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1396)
‘이건?
잠시 후 나는 그 기운이 아마테라스나 전욱의 기운과는 무척 다른, 굉장히 이질적인 이세계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피부를 뒤덮듯이 흩어지며 완충막을 만들어 내는 그 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세쓰(seth)!! 그렇구나. 내 안에 세피로트 카발라의 힘 또한 신력의 일부가 되어서 합해진 건가? 윽!’
나는 세쓰의 힘이 전신을 뒤덮고 나자 갑자기 팔뚝에서 따끔한 화상 같은 아픔이 느껴져서 움찔했다.
치지직
마치 화인(火印)이 내려앉는 듯한 격통! 다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었고 나는 침착하게 팔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팔뚝에 새겨진 [이름] 중에서 [아담카드몬]이라는 이름 위에 세쓰의 나무줄기가 뒤덮 더니 이윽고 이름이 크게 발화(發火)하기 시작했다.
후와악
지글지글 익으며 아담카드몬의 이름이 녹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잠시 후 녹은 이름의 흔적이 내 팔뚝 속으로 서서히 녹아드는 게 보였다.
동시에 마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게 들렸다.
[오오오…… 위대한 데미우르고스여…… 그대를 찬양하오…… 아인소프오르의 기억을 얻고싶다면 새벽의 명성(明星)을 파쓰(path)의 제물로 바치시오!!]그것은 예전에 들었던 아담카드몬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촤좌좍
“헉!”
갑자기 유리가 깨어지듯이 내 집중력이 깨졌고 나는 현실세계로 되돌아 왔다. 내가 전신에서 땀을 흘리자 흑웅이 나직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전륜시키기를 반복하시오. 그러면 신력은 갈수록 정순해질 것이고 통제력도 강해지겠지.]“으음…… 이게 진짜 신력 수련인 거군.”
[그렇소. 허나 기본기만 수련하기보다는 주인의 적성을 빨리 찾아내는 것도 중요했지.]흑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데 방금 무슨 일 있었소?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군.]“그게 방금 전에……”
나는 아담카드몬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상세히 흑웅에게 말해 주었다. 이런걸 괜히 숨기고 기분탓으로 넘겼다가는 나중에 더 귀찮아진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 문이다.
그러자 흑웅은 그 말을 듣고는 심각하게 여기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전뇌자가 주인에게 카발라 계열의 신력을 가르쳤던 게 주화입마를 불러온 것 같군. 세쓰라는 힘과 주인에게 바쳐진 [이름]이 감응해 버린 것 같소.]“감응하면 안 좋은 건가?”
[내 추측으로는 지금 이계의 신, 아담카드몬의 신력이 그대로 녹아서 주인에게 흡수되는 중이오. 이로써 주인의 신력이 한층 증대될 테니 좋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흑웅이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세피로트의 나무를?”
[세쓰를 포함해 카발라 신력의 수련은 수련자의 내면에 세피로트의 나무를 만들고 그 힘을 소환해서 사역하는 것에 있소. 신력은 살아숨쉬는 거나 마찬가지니 저절로 그 형태를 만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오.]“…… 그게 나쁜 건가?”
[그건 나로서도 판단할 수 없소. 하지만 [새벽의 명성]이라는 제물을 필요로 하는 걸 보면……]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마음속이 무거워졌다.
[그건 틀림없는 마도(魔道)의 길로 향하는 것이오.]“……”
아무래도 웬만해서는 아담카드몬의 말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흑웅의 지도 아래 전륜의 수련을 몇 시진이고 반복했다. 그러나 체력과 기력이 금세 소모되어 다섯 시진 후에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서 뻗어 버렸고, 진이 빠져서 누워 있는 내게 흑웅이 말했다.
[수련한 시간만큼 휴식하시오.]“끄윽…… 미친…… 나는 원래 무한에 가까운 내공을 가져서 무한체력 아니었어?! 이건 대체 왜 체력이 바닥을 보는 거야.”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바닥에 드러누운 채 끙끙대자 흑웅이 피식 웃었다.
[신력의 힘은 근원의 혼돈, 영혼과 상단전의 힘을 끌어내서 공명하는 건데 하위차원의 체력이 아무리 많든간에 힘들 수밖에 없소. 주인은 신력수련을 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무작정 하다가는 계속 힘들어질 것이오.]“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야 되잖아.”
[어쩔 수 없지.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수밖에.]“엄청나게 시간이 걸리는 게 어쩔 수 없다고?”
그러자 흑웅이 무슨 소리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력수련을 하는 게 누구일 거 같소? 대라신선도 이런 식으로 신력을 수련하지는 못하오. 신의 사도쯤은 되어야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런 신성들은 남아도는 게 시간이고 기본적으로 수억 년 이상 살아온 자들이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신력의 힘을 버티기 위해서 육체 또한 상위차원으로 진화하는 것이오.]나는 뜨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감하고 말았다.
