이 덜 되었다는 증거 아닌가?”
나진의 강력한 스킬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병사들은 디르케의 존재를 소홀히 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디르케는 놓치질 않았다.
이현이 노렸던 적이 있듯이, 팔랑크스 진형의 약점은 후방과 측면이었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디르케는 병사들이 쉽게 몸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용했다.
“뒤에서 온다!”
“아냐! 옆이다!”
일부 후열 병사들이 겨우 몸을 돌려 디르케를 상대할라치면, 어느새 디르케는 바람처럼 측면으로 돌아가 공격을 해댔다.
“앞으로 가! 몸을 돌릴 수가 없어!”
“밀지 마! 앞에는 저 사술이 있다고!”
디르케의 공격에 차례차례 앞으로 밀리자 다시 나진의 간격에 들어가는 병사들이 나왔다.
우수수.
나진이 흔드는 창의 궤적에 닿은 청동 방패는 마치 종잇조각이라도 되는 양 잘려 나갔다.
청동마저 그럴진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우레노르들의 몸은 더 심각했다.
“크아아악!”
병사의 비명을 들으며 디르케가 씨익 웃었다.
자신이 지금 양들을 모는 목양견이라면, 나진은 양을 하나하나 죽여가는 도살자나 다름없었다.
‘궁합이 잘 맞는군.’
서로 작전을 미리 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진은 디르케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도중부터는 디르케의 작전을 알아챘는지, 분노도 가라앉히고 한 명씩 확실하게 끝장내고 있었다.
그것이 디르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전투가 끝나면 제대로 대화를 나눠봐야겠어.’
* * *
코피스와 도리. 외날 검과 창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검과 창의 대결에서 숙명적으로 피해갈 수 없는 것이 간격의 대결이었다.
“큭!”
리코스가 방패로 창날을 빗겨내며 코피스를 휘둘렀지만, 닿지 않았다.
코피스의 간격에서 벗어나 있는 탈라오스는 슬쩍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검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그 간격 밖에서 여유롭게 창을 내찔러왔다.
‘창술에 능숙하군. 괜히 백인 대장인 것이 아니야.’
이현이 있었다면 두 사우레노르의 차이점을 분석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었을 터였다.
방어에 전문화된 리코스와 달리, 탈라오스의 스킬은 공격 스킬 위주였다.
탈라오스의 창날이 리코스의 허벅지를 노리고 낮게 뻗어왔지만, 리코스는 방패를 쥔 손을 가볍게 돌려 창날을 튕겨냈다.
‘도무지 뚫리질 않는군.’
탈라오스 역시 리코스의 실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그의 맹공이 매번 교묘한 방패술에 막히고 있었다.
상대가 코피스가 아닌 창을 들고 있었다면, 그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진 못했을 것이다.
‘여유가 없다고? 내가?’
탈라오스는 자존심이 상해 얼굴을 구겼다.
겨우 일개 병사 출신인 데다 던전을 드나들며 헌터 노릇을 하던 리코스와 백인 대장인 자신이 막상막하라니.
‘이 불쾌함은 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갚아주마.’
탈라오스는 상대를 가볍게 보던 마음을 고쳐먹고 공격 수법을 바꾸었다.
“막아볼 테면 막아봐라!”
창을 역수로 잡고 위로 치켜든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리코스의 간격으로 파고 들어갔다.
파바박!
빠른 속도로 아니, 거의 동시에 탈라오스의 창날이 세 번이나 리코스의 몸을 찔렀다.
그의 비장의 스킬인 [삼연격]이었다.
“큭!”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리코스는 거의 동시에 찔러진 삼연격의 충격으로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상대가 간격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제때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걸 맞고도 버티다니.”
그사이 코피스의 간격에서 물러난 탈라오스가 놀라고 있었다.
일반 사우레노르였다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게 당연한 공격이었다.
“따끔한 수준이군.”
삼연격의 충격으로 갈빗대가 모두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리코스는 허세를 부렸다.
만약 구울의 몸이 아니었다면, 당장 고통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리코스의 허세에 탈라오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다음번에는 지금처럼 가볍지 않을 거다.”
“맞아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탈라오스의 경고에 리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세를 부리며 버티긴 했지만, 방금의 공격이 다시 들어온다면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근-중거리의 간격 전환은 호플리테스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는 드물었다.
거기에 동시에 꽂히는 삼연격을 모두 맞을 때 충격으로 몸이 굳는 것이 성가셨다.
‘과연 백인 대장이라, 이건가.’
리코스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탈라오스는 대단한 전사였다.
방어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공격을 얻어맞았다.
‘이런 몸이라도 더는 맞아선 안 돼. 무조건 막아야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물리적 충격에 면역인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저런 공격을 맞는다면 언데드의 몸이라 하더라도 쓰러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고심할 틈도 없었다.
탈라오스가 다시 간격을 좁히며 삼연격을 날려왔다.
“어딜!”
쾅! 쾅! 쾅!
이번에는 그 수법을 미리 알고 있었던 만큼 리코스는 방패로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고대로 창에 실린 힘이 더 강력해져 있었다.
‘무겁다.’
리코스도 최선을 다해서 방패로 막았지만,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치고 빠지기가 이어졌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리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구울이 되면서 신체 능력이 향상되고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된 것은 장점이었다.
