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기어드는 혼돈 (5)
사제들은 어디서 얻은 건지 동물의 머리뼈를 가공해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의식에 필요한 장비인 듯했다. 덕분에 얼굴은 안 보였지만 아이작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클레르와 그 일당들이었다.
멍한 기분 속에서도 아이작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생각했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뿌연 안개 같은 형태에, 인간 비슷한 형체만 간신히 갖췄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신체감각과 능력이 1/10 수준으로 하락한 수준이랄까. 기묘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이었다.
“아, 안 들리는 건가?”
“주문을 다시 외워봐. 원래 혼돈의 권속은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러자 클레르가 다시 무언가 기도문을 중얼중얼 외우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뭔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이놈들,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을 소환하려고 했던 건가?’
그런데 어째선지 아이작이 소환되어 버렸고, 그들은 뿌연 형태의 아이작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뿌연 안개 같은 몸이라도 눈을 마주치는 느낌이 들자 사제들은 겁먹은 표정을 했다.
“그, 그만해. 이쪽 쳐다본다.”
“고통을 부여하는 기도문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별로 타격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고통을 부여하는 기도? 그러고 보니 잡아당기면서 약간 꼬집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아이작은 그들에게 다가가려다가 약간의 저항이 느껴져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무언가 그려져 있었다.
그가 오늘 이솔데와 함께 발견한 의식용 진이었다. 다만 너무 조잡하게 그려진 탓에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소환된 주체가 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으나, 그 능력의 핵심이 되는 주문이 원 안에 그려진 탓에 아이작이 발로 슥 지우기만 해도 나올 수 있었다.
아이작은 혹시나 해서 그걸 지워 봤다. 정말로 아이작을 미약하게나마 원 안으로 밀어 넣던 저항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사제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조차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 움직인다! 우리 말에 귀 기울이는 거 같아!”
“조, 좋아. 계속한다.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여, 우리 말이 들리는가?”
아이작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은 기쁨에 찬 미소와 숨죽인 환호를 나눴다.
“이, 이번 권속은 협조적인 것 같아. 수습할 수 있겠어!”
“조용해, 아직이니까. 흠흠, 내 이름은 클레르몽 사레아. 너희 소환자, 계약의 서명자다! 네 이름을 밝혀라!”
이미 아이작을 소환한 의식용 진은 완전히 무력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피소환자를 강요하는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작은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헤사벨.”
무슨 말인지 하나 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대답만으로도 사제들은 비명을 질렀다.
“말했어! 말했어!”
“지성을 가진 소환체는 처음이야! 대화가 통한다고!”
“다들 닥쳐! 아직 의식이 진행 중이라고!”
그나마 차분하게 의식을 이어가는 클레르는 헤사벨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헤사벨, 소환자의 맹약으로, 네게 명령하겠다!”
클레르는 절박한 심정을 담아, 자신이 불러낸 소환수에게 명령했다.
“이 도시에 풀린 너희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데려가라!”
“하아…….”
아이작은 그들이 불안하게 주고받는 말들로 대강이나마 짐작했지만, 클레르의 명령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스플래터 무비에 나오는 한심한 대학생들 같은 무리였군.’
꼭 출입 금지된 지하실에 기어 들어가 금지된 고대유물 같은 것을 건드리는 놈들이 있다.
이 애송이 사제놈들은 이 지하 유적에서 우연히 이름 없는 혼돈에 관련된 자료를 발견했고, 그걸 이용해 금지된 지식을 활용하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어설픈 의식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소환 의식은 거창하게 실패해 버렸고, 아이작이 마주쳤던 그 수도승들이 풀려나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이작이 그것들에게서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느끼지 못했듯, 형태만 흉내 내 무언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아이작이 아니라 뭔가 루주베르크에 나타났던 종말처리자 같은 걸 불러낸다면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구시가지를 박살 낼 정도로.
‘……백제국의 주장과 흑제국의 주장, 둘 다 맞는 거였네.’
***
“헤사벨!”
아이작이 계속 무시하자 클레르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이른바 ‘고통을 부여하는 기도문’을 외웠다. 소환자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받는 건지 아이작을 당기는 힘도 조금 더 강해졌다.
대개 클리셰적으로 이런 시도는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
아이작은 성큼 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클레르와 사제들은 이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건지 굳어있었다. 그사이 아이작은 클레의 뺨을 콱 틀어쥐었다.
산양의 머리뼈로 이루어진 가면이 벗겨져 떨어지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신체 능력이 극단적으로 제한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사제 한 명 정도를 제압하는 것은 문제도 없었다. 뭣보다 싸움은 기세에서 밀리면 끝이다.
학생들은 아이작이 원 밖으로 걸어 나온 순간 이미 겁에 질려있었다.
몇 명이 벌벌 떨며 기도문을 외워 보기도 했지만 사념체 상태인 아이작에게는 통하지도 않는 기적들이었다.
‘어떻게 할까.’
아이작은 버둥거리는 클레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이작은 이들에게 스플래터 무비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공포와 교훈을 선사해 줄 수도 있었다. 악의는 없다지만 이런 멍청이들 때문에 이름 없는 혼돈의 악명이 더 높아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열이 올랐다.
하지만 이놈들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지 불확실하고,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기회를 주기로 했다.
“클레르몽 사레아.”
아이작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불경한 짓을 수습할 기회를 주마. 대가로 너는 뭘 지불할 거지?”
클레르의 눈이 커졌다. 기도의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작은 이들에게서 신앙심도 뭣도 받지 못했으니까.
클레르는 커다란 눈망울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갑자기 울음을 토해 냈다.
