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385)
76-11
건달파의 말에 나는 안력을 돋우어 먼 곳에서 은안의 사내가 싸우는 장 면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땅거죽 을 뒤집고 거대한 구근(球根)을 드러낸 채 덩굴줄기처럼 일대의 벌판 을 어둠으로 뒤덮은 촉수괴물의 모 습에 놀랐다.
끼오오오
촉수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 직였고 굼실대는 촉수에 맺혀 있는 혼돈이 흔들릴 때마다 어둠의 포자 가 대지에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포자는 또다시 촉수를 뿌리부터 빠르게 생장시키는 듯했다.
“저건 뭐지?”
[역시 그랬군요.]
[저건 머나먼 성좌에서 온 혼돈의 하급신입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성계(星界)에서 소환된 존재라서 이 세계의 법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요.]
“하급신?! [옛 지배자]라는 소리냐.”
[아닙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에 말씀해주신 할치올레이푸라 라는 존재와 가까울 것입니다.]
“음! 그랬던 거군.”
나는 건달파의 말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백만, 아니 수억 광년 바깥의 엄청난 거리에서 찾아온 이계의 성좌! 본디 자신의 차원계에서는 신이라 불릴만한 힘을 갖추고 있으며 [옛 지배자]들과 합의에 의해 사도가 되 기도하는 강력한 혼돈의 존재가 이 자리에 소환된 것이다.
‘아마 저 괴물도 할치올레이푸라체 럼 강대한 사도가 될 수 있겠지.’
나는 건달파가 촉수괴물과의 전투를 피하고 흑룡과 싸우자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룡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필멸자의 종족이지만, 저 촉수괴물은 틀림없이 신력(神力)을 지닌 반투명한 영체(靈體) 이자 하급신이다. 격이 다른 상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건달파가 좀 더 쉬운 상대를 고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괴물이 너무 커서 은안의 사내가 보이지 않는군……’
이미 산을 뒤덮을 크기로 자라난 촉수괴물이었기에 고작 인간의 크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촉수줄기에 가려져 있었다.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내가 주시하고 있을 때 건달파가 깜짝 놀랐다.
[저, 저건!]
슈와아악 –
갑작스럽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촉수덩어리들이 어떤 한 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빨려들어 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고작 숨 몇 번 쉴 동안에 촉수는 절반 이상 빨아 먹혔다.
쿠우우우 – !!
촉수가 저항하려는 듯 갑자기 현란한 마법의 문양을 소환했고 동시에 눈이 아릴 정도의 섬광을 연속으로 터뜨렸다. 저 섬광의 효과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간이 통째로 녹으면서 대지가 푹 꺼지는 걸 보니 저기에 있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쿠구궁
투웅!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대지의 구멍이 생겨나며 급속히 성장한 촉수 줄기가 마치 허공으로 뻗듯이 튕겨 나왔다. 그러나 번들거리는 눈이 박혀 있는 그 촉수 줄기는 마치 크 게 당혹한 듯 허우적거렸고 이윽고 단말마를 내질렀다.
[@*%&&*@&$@% ]
슈르르륵 –
잠시 후 거대촉수가 통째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빨려들어가기 시작 했는데,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달리 여러 개의 균열이 생겨서 촉수를 잡아 찢듯이 당기고 있었다. 그 흡인력에 저항하려는 듯 거대촉수가 계속해서 강대한 마력을 써서 마법진을 소환했지만, 역부족인 듯, 잠시 후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흑혈(黑血)이 천공에 터져 나왔다.
푸슈슈
잠시 후 핏줄기마저도 허공에서 빨려들어 갔고 마치 다리를 쥐어뜯긴 문어처럼 바들거리던 촉수 괴물이 소리를 내질렀다.
[ * @&%@%* – !!]
슈슈슉…….
그것이 촉수 괴물의 최후였다. 허공의 균열에 모조리 흡수당한 촉수 괴물은 이젠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잔해조차도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게 보였다.
“가보자.”
[존명.]
나와 건달파는 전투가 끝난 장소에 날아서 착지했고 거대한 구멍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뻥 뚫려 있는 대지의 구멍에서 은안의 사내가 날아서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하늘을 날 수 있군……’
타닷
우리 앞에 착지한 은안의 사내는 상처 하나 없었으며 옷도 찢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살덩어리 같은 것을 뱉은 은안의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을 물리치는 걸 봤다. 이상한 기술을 쓰는 놈이군.”
우우우
은안의 사내가 양팔을 늘어뜨리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게 살의인지 뭔지 몰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경계했지만 일단 검은 뽑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꾸했다.
“내가 볼 때는 당신의 기술이야말로 이상하오. 설마 혼돈의 괴물을 잡아먹을 수 있는 거요?”
은안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바로 나의 능력이다. 너는 손에서 번개광선을 뿜어내는 능력을 타고났나 보구나.”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건 능력이 아니라 무공이오. 이름은 뇌령인(雷靈印)이라고 하는 장공(掌功)이고, 누구나 수련해서 익힐 수 있는 무술이지.”
“무공? 무술?”
“당신은 무공이 뭔지 모르시오?”
그러자 은안의 사내는 뜻밖에 상당히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 그게 뭔지 잘 모르겠군…… 능력은 모두 타고나는 게 아니냐? 수련해서 다른 능력을 더 익힐 수 있다는 말인가?”
“음…… 그렇소.”
“그거 참 대단하군. 남의 능력을 복사하는 놈은 있는데 설마 익힐 수 있을 줄이야……”
너무 고대로 와서 무공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그런데 그걸 감안 하더라도 눈앞의 사내가 보이는 반응은 뭔가 이질적이었다.
은안의 사내가 말했다.
“혼돈의 괴물과 같이 싸워주었으니 일단 너희 말을 믿어보겠다. 이름이 백웅과 건달파라고 했던가.”
“그렇소.”
“나한테 보물을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지?”
이놈봐라?
그냥 전투를 피하려고 했던 말인데 자기 이득은 확실하게 챙기네?
‘뭔가 순진한 녀석 같은 냄새가 나는군.’