‘이건 하계의 수련과는 완전히 다르구나!’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흑웅이 말했다.
[때마침 방문객이 왔군. 모습을 드러내시오.]저벅
그때 동굴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흑웅의 말에 그 내방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방자가 입을 열었다.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군.”
마치 흑단처럼 기다란 머리카락에 흑요석처럼 고아한 기품을 흘리는 두 눈동자,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되어 있는 이목구비. 그것 은 마치 복희의 외모처럼 무척 인공적이며 완벽한 미(美)였다?
……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이건 ……미친……
[으…… 으음……]“으에에엑!!”
나는 그 외모를 보자마자 벙찐 표정을 짓고 말았다. 흑웅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고, 이윽고 상대방이 씩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인간의 외모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는가?”
“……”
“나와 미의식이 같은 자가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군.”
눈앞에 나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존재가 있다. 아니, 이 경우는 내가 상대를 똑같이 따라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잠시 후 흑웅이 침착함을 되찾고는 말했다.
[위대한 복희여. 왜 우리를 찾아온 것이오?]삼황 복희가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복희가 여기 왜 나타난단 말인가?!
나는 극도로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이 자리에는 흑웅이 함께 있었다. 흑웅의 힘이 있다면 만일의 경우에도 복희가 공격해도 살아남을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나를 한동안 주시하던 복희가 흑웅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이건 신인지 정령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군. 우주의 섭리가 너 같은 존재를 쉽사리 허용치 않을텐데 근원이 무엇인가?”
설마 한눈에 흑웅의 본질을 통찰했다는 건가?!
내가 흠칫하자 흑웅이 팔짱을 낀 채 되레 느긋한 목소리로 여유를 보였다.
[내 근원을 궁금해 하실 게 있소? 질문은 이 쪽이 먼저 했으니 찾아온 용건부터 말씀해주시오.]“용건이라면 간단하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대전사(對戰士)로 나섰던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얼굴이라도 보러 내방했다네.”
[……]흑웅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올 것이 왔다는 난감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 또한 복희가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명계에서의 싸움이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났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유소 그놈은 당연히 복희가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뭐라고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복희가 올 걸 알고 있었다면 미리 피하거나 대처할 방법이라도 생각했을 텐데!
내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흑웅이 말했다.
[누구에게 듣고 이 자리에 왔는지 궁금해지는군. 설마 염제 신농이 발설했소?]]
그러자 흑웅의 반문에
복희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탁록은 염제 신농의 가호 아래 있는 대지. 신농의 이목을 피해서는 아무리 당신이라도 몰래 접근할 수 가 없으며 내부의 정보를 얻을 수 없소. 하물며 질서의 용신인 당신과 죽음의 지배자 전륜성왕이 친한 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려.]“일리있는 추론이야. 제법 머리가 좋군.”
복희는 훗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일세. 얼마 전 그대들의 싸움이 수많은 차원계에 진동을 울렸고 격 있는 자들은 위맹한 전투의 파동에 반응했지. 허나 명계의 일을 쉽사리 들여다보지는 못했고, 나는 그 일에 신농이 얽힌 걸 알고 그와 교섭하여 그대들의 정보를 받아낸 거라네.”
[전륜성왕과 친하지 않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려.]“그자는 보통의 신격과 완전히 근원이 다른 존재. 본래는 혼돈의 편에 서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전륜성왕과 친한 자는 위대한 [아버지]의 회귀를 갈망하는 광신도뿐.”
그렇게 대꾸한 복희가 문득 자신이 들고 있던 부채를 내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흑웅의 주인일 터. 그러나 [옛 지배자]조차 저렇게 어마어마한 정령을 거느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진대 그대는 인간이구나. 도대체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하는 김에 어째서 내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올게 왔나.
‘미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대체 어떻게 일이 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미 이 세계에서 유소와 전륜성왕정도는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희한테 까지 알려줘도 되는 것일까? 일이 어떤 식으로 꼬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으므로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생각이 꼬이지?
유소 그놈은 대체 무슨 속셈이야? 미래를 내다본다면 이 상황이 올지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복희에게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다른 예지자처럼 자기 뜻대로 미래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없다는 뜻인가?
‘짜증 난다….’
나는 그렇게 복잡한 고민을 하다가 문득 복희의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예지할 수 있다면 자신이 뭘 할지 그 행동 또한 정해져있다는 뜻이오?” “으음?”
“아…… 그, 그게.”
나는 엉겁결에 허둥지둥 대며 손을 휘저었지만 이미 말을 해 버린 후였다. 그러자 복희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예지능력자의 모순을 내게 묻다니 재밌군. 그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그대도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겠는가?”
