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379)
76-5
뭐라고?
고통 때문에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이거 그냥 펼치기만 하면 헤르메스를 작살 내는 그런 주문 아니었던 건가?
“야. 이거 쓰면 나까지 죽어?”
[……]
잠시동안 나와 헤르메스 사이에 큰 침묵이 감돌았고, 헤르메스는 분노와 어이없음을 담아서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테트라그람마톤이 어떤 주문인지도 모르고 썼단 말인가!! 그걸 믿으란 말인가!!]
“…… 아, 아니 몰랐는데!”
[……]
잠시 후 헤르메스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듯 거대한 흑사의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태초의 네 글자에 언령이 새겨졌으매 네가 그 언령의 계약자이니 나는 물론이고 네놈도 절대 이 주문을 해제할 수 없다! 이대로 혼돈의 세계수에게 잡아먹혀서 너도나도 하찮은 거름이 된단 말이다!!]
“!!”
[자살해라!! 계약자인 네가 죽는 수밖에 없다!]
자살하라고? 그건 안 되지! 나는 헤르메스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는 발끈했다.
“뭐 이 씨발놈아!! 그럴 바에야 그냥 같이 죽고 말지! 그리고 나는 죽어도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보니까 내가 꿇릴 게 없잖아!
세계수의 먹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그것도 ‘죽음’이라면 나는 재시작을 할 수 있단 말이다! 이번 생에 살아서 귀환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헤르메스만 이길 여지를 줄 수는 없지!!
내 말을 듣자 헤르메스가 포효했다.
[이노옴!!]
지지징
그 순간 포효와 함께 허공에서 무려 수만 개나 되는 마력의 문양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문양 하나하나에 가공할 힘이 맺혀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문양의 근원이 내가 조종하는 세쓰와 같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초절주문(超絶呪文)
대악천(大惡天)
쿠콰콰쾅
그리고 문양이 터져 나오자 나는 마치 핵폭탄이 터지는 듯한 섬광과 함께 눈이 크게 부시는 걸 알 수 있었고, 섬광이 끝나자 별일 없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천지를 가득 메우는 듯한 파멸이 일어나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뭐야?’
뭔가 대단한 걸 쓰는 것 같더니 나한테는 아무런 영향도 없잖아? 그 러자 헤르메스가 교활함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테트라그람마톤의 시전자에게는 동귀어진이 끝날 때까지 내 모든 주문이 먹히지 않는가…… 하지 만 네 양옆을 보라, 백웅!]
…… 설마!
나는 헤르메스의 말에 옆을 쳐다보았고, 내 양옆에 시꺼멓게 혼돈에 물들어있는 석상이 두 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이광과 이환웅의 석상이었다.
‘방금 전 당했군.’
내가 헤르메스를 다시 바라보자 헤르메스가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모조리 혼돈에 물들게 하여 멸망시키는 절대저주를 시전했으니 네 동료들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지…… 당장 자살하지 않으면 네 동료들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게 될 것이다!]
“!!”
[네 약점이 동료를 소중하게 여기는 거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백웅.]
“으음……”
나는 헤르메스가 동료를 빌미로 나와 동귀어진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수를 썼다는 걸 깨닫고는 양옆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이광…… 이환웅……
“……”
음…… 별생각 안 드는군……
쿠구구구
내가 멍하니 있자 나와 헤르메스 사이에 이어져 있던 인과율의 실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동과 함께 나와 헤르메스의 배후에서 공간이 깨어지면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어둠의 촉수가 스멀거리며 소환되는 게 보였다. 아마 이 촉수가 나와 헤르메스를 동귀어진시키는 세계수의 부름인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촉수가 스멀거리는 단계에 왔는데도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자 헤르메스가 도리어 당황한 듯 외쳤다.
[무얼 하고 있느냐? 당장 자살하라! 그럼 내 이름을 걸고 네 동료들 만큼은 무사히 구해주마.]