나는 왠지 웃음이 피식 나는 걸 느꼈지만 애써 참고는 은안의 사내에게 말했다.
“당연히 줄 거요. 단지 조건이 있 소.”
“뭐? 아까는 그냥 준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은근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당신도 우리도 탁록의 외부에서 습격해오는 마물을 퇴치해야 하오. 힘을 합치면 더욱 좋을 거 같지 않소?”
“……”
“보물은 드리리다. 대신에 마물 퇴 치를 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오.”
“음… 실력은 꽤 좋은 거 같은데 ……”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옆에 있던 건달파를 쳐다보며 고민하던 은안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악마의 족속과 함께 다니 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런 놈들은 다 죽여없애 버려야 한다!”
역시 마(魔)에 강한 반발감이 있군.
나는 예상했던 바였기에 한 번 물러나는 척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군. 뜻이 안 맞으면 함께할 수 없으니 포기해야겠소.”
“그래도 보물은 내놓고…….”
“당연히 줄 거요. 근데 우리와 함 께 싸워준다면 무공을 가르쳐줄 생 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소.”
“!!”
흠칫하고 은안의 사내가 동요하는 게 보였다. 그가 급히 말했다.
“무공이라고? 그걸 나도 배울 수 있는가?”
“당연히 배울 수 있소. 단전(丹田) 이 있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든지.”
“내가 무공을 배우면 너처럼 손에서 번개광선을 쏠 수 있는 거겠지?”
당연히 나처럼 내공과 의념이 극치에 이르러서 내공만으로 천하를 평정할 정도가 되어야 하며 뇌신류 무공을 달인의 경지로 익히고 구궁파천뢰의 요결도 습득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그런 사실은 쏙 빼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당신도 할 수 있소.”
“호오!! 하지만 번개광선 만으로는 조금…….”
“또한 무공을 익히게 되면 기공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남을 치료해줄 수도 있소. 위급할 때 도움이 될 것 이오.”
“음 …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은안의 사내가 솔깃한지 말을 이었다.
“혹시 병도 낫게 할 수 있느냐?”
“그렇소.”
“……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말이오?”
“내가 너희와 함께 마물 퇴치를 해 주겠다. 대신에 너희는 우리 마을에 가서 한 사람을 치료해줘야 하고, 또한 내게 무공을 가르쳐 줘야 하고, 보물도 줘야 한다.”
“받아들이겠느냐?”
이거 순 날도둑놈이군…… 하지만 나는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겠소.”
어차피 무공을 가르쳐주거나 기공 치료를 해주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보물은 적당히 목갑에 있는 걸 아무거나 석화해제해서 하나 넘겨주면 그만이다. 그 대가로 사도급으로 강한 동료를 얻는다면 수지맞는 것이다.
“으흠! 좋아….”
은안의 사내는 아닌 척해도 무척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속이 빤히 읽히는 상대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킬킬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럼 임시동료인 셈인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내 이름?”
“그렇소. 계속 당신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이름을 밝혔는데 당신만 밝히지 않는 건 치사하오.”
“나는 치사하지 않다! 나는 정정당당하다!”
눈을 크게 부릅뜬 은안의 사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 이름은 위대한 신농의 후예인 열산(烈山)이다! 잘 알아둬라!”
열산? 어디서 들은 거 같기도 하고 ……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유명한 이름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럼 열산, 일단 당신네 마을로 가봅시다.”
그러자 열산이 약간 당황해했다.
“우…… 우리 마을로?”
혹시나 해서 짚어봤는데 역시 그렇군.
‘열산이 탁록을 지키려고 싸운다는 건 인간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는 거야.’
유망도 인간족의 마을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에 눈앞의 열산은 그 인간촌락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증명된 것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열산에게 말했다.
“아까 한 사람을 치료해달라 하지 않았소? 마물떼거리는 방금 전 크게 소탕했으니 당분간 몰려오지 않을 거고, 일단 내가 가진 무공으로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우선 아니겠소.”
“오!! 그건 그렇지!”
“보물은 그다음에 드리리다.”
“아주 좋아.”
열산은 갑자기 함박웃음을 짓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따라와라! 우리 마을로 안내해 주마!”
투웅
열산은 한 번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지평선의 점이 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기에 나는 열산의 뒷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저런 신체능력이 가능한 거지? 말도 안 돼.”
내가 봤을 때 방금 전의 이동속도는 무림강호 최상위권 고수들이 전력을 다해 펼치는 경공술보다 몇 배는 빨랐다. 인외(人外)의 강력한 마수나 혼돈의 괴물과도 정면으로 싸울 정도의 신체능력이었다. 신체만으로도 대라신선에 맞먹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었기에 내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건달파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며 말했다.
“무공이란 미약한 인간들이 기(氣)와 의념의 힘으로 강해지기 위해 선택한 수단입니다. 선천적으로 강력한 존재는 사실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열산은 설마……”
“우선 저자의 마을에 가봐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건달파가 인간으로 변신한 이유를 알아챘다. 보나마나 열산뿐만 아니라 인간족들은 모두 마의 일족을 혐오하고 두려워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자.”
타닷
나와 건달파가 열산의 뒤를 쫓아갔 지만, 거리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인간의 경공술만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물론 내가 멸혼보를 전력으로 쓰면 따라잡는 걸 넘어서 추월까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곳에서 그런 오기를 부릴 이유는 없었기에 얌전히 흔적을 따라갔다.
그렇게 울창한 숲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어떤 커다란 촌락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촌락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나무문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열산이 문지기마냥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우리 탁록촌(泳鹿村)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힐끔 안에 있는 기감을 감지 했는데 약 오십여 명이 사는 듯했다. 확실히 그리 크지 않은 촌인 듯 했다.
저벅
열산을 따라서 마을 안을 걸어가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다. 서너 명 정도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열산처럼 뭔가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는 존재들이었다.
‘범상한 인간이 아니군.’
내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있자 열산이 호통을 질렀다.
“이놈들아! 외지인 신기하다고 쳐다보지 마!”