“생각해보겠소.”
“마지막으로 읽어낸 가장 먼 미래가 어떤 미래에 도달했느냐에 따라 다른것이라고 생각하네. 그 미래가 희망이라면 예언자는 자신이 할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절망이라면 행동을 무조건 바꾸겠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미래를 계속 읽는다면 자기가 할 행동이 정해져 있다는 건데 그럼 마치 꼭두각시처럼….”
“후후후후!! 아주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군.”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반문을 하자 복희가 피식 웃었다.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에 갇혀 버리는 걸 걱정하는 모양인데 예언자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 방금 말했듯 자신이 읽어낸 가장 먼 미래 가 희망이나 절망이냐에 따라 예언자는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가 있지. 또한 미래란 아주 찰나지간에도 선택지가 분화하여 억만가지로 나뉠 수 있는 것이니, 그 영악한 자들이 그 사실을 모르겠나?”
“……”
“만일 자네 주변에 그런 예지능력자가 있고 자신의 운명에 속박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렇게 보이게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세. 속박된 것 럼 벗어나지 않는 게 자신에게 최대이득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야. 자기자신조차 운명의 장기말로 쓰는 게 불쌍하다고 여긴다면 그렇겠지만, 보통은 그럴 기회조차 없으니 가련하게 여겨야 할지는 의문이로군.”
나는 복희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어, 어렵군.”
“흐음. 나는 자네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 같다만….”
복희는 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흑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방금 전 신력을 수련하는 것 같던데 내가 그대들에게 도움을 주지. 그 대신에 그대들의 내력을 내게 알려주는 걸세.”
흑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신력은 그대가 없어도 수련할 수 있소. 그리고 주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내 멋대로 결정할 수 있을 리도 없소.]“네 주인은 예지자의 모순에 스스로 갇혀 버린 것 같군. 저 상태로는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치 못하고 어떤 선택이든 후회를 남길 걸세. 그대가 충신이라면 주군을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은가?”
[……]“그리고 처음부터 내게 교섭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충분히 관용있게 받아주지. 그대들 정도라면 나와 교섭을 할 자격이 있으니.”
[…… 못 당하겠군. 과연 지혜의 용신인가……]한탄하듯 중얼거리던 흑웅이 내게 말했다.
[주인. 유소의 일은 머리에서 잊어버리시오. 어차피 그자는 최후의 선택이 다가올 때까지는 방관자일 뿐이오.]“헉!! 인마, 왜 그걸 말해!!”
나는 깜짝 놀라서 흑웅에게 외쳤다. 유소의 존재 또한 극비나 다름 없을텐데 복희 앞에서 말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자 흑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너……”
[방금 전 복희가 주인에게 조언을 해준 것이오. 주인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늘 스스로만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오. 그런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예언자인 유소의 존재 때문에 자기의 선택을 머뭇거리고 속박하게 되지. 그것 자체가 유소에게 말려들어 가는 셈이니 그자의 예언능력따윈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해지시오.]“그놈은 모든 걸 예언하잖아. 그걸 신경 쓰지 말라고?”
[예언능력만으로 치면 황제 공손헌헌원이 몇백 배는 더 강력하겠지. 허나 그런 공손헌원조차 이 시대에 패주(覇主)로 올라서기 쉽지 않을 텐데 주인은 그럴만한 잠재력이 있지 않소?] [결국 유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오. 예언능력이 강력하더라도 그 자체로 힘이 되진 못하기 때문이오. 또한 주인은 그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예언자의 속박에서 벗어나시오.]“그렇군!!”
나는 흑웅의 조언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유소의 예언능력을 알게 된 후에 너무 말려들어 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유소가 어떻게 예언을 하든 간에 나는 마지막에 그 예언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유소는 내가 [큰 굴레]를 넘어왔다는 걸 나와 대면하기 전까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나 자신이 유소의 예언능력에 변수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유소가 언뜻 내 미래를 다 읽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선택권은 내게 있다는 소리이리라!
좋아! 앞으로는 유소의 예언 따위 신경끄고 진행하겠어!
나는 흑웅의 말에 마음을 다잡은 후 복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하지만 우리의 개인정보는 무척 비싸기 때문에 거래를 해야겠소!”
“그거 좋지. 뭐가 필요한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 능력은 혹시 이렇게 쓰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생각대로 곧장 한 손을 들어서 움켜잡는 자세를 취했다.
“상업의 귀갑이여!”
파앗!
갑자기 내 손 위에 귀갑이 떠오르자 복희가 꽤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것은?”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용신 복희와 거래를 하려 하니 정당한 거래인지 판단해 줘!”