하지만 고통 즉, 감각이 무뎌졌다는 것은 그만큼 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감각 역시 동시에 둔해졌다는 소리였다.
예전만큼 섬세한 움직임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탈라오스의 창날이 리코스의 몸을 찔렀다.
“아까와 같은 여유는 어딜 갔나?”
탈라오스의 비웃음에도 리코스는 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당할 뿐이다.’
점점 빠르고 강해지는 탈라오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반절, 피하지 못하고 맞는 것이 반절이었다.
능수능란하게 간격을 조절하는 탈라오스의 몸놀림에 반격은 시도도 못 해보고 있었다.
‘간격을 잡지 못한다면, 무기를 박살 낸다.’
상대는 백인 대장이었다.
평범한 시도로는 턱도 없을 게 분명했다.
리코스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방패를 버렸다.
방패를 들던 왼손으로 일부러 창에 맞아줄 생각이었다.
팔에 걸린 창의 창대를 코피스로 끊어내면 적에게 남는 무기는 간격이 짧은 파라조니온뿐.
간격이 같아진다면 리코스에게도 승기가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리코스의 계획이었다.
‘몸으로 창을 봉하고, 그대로 창을 부순다!’
리코스의 눈빛이 바뀐 것을 본 탈라오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까?”
으드득.
탈라오스가 힘껏 찌른 청동 창날이 뼈를 부수고 살을 찢어내며 리코스의 팔을 관통했다.
“흐으읍!”
리코스는 창날이 자신의 팔을 관통한 순간, 왼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탈라오스의 창을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아 놓았다.
‘이걸로 이제 창을 쓰지 못할 거다.’
그렇게 생각한 리코스가 코피스를 들어 창대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리코스는 투구 사이로 히죽 웃고 있는 탈라오스의 입꼬리를 보았다.
“자네, 뭔가 잊고 있는 게 있지 않나? 내 창은 단 한 번 찔렀을 뿐이라네.”
리코스는 그제야 탈라오스가 삼연격이 아닌 단순한 찌르기로 공격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리코스의 속셈을 눈치채고 일부러 삼연격을 아껴두었다는 것 또한.
“잘 가게.”
탈라오스는 잠깐이나마 자신과 대등하게 싸움을 펼쳤던 리코스에게 예를 갖추며 삼연격을 발동시켰다.
‘막을 수가 없다.’
세 번을 연달아 찔러내는 삼연격의 힘이 한 점에 집중되어 리코스의 팔뚝을 그대로 찢어발겼다.
구울 리코스의 증가한 근력으로도 막지 못할 힘이었다.
푸욱!
진득한 피를 뿌리며 탈라오스의 창날이 리코스의 목을 뚫고 나왔다.
“자네는 잘 싸웠어. 일개 병사치고는 말이야. 인정해주지.”
“크르륵!”
탈라오스는 진심으로 리코스를 칭찬했지만, 그는 끓어오르는 진득한 피거품에 목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 * *
‘시간을 너무 소비했어.’
이현은 속이 탔다.
병사들을 처리하는 사이 계곡물은 점점 불어나 도저히 건널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강화 스킬을 쓰고 건넌다고 하더라도 떠내려갈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상류로 돌아가 계곡을 건너야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없는데 괜찮은 걸까?”
초기화해달라는 요청이 끊긴 지 오래였다.
진단 스킬로 요새 쪽을 살피는 티타니아의 표정도 심상치가 않았다.
“스켈레톤 워리어 부대의 피해가 커요. 서둘러야겠어요.”
어느 정도 부상은 격이 떨어지더라도 망자의 땅으로 회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피해가 선을 넘는 경우, 몬스터가 영구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었다.
이현은 이를 악물고 더 속도를 내었다.
그런 이현의 옆에서 보폭은 짧지만, 구울의 향상된 각력으로 민아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다.
요새의 입구가 슬슬 시야에 들어올 즈음이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이현의 귓가를 스쳤다.
“민아야, 엎드려!”
이현이 서둘러 민아를 안고 길옆 풀숲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이현이 있던 자리에 화살과 투창이 꽂혔다.
“제길! 이럴 시간이 없는데!”
이현의 타는 속도 모르고 화살 비가 이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만 꺼지고 이거나 먹어!”
내구 강화를 한 청동 방패를 우산처럼 머리 위로 들며 이현이 대형 투척 도끼를 내던졌다.
민아도 마혈소총을 들어 사격을 시작했다.
퉁! 퉁! 콰드득!
“크아아악!”
날아다니는 도끼와 보이지 않는 탄환에 혼비백산한 경보병 헌터들이 도망친 뒤에야 이현은 다시 요새로 향할 수 있었다.
“바리케이드 포위망은? 제길, 이미 다 박살 났군. 민아야, 여기서 계속 쏴 줘. 알겠지?”
이현의 지시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의 적들을 모두 정리했고, 만약 민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민경이 바로 알려주기로 했으니 민아를 혼자 두어도 괜찮을 터였다.
이현은 민아를 밖에 두고 서둘러 요새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시간을 너무 소비해 버렸다.
이현이 요새 입구로 들어간 순간 보게 된 것은 절망적인 광경이었다.
온통 박살이 나 있는 스켈레톤 워리어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위태한 디르케와 나진, 그리고 창에 목이 꿰뚫린 리코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