그러자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의 동녀(童女)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열산에게 대들었다. 그냥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마치 조각한 듯 대단한 미모였기에 절로 시선이 갔다. 또한 신기하게도 그녀는 적발적안(赤髮赤眼)의 이질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열산 아저씨! 촌장님 계신 곳으로 대뜸 외지인을 데려가시면 어떡해요!”
“으윽. 상아(悌娥)……”
상아라고 불린 소녀는 화난 듯 말 했다.
“외지인은 잠깐 세워두세요! 그리고 촌장님한테 먼저 말씀부터 드리세요.”
“머릿속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했어.”
“그런 게 어딨어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얼굴보고 한번 말해야죠.”
열산이 우물쭈물하자 나는 열산에게 말했다.
“저 아이의 말이 맞소. 우린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 갔다 오시오.”
“알았다.”
열산이 어디론가 향했고 잠시동안 나와 건달파는 마을 사람들의 구경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꽂히고 있을 때 아까 열산에게 따지고 든 상아라는 소녀가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 누구야? 왜 마족이 여기 온 거지?”
여긴 정말 호랑이굴 같다. 또다시 건달파의 정체가 바로 들킨 것이다.
어떻게 건달파를 알아보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다른 인간들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는 침착하게 상아의 말에 대답했다.
“우린 적이 아니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마족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위험하지 않소.”
상아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마족이 인간에게 충성한다는 걸 믿으라고?”
그러자 버럭 소리를 지른 상아 옆에 있던 소년이 나무 밑에 편하게 앉은 채로 말했다.
“상아. 예민하게 굴지 마.”
그 소년은 앞머리를 무척 길게 길 러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몸을 많이 단련했는지 멀쩡한 의복을 입고 있는데도 전신에 근육이 약간 불거져 있었고 침착한 성격으로 보였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열산 아저씨가 책임지고 데려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손님일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어.”
“바보야! 마족이 갑자기 난동을 부 리면 우리가 마족을 해치워도 그 전 에 피해가 나온단 말이야. 마을에서 쫓아내야 해.”
“열산 아저씨야말로 마족에 대한 적대심이 가장 강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데려왔다는 건 일단 믿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앞머리를 가린 소년이 우리 앞으로 오더니 작대기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저는 청양(靑陽)이라 합니다. 손님들에게 무례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소.”
“다만 상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잠시 당신들의 자유를 제약하겠습니다.”
“응?”
키기기!!
그 순간 나와 건달파가 서 있던 자리에 크게 검은 기둥 같은 결계가 감싸는 게 보였다. 사각기둥의 결계에 갇힌 나는 약간 당황하며 바깥에 있는 청양에게 말했다.
“이거 너무하는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
웅성웅성
그러자 도리어 청양이라는 소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옆에 있던 상아나 다른 마을주민들도 놀라는 것 같았다. 상아가 자신의 입을 가리며 놀란 걸 숨기지 못했다.
“청양의 능력에 갇히고도 움직일 수 있어?”
응?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나는 혹시나 싶어서 옆에 있던 건달파를 보았다. 그러자 나는 건달파가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채로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건달파는 말 그대로 저항조차 못 하고 결계에 당해 버린 모양이었다.
“!!”
아무리 인간화를 했다고 해도 건달파는 마왕이다. 마왕의 인간형태를 순식간에 결계에 가둬서 봉인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도사나 대라신선 조차도 이런 결계술은 꿈도 꾸지 못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아니……… 팔부신중 최고의 술법사인 천인이라 해도 술법으로 이런 짓은 못할 거야…….’
마왕이 인간화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보유한 마력으로 인해 항마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나는 청양의 능력 또한 열산에 못지않게 강력하다는 걸 깨닫고는 말했다.
“너희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러 니까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경계하는 건 그만둬라. 여기 건달파 녀석이 너희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내 목숨으로 사죄하겠다!”
“……”
청양이라는 소년이 내 쪽을 계속 쳐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신(神)이십니까?”
신?
갑자기 무슨?
나는 청양의 물음에 어이가 없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신 아니야. 너희들과 같은 인간이다.”
“믿기지 않는군요. 제 능력에 맞고도 멀쩡한 건 신밖에 없었습니다.”
“어?! 진짜 신한테 능력을 써 봤다고?”
“죽을 뻔했지만요.”
쓴웃음을 머금은 청양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능력을 해제할 테니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따닥 하고 청양이 막대기로 바닥을 두들기자 나와 건달파를 덮고 있던 사각형의 기둥이 사라졌다. 그제야 건달파는 제정신이 들어온 것 같았고, 심지어 자기가 뭘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그러지 마.”
그때 열산이 저만치에서 날듯이 달 려오며 말했다.
“촌장한테 허락 맡았다! 이제 따라 와.”
저벅 저벅
나와 건달파는 입을 다물고 열산을 따라갔다. 이 탁록촌이라는 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거지?’
열산도 그렇고 청양도 그렇고 대라 신선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뭔가 이상하다. 그 위화감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의 제일 안쪽으로 들어 가자 가장 큰 나무집이 보였고 그 안에 들어가자 한 아름다운 미녀가 짚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아름답군……’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방금 전 봤던 상아라는 소녀도 절세미모의 소유자였지만 저 여인도 굉장하다. 내 표현력이 빈약해서 예쁜 걸 그저 예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굳이 비교하 자면 상아는 마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고 저 치렁치렁한 흑발의 여인은 달과 같은 미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점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외모를 뒷받침 하는 아름다운 눈동자의 색깔이 바로 은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은안(銀眼)….”
우리를 실내로 안내한 열산이 험상 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촌장. 내가 말했던 게 이놈들이다.”
그러자 은안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신기한 사람들이군요. 당신들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다고?
그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촌장이라고 불린 은안의 미녀가 앉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백웅, 잘 왔어요. 나는 이 탁록의 촌장인 유소(有巢)라고 합니다.”
유소라고 하는 건가.
‘음…… 이 이름도 어디서 들어봤 던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나는 대충 상대방의 이름을 외우려 고 노력하며 유소 촌장에게 말했다.