“죄, 죄송해요! 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직 애라고는 해도 덩치는 다 큰 남자가 엉엉 우는 꼴을 보자 아이작은 되레 당황했다.
‘내가 지금 애를 가지고 뭐하는 거냐.’
하지만 이 정도면 이 세계에서는 성인 대접 받을 나이다. 뭣보다 이들이 이미 이름 없는 혼돈의 지식에 접근한 이상,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죽이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아이작의 통제하에 둬야 했다.
아이작은 문득 리히트 조약이 생각났다.
‘땅은 인간에게, 천상은 신에게, 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이작도 합당한 것을 받아야 했다. 문득 오래된 전설이 떠오르면서 아이작은 클레르에게 악마처럼 속삭였다.
“대가로 네 영혼을 지불할 수 있나?”
물론 정말로 영혼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받는 방법도 모르고, 받더라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 빛의 법전 사제로서 승승장구할 클레르가 조건을 받아들이진 않을 테니, 여기서부터 협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클레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드릴게요! 그, 그렇게 해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면…….”
아이작은 조금 놀랐다.
이 한심한 학생 사제의 각오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지된 지식에 손대긴 했어도 적어도 그걸 수습하기 위해 지상과 천상에서 고통받을 각오를 한 셈이다.
아이작은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클레르에게서 손을 뗐다.
“좋아. 그럼…… 너희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마.”
***
이 애송이 사제들은 이미 금단의 지식을 이용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을 소환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이 머저리들은 그 시점에서 화형대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빛의 법전이 앎의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선을 넘은 짓이니까.
하지만 이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미 풀려난 권속을 잡기 위해 제대로 수습할 수 있는 것도 녀석들뿐이었다.
아이작은 놈들에게 방법을 일러 주었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이작은 일어나자마자 공동묘지로 향했다. 소환의 여파 탓인지 일어나도 몸이 찌뿌둥했지만, 그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왜 신수나 괴물들이 허락받지 않은 자가 소환하면 불쾌해하는지 알 것 같군…….’
설마 소환당하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던 아이작은 이런 사태에 대해서도 방지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직전에 소환당해서 망정이지, 싸우다가 이런 짓을 당하면 신체가 무방비해진다. 게다가 왜 다른 놈도 아니고 자신이 소환되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쉿.”
아이작과 함께 지하 묘역으로 향하던 이솔데가 구멍에서 내려온 순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붙였다. 그녀는 바로 횃불을 끄고 팔찌를 살짝 비벼 은은한 빛을 만들어 냈다. 팔찌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바닥에 남은 흔적을 비췄다.
“누군가 어젯밤 침입한 흔적이 남아있어요. 의식이 벌어진 제단 쪽으로 향했어요.”
“……그쪽으로 가죠.”
아이작은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말했다.
둘은 기척을 죽이고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도착하기도 전부터 꽂아 놓은 횃불과 속삭이듯 흘러나오는 기도문들로 누군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저건…….”
이솔데는 벽 모퉁이에 숨어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훔쳐보았다. 몇 명의 사제들이 기이한 붉은색 도형과 문양으로 새겨진 원 밖에 둘러서서 뭔가 기도문을 쉴 새 없이 외우고 있었다. 기도문 사이사이 흐느낌과 한숨이 섞여 있어서 더더욱 기괴하게 들렸다.
누가 봐도 사교도스러운 모습에 이솔데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움켜쥐었지만, 아이작은 그녀를 말렸다.
“잠깐만요, 이솔데.”
아이작은 의식이 벌어지는 원 안쪽을 가리켰다.
원 안에는 구시가지에서 그들을 습격했던 수도승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한 모습과 달리 내면은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쉴 새 없이 검은 연기가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으며 요동치길 반복했다. 그러면서 밖에서 검은 연기가 계속 스며들어 와 수도승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저놈을 소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강화하고 있는 건가?”
“제가 보기에는 가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솔데의 의문에 아이작이 답했다.
이솔데는 의문을 가졌지만 일단 아이작의 지시대로 했다. 괴물을 써는 것은 자신보다 아이작이 더 잘 알 테니까.
아이작은 사제들에게 상황을 해결하는 의식을 알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클레르와 일당들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 빠져나가게 둔 것은 제대로 가두지도 속박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소환자와 피소환자였다.
아이작은 이들에게 소환을 제대로 마쳐 의식을 끝내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상황 해결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혼돈의 권속이 모여들어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자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명, 신음, 통곡, 온갖 불쾌한 소음들이었다. 그 소음에는 사제들의 흐느낌도 섞여 있었다.
이내 의식이 막바지에 이르러 폭발하듯 수도승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사제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지 마!”
클레르가 가면 아래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도승의 몸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클레르와 사제들은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원 안, 수도승의 복장 아래로 드러난 것은 기괴하게 비틀린 이형의 존재였다. 그것은 푸줏간의 도끼를 들고 있기도 했고, 돼지의 머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쉴 새 없이 커다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자기 손을 깨물어 먹기도 했다.
“괴담이…….”
이솔데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구시가지에 떠도는 괴담들이 형체를 갖추고 모여들고 있었다. 공포를 흩뿌리고 다시 공포를 먹이 삼아 포식하는 괴물이었다.
이른바 ‘속삭이는 밤’이라고 이름 붙은 괴물이 거친 포효를 토해 내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때 의식을 놓지 않고 기도문을 마지막까지 외운 클레르가 다시 한번 기도문을 낭송했다.
쾅! 기도문의 소리에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속삭이는 것이 원을 경계로 무언가에 부딪쳐 널브러졌다. 클레르는 그제야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기절했다.
그제야 아이작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제 수습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