[알겠습니다. 상호동의했음을 확인했습니다.]위이잉
다음 순간 갑자기 나와 복희를 둘러싼 이공간(異空間)이 생겨났다. 그 이공간은 언뜻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와 복희 사이에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마치 앉으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복희가 각자 의자에 앉자 귀갑의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공정거래 바랍니다.]그 소리를 들은 복희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재밌는 능력이야. 상업(商業) 그 자체를 능력으로 만들어 버릴 줄은 몰랐군.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상업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특이해.”
“복희여. 당신이 아무리 언변이 탁월해도 여기선 안 통할 겁니다.”
아마 이 권능을 써서 만든 공간에서 거래를 한다면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놈에게 벌을 주게 되어있으리라.
“그렇겠지. 그럼 어디 나부터 제시 해볼까.”
최악
복희는 앉아서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백웅과 흑웅의 내역을 모두 아는 대신에 이쪽에서는 신력의 수련에 도움을 주고 신술을 전수해줄 것이며 질서의 신성들을 소개시켜서 가호를 받게 해 주겠다. 어떠냐?”
“헉!”
뭐, 뭐라구?
신력수련에 신술에 가호까지?!
굉장히 빠방한 조건이었기에 내가 깜짝 놀랐고 이윽고 상업의 귀갑이 허공에서 목소리를 울려 퍼졌다.
[대가는 타당합니다. 교섭에 응할 지를 선택해 주십시오.]“그야 당연히….”
내가 승낙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흑웅이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잠깐!]내가 흑웅을 뒤돌아보자 흑웅이 했다.
[주인의 비밀은 굉장히 가치 있으니 여기서 받아들이는 건 납득 할 수 없다! 좀 더 대가가 필요하다.]그러자 귀갑의 목소리가 울렸다.
[상호동의가 있다면 조건을 변경 가능합니다.]응?
뜻밖의 소리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복희가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전 자에게 이득이 되는 권능인건가? 상대는 바가지를 씌울 수 없어도 본인은 바가지를 씌울 수 있는 거군.”
“헉…… 아니, 그럴 의도는 없었는 데……”
“후후후. 이렇게 재밌는 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래로 오랜만이군.”
왠지 즐거워하던 복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더 제시해도 조건이 쉽사리 맞지 않을 확률이 크군. 정 그러면 그쪽에서 하나 더 추가로 제시 해보지 그러나?”
[노련하군……]흑웅은 침음성을 흘린 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 나는 바가지를 씌운 게 아니오. 충분히 더 받아낼 수 있으니 주인이 스스로 생각해서 제시해 주시오.]흑웅이 완전히 내 편인 건 확실한 것 같다. 흑웅의 조언에 나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 내게 태음지계(太陰之界)와 태양지계(太陽之界)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권을 주시오.”
흠칫!!
“뭣!!”
그 순간 복희의 얼굴에서 평정심이 크게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냉철하게 유지하던 복희의 얼굴이 저렇게 되는 걸 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복희는 한참을 침묵하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바가지로군. 태음지계와 태양지계에 대해서는 오로지 나와 여와만이 알고 있을 터인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그건 여와의……”
내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내 어깨를 잡고 있던 흑웅이 꽉 하고 내 어깨를 세게 잡았다. 나는 흑웅이 말없이 제지하는 걸 느끼자 찔끔했다.
‘아! 외우주의 달기가 말해줬다고 하면 큰일 나겠군.’
뭣보다 이 시대에 달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대답해 주는 것보다는 숨기는 게 더 나은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말을 얼버무렸다.
“……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이오.”
복희는 전에 없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유소라는 놈이 뭔가 했나 보군.”
“아, 아니 그게……”
“알았네. 계속 해 보게.”
“……”
나는 복희의 목소리에서 약간 냉엄한 분노 같은 게 느껴지자 당황스러웠다. 내 눈치로 볼 때 복희는 잠정적으로 유소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저 복희가 분노까지 하는 일은 별로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후폭풍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뭐 유소의 일이 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곧 신경을 끄고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거기에 남겨둔 힘을 얻고 싶소. 그러니 출입권을 주었으면 하오.”
“황당하군. 그걸 외인(外人)이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거기에 가겠다는 건 허공록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겠다는 소리와 진배없다.”
“어차피 지상으로 내려온 당신들이 쓰지도 못하는 힘이 아니오? 허공록 어쩌고 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출입권만 허해 주시오.”
“흐음…”
복희는 굉장히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둘 다 줄 수는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태양지계(太陽之界)의 출입 권뿐이다.”
“어째서요?”
“단순히 내 힘을 봉인한 게 태양지계이기 때문이지. 자기 곳간의 자물쇠를 갖고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내 혈육인 여와의 곳간에 있는 자물쇠는 여와의 열쇠로만 열 수 있으니 여와에게 허락을 구하게.”