“유소 촌장. 혹시 병에 걸려 있다는 게 당신이오?”
내 질문에 유소 촌장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내 병을 고칠 수 없지만요.”
“……”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나는 황당해서 유소의 말에 반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직 당신의 병이 뭔지도 듣지 못했고 내가 무슨 수를 써서 병을 고칠지도 알지 못하잖소? 그런데 벌써 지레짐작하여 포기하는 건 너무 나약한 소리 같구려.”
“제 병의 이름은 바로 천기누설이 랍니다. 그리고 무공(武功)의 기공 치료(氣功治療)라는 걸로 제 병을 고치려던 당신은 제 인과에 휘말려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
“음……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라는 게 뭔가요? 그걸로 몸 안의 노폐물을 다 태우는 수법을 써서 지병이 낫고 건강해지긴 하지만 결국 다른 일로 인해 죽으니까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허억…….”
이, 이게 무슨?!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구궁파천뢰를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경악해서 놀라고 있자 뒤에 있던 열산이 한숨을 쉬며 실내로 들 어왔다.
입만 열면 운명운명 하는구나. 네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알기는 하느냐?”
그러자 유소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전부 정해져 있는걸요.”
오라버니?
나는 그 말에 놀라서 그들을 쳐다 보았다.
“남매였소?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깔이….”
“후후.”
유소 촌장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래도 신기하네요. 계속 변화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백웅 당신에게는 계속 기대를 하게 되는 저 자신을 미래에서 보게 되네요.”
“그게 무슨 말이오?”
“눈치채셨겠지만 이 탁록촌은 특수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발현되는 거라서 제어할 수가 없지만 강력하기 그지없죠.”
유소의 말이 이어졌다.
“제 능력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실시간으로 모든 인과율이 변동하는 게 보이지요. 온갖 경우의 수가 느껴지네요.”
“!!”
미래예지!
그거라면 유소의 말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말도 안 돼. 나도 미래예지능력이라면 많이 봐 왔소. 하지만 거의 모든 미래예지능력은 불완전했고 심지어 잘 맞지도 않았소. 딱 하나 완전한 미래예지능력이 있긴 했지만 그걸 사용하는 놈이 너무 강력해서 무의미했지…….”
“그런데 당신은 마치 내가 할 일을 다 읽어낸 것처럼 말해 버리는군. 이런 건 본 적이 없소. 또한 강력한 미래예지는 신격의 간섭을 받아서 결국 틀어지게 되는 거요.”
백우선의 미래예측으로도 방금 유소가 했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백우선은 이미 수집된 정보내에서 예측하기 때문이다. 유소처럼 알지도 못하는 걸 뜬금없이 겪은 것 마냥 줄줄 말해 버리는 건 내가 알고 있는 필멸자의 미래예지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설명이 편하겠어요.”
유소가 말했다.
“제가 모든 걸 읽어낼 수 있는 이 유는 지금 이 세상의 특성 때문이에요.”
“특성?”
“제 예지능력이 아주 강력한 탓도 있지만, 지금 이 지상계에는 무수한 신(神)이 강림해 있어요. 무척 강력한 혼돈의 신성들이 여기저기서 충 돌하는 중이고 사실 필멸자는 그 틈 바구니에서 살아남기 힘들죠. 그리고 그 때문에 신격들은 제 예지능력을 방해하기 힘들어요.”
“응? 어째서 그렇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신성들이 서로 싸우는 도중에 [작은 굴레]를 돌리면서 무수히 시공간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굴레]를 사용하는 빈도가 큰 만큼 그들은 필멸자의 운명 같은 소소한 영역에는 간섭하기 힘들어지죠. 왜냐하면 제가 염제 신농의 가호 아래 어디에도 간섭하지 않고 있기에 제게 간섭하면 자신들만 귀찮아지기 때문이에요.”
“으음!!”
“역풍이 불 확률도 높고요.”
신들이 미친 듯이 [작은 굴레]를 움직이며 날뛰는 중이라서 도리어 예지능력자는 덕을 보게 된다는 말 인가?
‘그래서 신들의 전쟁이 사라지고 그 숫자가 줄어든 후세에는 예지능력자에게 신들이 간섭하기 쉬워지는 거군…….’
도리어 이런 야만적인 신대(神代)이기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원리를 대충 이해하고 있을 때 유소가 말했다.
“백웅 당신이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건 이해했어요. 천여 개의 미래를 보았는데 당신은 우리 마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계속도 우려 하는군요.”
“그렇다니까…….”
“다만 저는 당신의 도움을 정중히 사양하겠어요. 어차피 못 고치는 거 니까요.”
“아니 잠깐! 그건 아니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게 어딨소? 수많은 미래를 시도하다 보면 결국 하나쯤은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미래를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오.”
“백웅, 사실 그래서 고민중이에요. 당신이 모든 걸 뒤틀리게 하고 있거든요.”
“모든 걸 뒤틀리게 한다고?”
유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개입된 모든 미래는 둘 중 하나예요. 엉망진창이 되거나 아예 읽을 수가 없거나…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조만간 당신의 선택 때문에 이 세계의 미래가 바뀌게 되는데 거기서부터는 아예 당신의 미래를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지?”
유소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당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존재예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거라구요. 당신은 어째서 이런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뇨, 당신은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지?”
“왜냐하면 이미 당신과 관련된 미래를 읽었을 때 당신 본인에게서 천기를 누설 받았거든요.”
“이미 미래를 읽어서 알고 있어요.”
이어진 유소의 말에 나는 정체를 들켰다는 걸 직감했다.
“당신은 [큰 굴레]를 넘어서 과거로 온 존재라는 걸.
내가 그 사실에 놀라자 옆에서 듣 던 열산이 나보다 더 놀랐다.
“누이! 그 말이 사실이냐?! 저놈이 미래에서 왔다고!”
유소가 열산과 눈을 빤히 마주쳤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응? 방금 전은…….”
“그렇지 않아요.”
휘청
“어어…… 머리가…….”