나는 검을 늘어뜨리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내가 자살을 해서 테트라그람마톤이 끝나는 순간 네 녀석이 엄청난 마법으로 내가 죽지도 못하도록 내 영혼을 붙잡을 게 뻔하잖아. 마법의 신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큭!]
틀림없다.
이혼대법이 시몬마구스와 제갈사만 익힌 것이라 해도 눈앞에 있는 헤르메스 또한 마법의 신 – 이혼대법은 아닐지라도 틀림없이 영혼을 갖고 노는 주술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혼대법의 달인 수준이면 자살한 놈도 오래되지 않았을 경우 영혼을 갖고 놀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기에 방심하지 않았다.
하도 전생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적이 많았기에 이런 상황에선 되레 냉정해지는 것이었다.
헤르메스가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네 동료들은 죽게 내버려 둘 것이냐!]
“음 그리고 사실……”
[사실?]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이광과 이환웅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이놈들이 동료인지 잘 모르겠다……”
[……]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여하튼 이 외우주의 모험에서 나를 많이 도와주는 놈들인 건 사실이었지만 다른 기존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라면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예 쓰레기 같은 존재인 건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전생이 끝날 위기를 감수하면서 구할 만한 놈들이냐 하면 그건 아닌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어느 새 배후에서 소환된 어둠의 촉수가 나와 헤르메스의 손발에 얽히기 시작했다. 헤르메스는 정말 다급해졌는지 울부짖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헤르메스가 거듭 외쳤다.
[테트라그람마톤은 외우주를 건너 오며 확실히 봉인했는데 수많은 성단(星團) 너머 나조차도 모르는 곳에 버려둔 걸 어찌 이리도 때맞춰 가져올 수 있는가! 심지어 백웅 너는 테트라그람마톤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지 않은가!]
“신기하네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헤르메스를 약 올리려고 일부러 능글맞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어째서인지 알고 있었다.
‘제갈사.’
28회차에 어둠의 세계로 넘어가서 대마왕의 지위를 얻은 제갈사가 언젠가 내가 헤르메스, 시몬마구스 등의 세피로트 계열 강적과 맞닥뜨릴 거라 생각해서 미리 얻어둔 것이리라. 500년이라는 세월의 덕을 간접적으로 보게 된 게 틀림없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었던 기연이었다.
쉬릭 쉬릭 쉬릭
어둠의 줄기가 서서히 팔다리를 못 움직이게 하고 당장에라도 심장에 파고들 것처럼 얽혀온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동안 쓰고 있던 모든 무공, 술법, 마법 따위를 전혀 쓸 수가 없었으며 그저 어둠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게 포식당한다는 실감만 느껴졌다.
“……”
이대로 죽는 건가.
으음…… 뭐 손해는 아니긴 한데…… 근데 나 너무 태연한 거 아닌가.’
나는 정말 죽음을 앞두고 슬픔이나 공포, 격정따위가 하나도 안 느껴져서 당혹했다. 도리어 머릿속 한편에서 무척 냉정하게 이 죽음이 딱히 손해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이번 생이 끝장나면 흉신과의 휴전협정이 끝나서 다음 생부터 난장판이 되겠지만, 어쩐지 그것조차도 크게 걱정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보다 내 정신이 어느새 이상해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사람은 절대 죽음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가 없을 텐데, 어느새 죽음은 그저 아까운 것뿐이고 생의 효율성만을 따지게 되었다.
분명 이번 삶의 초반에는 최대한 뜻가는 대로 살기로 마음먹었을 텐데 ….
슈르륵 슈르륵
어느새 촉수가 전신을 다 덮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세계수에 흡수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눈을 반개했다.
‘그래.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즐기지 못한 거군.’
즐겁게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효율에 따라 움직이며 세상의 운명에 얽히게 되었다. 그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내 주변 인물들을 돌보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인과의 흐름을 느끼다 보니 알게 된 것은 내가 결국 세계의 구원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인생을 즐기는 게 가능할까? 도저히 이 개 같은 세계구원을 즐길수는 없는데….