풀썩!
갑자기 열산의 눈이 풀리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서 혼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정신조작능력인가?”
“그래요. 제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죠. 오라버니는 방금 전 당신들과 했던 얘기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미래예지능력에 정신조작까지 갖고 있는 자라면 정말 두렵기 짝이 없 다. 그것도 열산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사도급 악마를 가볍게 해치우는 강자였는데 그런 열산의 정신방어력을 마치 종잇장처럼 뚫어 버렸다는 소리가 아닌가?
‘육체적으로 보통 인간일 뿐 정신 능력은 이미 초월자 수준이야!!’
내가 경계하는 눈으로 유소를 보며 말했다.
“열산의 입만 막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야. 신(神)의 지각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했던 얘기는 다 들었을 거요.”
“후후, 그럴 줄 알고 그것도 대비를 해놨습니다.”
“어?”
“눈치 못챘겠지만 당신들이 이 집에 들어올 때 신조차 염탐할 수 없는 방음결계를 쳐놨어요. 마을사람 중 한 명의 능력입니다.”
“……”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거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생각보다 눈앞의 유소라는 존재가 철두철미하며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건달파도 느꼈는지, 건달파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건달파도 원래 역사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살아왔지만 이 탁록촌 사람들처럼 어마어마한 초상능력을 가진 무리는 본 적이 없소. 당신들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정체라……… 그건 우리 자신도 몰라요. 단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능력이니까 마치 손발을 움직이듯이 쓰고 있을 뿐.”
유소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마을의 근원은 따로 있긴 해요. 수백 년 전에 마을의 선조 되시는 분께서 신농님의 가호를 얻어 이 땅에 정착했고, 그분은 곤륜산에서 왔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곤륜! 천계인가?” “글쎄요. 천계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곤륜에서 오신 선조는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안전한 땅이 있다는 소문에 탁록으로 몰려든 인간들이었어요.”
“그랬군…… 아무튼 당신들이 가진 엄청난 능력의 근원은 모른다 그 소리요?”
“그런 셈이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유소가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큰 굴레]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라고 신농님에게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넘은 거죠?”
“신농! 당신은 설마 신농과 만난 적이 있소?”
“시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말을 걸어오세요. 신의 입장에서도 저 같은 예지능력자는 신경 쓰이니까 가끔 대화를 한답니다.”
“음!!”
신농과 직접 대화를 해도 정신이 멀쩡하단 말인가?
하긴 저 정도로 정신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초능력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신농에게도 내가 큰 굴레를 넘었 다는 건 말해선 안 되오. 아니, 이미 당신이 알아챈 시점에서 다 틀려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유소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어차피 난 곧 죽을 목숨이니까 비밀이 누설되지 않을 거예요.”
“……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지 말라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유소를 보았다.
“대체 당신의 속셈이 뭐요? 내 비밀을 알았다는 걸 감출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내게 다 설명해주는 이유가 뭐지?”
유소가 살짝 눈을 감으며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어차피 전 죽어요. 당신이 돕든 돕지 않는 너무 강력한 예지력을 타고난 탓에 인과율 때문에 죽는 거죠. 저 같은 존재가 오래 살아 있으면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인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은 태어나서 눈을 뜬 그 순간 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두 알고 있었답니다.”
“……”
“그런데 아마도 당신들이 [큰 굴레]를 넘어서 온 순간…… 아마도 몇 시간 전부터 제 모든 인생이 뒤틀렸어요. 죽음이라는 운명은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 계속 변하게 된 거죠.”
유소가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하하하, 그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 지 모르실 거예요!”
“죽음이 기쁘다니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음? 당신은 딱히 그럴 말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이어진 말에 연속으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
그, 그것까지 알아냈단 말인가?! 나는 유소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욱 규격 외라는 걸 깨닫고 전율했다. 알아낸 방법은 틀림없이 미래를 관 찰하고 그중에서 내가 정보를 말하 는 미래를 알아내서 그냥 들은 것뿐 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렇게까지 압 도적인 예지능력을 거의 본 적이 없 었기에 살짝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능력만이라면 황제 공손헌원의 인과율 계산능력이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백우선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어!!’
틀림없다. 유소의 예지능력은 신(神)조차도 뛰어넘는다!
인과율 때문에 일찍 죽는다는 게 납득이 될 정도다. 만일 유소가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천상천하의 모든 균형이 무너지리라.
유소는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곧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될 거예요. 그 선택에 따라 세상의 운명 또한 변하게 되죠. 그리고 그 선택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선택? 무슨 선택을 말하는 거요?”
“당신의 의지로 인과율을 잇는가, 잇지 않는가를 선택하는 거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흥미로워요.”
“뭐가 흥미롭소. 어차피 미래를 읽어서 그 결과도 다 알고 있을 텐데.”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유 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그건 몰라요. 내 예지능력은 당신이 그 선택을 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아요.”
“뭐라고?”
“달리 말하자면 당신이 그 선택을 하고 나서야 내 운명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왠지 유소와 얘기하고 있으면 혼란스러워진다. 상대가 이미 미래의 나와 이야기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호흡이 가빠지고 약간은 두려워진다. 미래예지능력자가 이래서 두려운 것인가??
유소가 말했다.
“아무튼 나는 내 변화하는 운명을 보기 위해서 당신에게 전적으로 협 조할 거예요. 적어도 그때까지는 살아 있을 수 있게 도와주죠, 전생자(轉生者) 백웅.”
“그거 참 고맙군. 그래서 내가 이제 뭘 하면 되지? 미래를 본다면 그것도 알고 있을 것 아니오.”
“흐음…… 왜 물어보는 거죠? 그냥 맘대로 하면 될 텐데.”
“그야 모든 걸 예지하고 있다면 당 신에게 듣고 나서 행동하나 아니면 미래를 듣고 행동하나 똑같은 거니까…….”
“그게 정말로 같은 걸까요?”
“뭐?”
유소는 묘이(妙異)한 미소를 띠며 쿡쿡 웃었다.
“그건 결국 미래를 보는 ‘나 자신’이 예언했기에 예언자 자체가 미래 에 간섭한 게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은 예언자의 간섭으로 변한 미래가 정말로 원래와 차이가 없다고 보 시나요?”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요.”
“이건 당신에게 주는 조언이에요. 당신은 어차피 미래에 이 문제로 고민하여 머리를 쥐어뜯을 테니까….”
유소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백웅. 예언자가 자신의 과거를 예언한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그걸 잘 생각해보세요.”
나는 황당해했다.
“……? 과거를 예언한다니?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요?”
“못할 건 없잖아요?”
“과거는 이미 지나왔기에 바꿀 수가 없잖소. 그리고 바뀌지 않기에 그건 다들 궁금해하지도 않는 거요. 그리고 예언이란 본래 미래를 예측 하는 것이기에 과거를 예측하는 건 말의 뜻과 모순되오.”
“그것까지 포함해서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예요.”
“…… ”
“어렵죠?”
“어렵다기보단 미친 것 같구려.”
“후후….”
유소는 쿡쿡 웃는 것 같았다. 너무 나 사람을 놀려먹는 듯한 웃음이었 기에 나는 유소가 지금 고양이 장난치듯이 나를 대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 었기에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유소가 말했다.
“그렇게 자아 없이 미래예지에 의 탁하고 싶다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드리죠. 먼저 유망에게 다녀오도록 해요.”
“유망한테?”
유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망이 당신에게 좋은 걸 준다고 했으니까요.”
“당신은 그게 뭔지 알고 있을 텐데 그냥 알려주시오.”
“싫은데요.”
“미래는 모르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축복받은 줄이나 아세요.”
아니 이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였나?
나는 기가 막혔지만 여태 살면서 유소만큼이나 괴팍한 인간도 여럿 만나봤기에 나는 그러려니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 으면서 말했다.
“알았소. 그리고 또 하나…….”
“건달파가 마족이라고 박해받거나 공격받지 않게 신경 써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죠? 그다음은 못 당하겠군. 이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밖으로 나가게 될 거고, 밖에 나가서는 상아한테 시비가 걸릴 거 예요. 시간 낭비는 귀찮으니까 상아 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해놓죠.”
“아, 가는 도중에 이계로 통하는 어둠의 늪지대 때문에 거기에 사는 늪괴물과 싸울 수도 있겠네요. 백색 절벽 앞에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가시길 바래요.”
나는 유소의 말을 듣고 있자 속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쥐어짜듯이 억눌린 말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겠지?”
“그래요.”
유소가 방긋 웃었다.
“정말 재수 없다는 말은 수천 번도 들었으니까요.”
저벅
정말로 집 밖으로 나가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상아가 약간 화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소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시비를 걸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래 붙어 있으면 결국 시비가 걸리긴 하겠군.’
나는 귀찮은 일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마을에서 나갔다. 내 옆에서 따라오던 건달파가 조심스레 말했다.
“주군. 저 유소라는 자는 너무 위 험합니다. 그냥 죽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런 건달파의 말에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것도 아 까 예지했을걸.”
“그러나 결국 우리가 마을 밖으로 나올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예지력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
“전혀 아니거든.”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나뭇가지 사이를 크게 도약했다. 흔들림 하나 없이 다른 가지에 착지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전생하면서 예지능력자를 상대해봐서 알아. 저런 녀석들을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고, 방금도 우리를 못 막은 게 아니라 그냥 가게 둔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 이 강하긴 하지만 도주마저 힘들 정도는 ….”
“…….라고 생각하는 걸 우리가 마을에 오기 전에 미리 읽고 함정을 다 파놨으면 어떻게 하게. 열산과 청양이란 녀석들이 합만 잘 맞춰도 최소한 너는 손도 못 쓰고 죽었을걸?”
“……”
“유소의 육체능력이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서 얕보지 마. 저 유소가 악의를 품고 탁록촌 사람들을 움직이 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울 거야.”
“그, 그렇군요. 주군……”
건달파가 움찔했다. 나는 내심 한 숨을 쉬었다.
‘에휴.’
건달파도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있 지만 마왕의 힘을 휘두른 시간이 길 다 보니 자신보다 한참 약한 인간을 깔보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래서인지 이런 경우는 나보다 객관 적으로 상황판단을 못 하는 것이다. 결국 건달파도 나름대로 경험적인 머리를 쓰긴 하지만 이 시대에서 내 책사가 되어줄 인물은 아니리라.
책사가 있고 없고는 움직일 때 효율성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그런 데 과연 이 신화시대에 내 두뇌가 되어줄 똑똑한 인물이 있을까?
‘유소는 안 돼. 미래를 읽는다는 것 자체로 나를 마음대로 갖고 놀 가능성이 너무 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까 유소가 말했던 하얀 절벽이 보였다.
“이거로군. 오른쪽으로 가자.”
“존명.”
타닷
유소의 도움으로 함정 늪지대를 피 해서 약간 더 걷자 마침내 저번에 유망을 만났던 장소에 도달했다. 유 망은 그 장소에 그대로 자신의 활시 위를 매만지며 걸터앉아 있었고 우 리를 보자 반갑다는 듯 말했다.
[왔구나.]
“유망님. 말한 대로 마물을 퇴치 했습니다.”
[전리품은?]
“어…..”
전리품?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약간 당 황했다. 그러자 유망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전공(戰功)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 한 수단은 적의 시체에서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지. 전리품을 챙기지 않으면 어찌 공을 증명할 수 있겠는 가? 너희가 공을 세우지 않고 놀았 을지도 모르는 바가 아니냐.]
“으음.”
젠장…… 은안의 사내인 열산이 너무 생각밖의 존재라서 깜빡했다고!
[하긴 용을 상대로 퇴각시켰으니 마땅한 전리품을 챙기기는 힘들었겠 지. 인정해주마.]
나는 유망의 말에 번뜩 얼굴을 들 었다.
“다 보고 계셨군요.”
[……]
유망은 의미모를 웃음을 지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와라.]