[으오오오오…… 이럴 수는…… 없다……]
쿠구구
눈앞에서 전신이 어둠의 촉수로 휩싸인 헤르메스가 원념 섞인 외침과 함께 혼돈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세피로트 마법의 대종사이자 마법의 신, 헤르메스의 최후였다.
이제 나도 끝인가.
나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31번째 생부터는 바빠지겠지만 뭐 어떻 게든 되겠지……
[백웅. 아직 끝이 아니야.]
전뇌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때였다.
퍼퍼펑
갑자기 내 전신을 휘감고 있던 세계수의 어둠의 촉수가 모조리 터져 나가고 몸에 자유가 되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내 몸을 내려다보자 전뇌자가 환영처럼 내 앞에 스르륵 나타났다.
“전뇌자!”
나는 내 배후에 열려 있는 혼돈의 공간을 급히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뇌자가 모종의 힘으로 촉수를 터뜨렸지만, 또다시 세계수의 촉수가 번져 나와서 나를 휘감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자 전뇌자가 내 배후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천암비서의 단말로서 명하노니, 모든 혼돈의 간섭은 위대한 [옥좌]의 의지 아래 사라질지어다.”
꾸어어어어!!
그러자 갑작스럽게 저 멀리에서 끔찍한 혼돈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고 즉시 배후에 열려 있던 혼돈의 문이 닫혔다. 틀림없이 전뇌자가 한 일이 었기에 나는 깜짝 놀라서 전뇌자에게 말했다.
“테트라그람마톤이라는 동귀어진 주문을 취소시킨거냐?!”
“편법이야. 바깥 세계에서는 아무리 나라도 한번 펼쳐진 테트라그람마톤을 취소시킬 수 없어. 그건 황제 공손헌원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뇌자는 자신의 너구리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천암비서가 지닌 혼돈의 위계가 세계수보다 훨씬 상위에 있기에 하위의 법칙을 무효화시킬 수 있어. 이 안에서는 모든 혼돈의 간섭을 없는걸로 할 수 있는 거야.”
“최악의 동귀어진 주문이라 하더라도 리스크 없이 쓸 수 있는 거지.”
그런 성질이 있었단 말인가?!
‘이 녀석…… 내 뒤통수를 친 게 아니라 천암비서의 성질을 이용해서 헤르메스만 해치우게 도와준 거구나!’
난생 처음 안 사실이었기에 나는 놀라워하면서도 옆에 있던 이광과 이환웅을 바라보았다.
“음…… 여하튼 헤르메스만 없애고 살아남았는데, 이 녀석들은 왜 석화가 풀리지 않는 거지?”
“초절주문은 세계수의 원천마력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황오제조차 해주(解呪)에 수만 년 이상 걸리는 우주최강급 주문이야. 아무리 시전자가 죽었어도 쉽게 풀리는 게 아니야.”
“풀 방법은 있냐?”
잠시 침묵하던 전뇌자가 입을 열었다.
“시간밖에 답이 없어. 정상적이라면 이광과 이환웅은 천 년 후에나 석화가 풀리게 될 거야.”
“천 년이라… 음…… 그 시간이 세계의 종말이 오고도 남겠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응? 그럼 뭐가 문제인데?”
내 반문에 전뇌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사실 모든 계획이 꼬였어. 원래 계획은 당신이 황제 공손헌원의 도움을 받아서 현실세계로 탈출하는 거였는데 흉신이 개입해서 황제가 죽어버렸고, 심지어 난입한 이세계의 강자들 때문에 천암비서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게 된 거야. 지금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 거야.”
“?”
“백웅. 확실히 말해줄게. 전생자가 한 번 천암비서 내부로 들어오면 …….”
이어진 전뇌자의 말에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세계가 한 번 멸망할 때까지 나갈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