나는 건달파와 함께 유망을 따라갔다. 유망이 걸을 때마다 커다란 발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마치 그 자 리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는 게 특이했다. 또한 답설 무흔(踏雪無痕)처럼 그의 발자국조 차 땅에 남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 었다.
‘저렇게 거대한 거신족이 걷는데 왜 흔적이나 소리가 없지?’
그러자 내 낌새를 눈치챈 듯 유망 이 앞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궁금 해 보이는군.] “아. 그렇습니다.”
[너희 눈에 보이는 이 육체는 신체 (神體)이므로 하계의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필요할 때만 그 법칙을 조작하기도 하지.]
[거신족 전사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거신족이 왜 막강한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 육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때로 법칙을 조작한다는 건…… 그냥 신이라는 거잖아.’
다른 종족은 아무리 거칠고 사나워 보여도 결국 육체가 물리법칙에 구 애된 경우가 절대다수였지만 거신족 은 달랐다. 말이 필멸자 종족일 뿐 사실상 불멸자인 게 거신족인 것이 다. 그런 만큼 일반적인 종족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진 것이 분명 했다.
약간을 걷자 어딘가 으슥한 풀숲이 나왔고, 그 벌레 가득한 풀숲을 조금 더 헤치고 나가자 웬 청명하고 맑은 호숫가 보였다.
쏴아아…….
탁록이 워낙 넓은 숲지대이기 때문 일까? 펼쳐져 있는 호수 또한 무척 커 보였다. 나는 호수를 보며 신기 함을 느꼈다.
‘후대의 탁록에 이렇게 넓은 호수 는 없었는데……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사라진 걸까?’
그 호수의 풍경을 잠시 감상하고 있던 유망이 말했다.
[곧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거라.]
“그러죠.”
나는 호숫가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데다가 유소의 예언에 따르면 일단 유망에 게서 뭔가를 받아가야 일이 진행되 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정적이 흐른 후,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유망이 팔짱을 낀 채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호수의 정령들이 오늘 따라 무척 호기심이 많구나.]
“호기심이 많다니요?”
유망이 힐끔 곁눈질로 나를 보며 말했다.
[백웅, 너한테 큰 호감을 느끼고 계속 얘기하고 싶어 한다.]
“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호수의 정령들이 내게 호감을 느낀 다고? 뜻밖의 일에 내가 어리둥절하자 유망이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너희도 나중에 나한테 보물 하나를 바치도록.]
“네? 뇌물은 안 받으신다고…….”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지금 나는 너희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는 셈이 니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겠다.]
“기회라니…….”
[내놓을 거냐 안 내놓을 거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 저었다.
“드리겠습니다. 설마 한 입으로 두 말하실 줄은 몰랐는데…….”
[흥. 생각해보니 아까 너무 인심을 쓴 것 같았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군.]
우우우…….
밤이 되어서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 자 심상치 않은 이명(耳鳴)이 호수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호수 표면에 파장이 번져나가며 호수를 흐리게 만들었고, 이윽고 물결이 시뻘건 피 처럼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쏴아아
서서히 호수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둥근 건축물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호수 밑바닥에 잠자고 있었던 듯한 그 건축물은 딱 달빛 비추는 중앙으 로 상승하고 있었기에 달빛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건축물이 거의 다 떠오르자 유망이 으스대듯 말했다.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본디 저건 1년에 한 번만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만 내가 특별히 힘을 써서 오늘 떠오르게끔 해 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후후…… 기다려봐라.]
쿠르릉!
잠시 후 건축물이 완전히 떠오르자 호수 기슭에서 건축물까지 건너가는 돌다리도 함께 떠올랐다. 돌다리에 서 물기가 좀 빠지고 나자 유망이 앞서서 돌다리를 건넜고 나와 건달파는 그 뒤를 따르려 했다.
[야, 잠깐!]
하지만 갑자기 그때 유망이 확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자신의 창을 뽑아서 건달파를 겨누었다. 건달파가 흠칫하자 유망이 차가운 목소 리로 말했다.
[넌 안 돼. 인간이 아니니까.]
“…… 알았소. 공격하지 마시오.”
[얌전히 있어라.]
건달파가 슬슬 물러서자 그제야 유망은 나와 함께 돌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납득이 안 되어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건달파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러자 유망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 다.
[크하하하!!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네?”
[내가 너무 강한 거지 저 마왕놈이 약한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바깥세상에선 그래 도 중간 정도는 가는 놈이지. 그런 마왕을 탁록에 들여와 놓고 안전하 다고 주장하는 건 마치 사자를 데려 와 인간들에게 애완동물로 만들었다 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
[지금 이 유적은 철저히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유적이다. 마왕 따위를 들였다가 마기 때문에 유적이 오염되면 신농 님이 날 가만두지 않을것이다.]
그 말대로라면 신농 또한 이 유적을 애지중지한다는 뜻이리라. 대체 어떤 유적이길래?
내가 궁금증을 가득 품고 있을 때 돌다리를 다 건넜고, 마침내 둥근 원형의 건축물 위에 올라설 수 있었 다. 유망은 건축물의 둥근 판때기 같은 너른 공간에 서서는 히죽거리 며 웃었다.
[후후후. 이 가운데 와서 서라.]
“어….”
나는 멍하니 걸어가서 유망 말대로 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뭐지? 어디서 봤더라?
나는 잠시 동안 기억력을 크게 강 화시켜서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렸 다. 이 기시감은 보통이 아니었으므 로 틀림없이 내가 어디서 보긴 봤으 리라. 그리고 한참 후 나는 뭔가를 깨닫고는 급히 유적의 외곽을 살펴 보았다.
[어? 지금 뭐 하는 거냐?]
“잠시만요.”
설마…… 설마…….
나는 잠시 후 이 유적의 하단에 존재하는 웬 팔괘(八卦)의 도형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마치 손을 올려 서 조작하는 듯한 팔괘의 손 받침대 같은 것이었고, 나는 그걸 보자마자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이, 이건!!”
틀림없다.
“태극(太極)의 대(臺)!!”
내가 산하사직도의 꿈속으로 들어 갔을 때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을 만 나서 마주쳤던 유물! 28번째 삶에서 꽤나 시간이 지나서였는지 단숨에 기억을 해내지 못했고, 게다가 설마 이걸 탁록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기 에 더 그랬다.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대가 부숴져 있군…….’
심한 손상은 아니지만, 원래의 깔 끔한 모습에서는 거리가 생겨서 알아보기 힘든 탓도 있었다. 내가 멍 하니 서 있자 유망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니? 너는 이 유적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이냐?]
아차! 나는 나도 모르게 의심 살 행동을 해 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허둥지둥 수습했다.
“아…… 이것과 아주 비슷한 물건 을 과거에 본 것 같습니다.”
[태극의 대라. 그럭저럭 어울리는 이름이군. 그래서 그걸 어디서 언제봤지?]
“그게…….”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이 있던 태초의 천계에서 봤다고 하면 믿지도 않 을 것 같은데……….
내가 곤란해하고 있자 유망이 씩 웃었다.
[뭐 됐다. 그러면 더 묻지 않겠다. 탁록에는 너 같이 사연 있는 놈이 한둘이 아니거든.]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 유적이 어떤 능력이 있 는지 알고 있겠지?]
“그게 분명 [혼돈의 재능]을 각성 시켜주는….”
나는 말하던 도중 뭔가를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서, 설마 그런 거였나?!
내가 뜻밖의 진실을 깨닫고 놀라고 있자 유망이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너 같은 별종 과 달리 보통 인간은 약하다. 약해 도 너무 약해서 나 같은 거신족이 볼 때는 무슨 벌레새끼가 따로 없 지. 심지어 하급 외계종족조차 너희 인간족을 가볍게 한 끼 식사로 먹어 치울 정도이니 사실 내가 일일이 보 호해주기엔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너무 쉽게 죽어 나가니까 내가 신농 님께 진언을 드 렸다.] “인간에게 가호를 내려달라고 하신 거군요.”
유망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빛으 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내 짬에 이게 뭔 개지랄인지 모르겠으니 3교대 하게 병력 충 원해달라고 말했지…….]
“……”
[아무튼 신농 님은 내 의견을 받아 들이셨지만, 황제와 전쟁을 준비하고 계셔서 병력이 부족하다 하셨다. 그 대신 타협안으로 이 유적을 내게 보내주셨다. 이 태극의 대를 이용해서 인간들을 각성시키면 보호하기 편할 거라고…… 사실 병력을 충원 해 주는 게 편했겠지만, 이것도 나 름대로 만족하는 중이다.]
나는 유망의 말에 전후사정을 이해 했다. 유망은 탁록에 있는 인간들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신화시대에 인간이 너무 약했던 게 문제 였다. 그래서 인간이 최소한 자기를 보호할 힘을 불어넣기 위해 태극의 대를 하사받은 것이다. 나는 팔괘문 양의 장치를 보며 말했다.
“본디 이 대는 이 팔괘문양에 손을 대고 팔괘의 운행대로 술수를 부려 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조작법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러자 유망은 처음 듣는다는 듯 귀를 파며 말했다.
[아니. 그냥 올라갔을 때 내가 신력으로 힘을 쏴주면 이 대가 알아서 감응하여 인간을 각성시키더라.]
“……?! 그런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
[물론 네가 말한 방법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실패한 인간은 뻥 하고 터져서 죽었거든, 껄껄껄.]
“…….”
음…… 솔직히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시천존에게 직접 내가 시술받을 때도 실패하면 죽으니까 부활 능력으로 살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능력을 가진 원시천존이 있냐 없냐 그뿐일 지도 모른다.
나는 신기해서 대를 살피며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탁록촌의 모든 인 간들이 이 대를 이용해서 혼돈의 재 능을 각성한 거군요.” [음? 아니다.] “아니라는 말씀은…….”
[이 유적을 이용해서 각성시킬 필 요도 없는 돌연변이가 몇 놈 있었 다. 탁록촌의 촌장이나 그 오래비 놈 같은 녀석들…… 그 녀석들은 태극의 대를 이용해서 각성한 인간보다 수십 배는 강하지. 솔직히 그놈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거신족의 전사에 맞먹는다.]
[아무래도 선천적인 능력자와 후천 적인 능력자에게는 자질 차이가 큰 것 같더군.]
그런 건가. [혼돈의 재능]을 후천적으로 각성 시킬 수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 난 자는 그 힘의 크기가 수십 배나 강하기 때문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범재나 둔재를 위한 용도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얘기를 했을 때 유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 이 녀석. 말하는 걸 보아하니 너는 이미 이 태극대를 이용해서 [혼돈의 재능을 한 차례 각성해 버 린 모양이군?]
“아!! 그렇습니다.”
그러자 유망이 투덜거렸다.
[에잉, 쯧쯧. 뭐야. 간만에 인간 녀석이 초능력을 얻어서 기뻐하며 재롱잔치 하는 거나 보고 싶었는데.]
“……”
[그게 내 몇 없는 소일거리란 말이다.]
나는 침묵했다. 유망이 내게 [혼돈 의 재능]을 각성시키려고 데려왔다. 는 걸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게 뜻밖의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 문이다. 나는 이 유적을 살피며 곰 곰이 생각했다.
‘…… 그렇다면…… 시대를 유추하는 게 가능해. 내가 산하사직도에서 보았던 그 시대에 태극의 대는 천계에 있었고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태극의 대는 염제 신농의 손에 들어 갔고, 신농이 유망에게 태극의 대를 내린 거구나.’
그러면 지금 시기는 초고대에서 고대 사이의 어딘가일 것이다. 즉 탁록대전 까지만 해도 혼돈의 재능을 각성시키는 보패인 태극의 대는 존재했었다는 말이리라.
… 해 볼 만 해.
나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유망에게 말했다.
“유망 님. 재롱잔치 보고싶으십니까?”
[응? 너 설마 ….]
나는 대의 한가운데로 가면서 눈을 빛냈다.
“한 번 더 각성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